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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박웅현, <여덟 단어>

1. 자존自存 - 나를 바라보는 오롯한 힘

by 힘날세상
소파에 누워서 읽다가 어느 순간 앉아서 읽는 책



아내는 카페로 가고 집에 혼자 남았다.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 놓는다. 행여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끌어들여볼 심산이다. 구름에 가린 햇볕은 흐릿하게 돌아앉아 버렸다. 뒷산을 날던 이름 모를 새 몇 마리도 숲으로 숨어들었다. 괜한 허전함에 빠져드는데 수목원 울타리를 넘은 아카시아꽃 하나 뱅실거린다. 창가에서 일렁이는데 들여다보면 겉웃음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엇이든 놓아버린다. 움켜쥔 상념들, 끌어안았던 문장들, 곱게 갈무리해 두었던 몇 개의 낱말들. 그것들이 배회하는 것을 바라본다. 무념, 무상을 생각해 놓고는 슬며시 부끄럽다.


펼쳐놓은 책, 박원웅의 <여덟 단어>. 자존自尊, 본질本質, 고전 古典, 견見, 현재現在, 권위權威, 소통疏通, 인생人生. 힘을 잃은 여덟 단어는 비틀거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덟 단어는 엄청난 걸음으로 다가오는데 그 여덟 단어를 감당하지 못하는 나만 무너지는 것이다.


고희의 문턱까지 오면서 책 앞에서 나는 늘 무너졌다. 인생을 말하는 책 앞에서. 박웅현은 참 대단하다. 그의 책은 그냥, 가볍게 열어볼 책이 아니다. <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다시 책은 도끼다>. 가슴을 확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검이다. 가슴을 베이고 피를 흘리며 그대로 죽어버릴 듯한 책. 심오하게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열변을 토해 놓고는 '귀 기울여 주시되 큰 기대는 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한다. 여덟 단어는 '인생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을'거라고 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짓밟고 갈 게 있다면 짓밟으'라고 말한다. 웃기지 않은가.


박웅현은, 살면서 꼭 생각해봤으면 하는 여덟 개의 가치를 내놓는 광고쟁이 박웅현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그가 가장 먼저 내놓은 말은 '자존自尊'이다. '아모르파티 Amor fati' 명쾌하지 않은가.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2017년인가 김연자는 '아모르파티'를 불렀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찬란한 불빛을 받으며 무대를 흔들었다. 사람들을 열광했고, 삽시간에 온 나라는 '아모르파티'에게 사로잡혔다. 잃어버린 사랑쯤이야 거품에 불과할 뿐이니 슬퍼하지 말라. 다시 다가올 사랑 따위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슴이 뛰는 대로 따르라.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운명이니까 받아들이고 포기해'라는 굴복의 의미, '난 못났으니까 이대로 살아야지'라는 순응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아모르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운명애(運命愛)라고도 말하며 영문으로는 Love of Fate 또는 Love of One's Fate라고 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것을 자신의 근본 사유라고 인정한 '영원회귀 사상'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했다.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e Wiederkunft)는 'The Eternal Recurrence of the Same'. 즉, 동일한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니체에 따르면, 영원회귀를 통해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알게 되는데, 이 과제와 사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모르파티 Amor Fati라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며, 허무의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넘어서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는 결국 더 높은 것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더 높은 것을 향하기 위해 세상이 이끌어가는 대로 따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철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박웅현은 참 쉽게도 우리를 바로 세운다. 아모르파티 Amor Fati.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운명이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것. 바로 '자존自尊'이라고 그는 말한다.


박웅현이 말하는 '자존自尊'은 삶의 기준점을 내 안에 두어야 세울 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소위 '의대반'에 들어가는,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훗날 의사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걸어버리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자존감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의사'를 위해 '지금의 나'를 내다 버려야 하는 아이들. 내가 아닌 세상이 정해놓은 틀 안에 들어가 있어야 인정받는 세상에서 우리의 '자존自尊'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아모르파티 Amor Fati를 말한다. 지금 네가 처한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즉, 네 안의 기준점으로 들여다보는 너의 운명. 그것이 '자존自尊'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존自尊'은 다른 것을 인정하는데서 싹이 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리한 찌르기이다.


Be Yourself!

박웅현이 던지는 말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기준점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자신이 걸을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따르는 전제가 바로 '자존自尊'이고, 그것이 아모르파티 Amor Fati이다.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여덟 가지의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먼저 내놓는 화두는 바로 '자존自尊'이다. 무엇이었을까. 그가 가장 먼저 '자존自尊'을 내세운 것은. 그 답을 구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으로 여덟 가지 화두를 받아들였다. 책을 읽는 동안 그 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보게 되는 그의 전언傳言.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모든 멘토는 참고사항일 뿐이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이시길,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내 안에 기준점을 두고. 나의 시선으로. 그리고 또 한 번 예리한 찔림을 당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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