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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박웅현, <여덟 단어>

4. 견見 - 꽃게장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by 힘날세상



언제나 무심코 즐겨 먹는 간장게장



박웅현이 말하는 인문학적 삶의 태도 네 번째 단어는 견見이다. '견見'이 무얼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먼저 내놓은 것은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등판에 간장이 울컥 쏟아질 때/꽃게는 배 속에 알을 껴안으려고/꿈틀거리다가 더 낮게/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어찌할 수 없어서/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한때의 어스름을/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스며드는 것>



그는 '견見'이라는 주제로 말하겠다면서 왜 이런 시를 던졌을까? 물론 박웅현은 곧바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다. 꽃게장을 맛있게 먹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좀 다른 눈으로 바라보라고. 그래야 뱃속의 알을 지키려는 엄마꽃게의 버둥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엄마꽃게가 말하는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똑같은 꽃게를 보고 다른 것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견見'은 영어의 'look'이다. 영어 'look'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한자 見, 視, 看, 觀 중에서 '見'을 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택한 '見'이 옳은지를 따질 이유는 없다. '視, 看, 觀 '을 쓰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어떤 대상을 보고 다른 것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見'은 '관찰 觀察'이다. 쉽게 말하지 않고 왜 어렵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見'에 담긴 의미가 들여다본다는 것이고, 들여다봐야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見'은 비틀어서 다른 시각으로 보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을 모두가 바라보는 것처럼 획일적인 고정관념으로 바라보지 말하는 것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廳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


視廳하지 말고 見聞하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미 결말 부분을 읽어버린 추리소설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책은 결말보다는 결말에 이르는 길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4학년 때 소설창작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은 한 가지 물건을 두고 여섯 방향에서 바라본 느낌을 각각 500자로 써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그 물건을 바라보고 그 느낌을 써보라고 했다. 교수님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것이 박웅현이 말하는 見聞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어떤 대상이든지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도 박웅현이 말하는 '見'이 좀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바라보되, 시간과 애정을 쏟아부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웬만한 작가들이라면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하며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다.


'결핍'을 그는 말한다. 배부른 자가 한 숟가락의 밥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모르듯이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눈으로는 '見聞'할 수 없다고 말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헬렌켈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산을 보았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 숲을 날아다니는 새, 새를 따라 숲에서 사는 바람, 발에 밟히는 낙엽. 그녀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산을 보았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길가에 꽃이 피었다.'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길가에 꽃이 힘들게 피었다.'는 아무나 말할 수 없다. 시간과 애정을 가지고 보고 또 보고, 마음을 열고 끌어안고 품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또 하나, 박웅현이 말하는 '見聞'의 방법은 낯설게 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손자와 같이 걸어가는데 보도블록 틈에서 고개를 내민 풀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는다. '할아버지, 얘는 힘들게 보도블록 틈에서 살고 있을까요?' '그러니까. 힘들게 살고 있구나.' '그래도 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살고 있잖아요.' 평소에도 엉뚱한 말을 잘했던 게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같은 풀을 보았는데 손자는 나보다 한 발 더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낯설게 보려면 바라보는 시각을 엄청나게 넓혀야 한다. 선생님은 헬렌켈러의 손바닥에 물을 부어주고, 손으로 물을 만져보게 하면서 보지도 못하는 그녀의 손바닥에 '물'이라고 써주었다. 보이지 않으므로 그녀의 흡입력은 무한했었다. 온몸으로 받아들인 '물'. 우리가 눈으로 보는 '물'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보려 하지 말라.' 기어이 박웅현은 덧붙인다.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겁게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그중에서도 '깊이 생각하라'는게 그가 매듭짓는 말이다. 빵집에 갈 때마다 손자가 하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 여기 있는 빵 속에 외계인 어린이가 변장해서 숨어 있어요. 엄마가 지구 어린이들의 마음을 연구하려고 왔는데 이 아이가 엄마 몰래 따라와서 빵으로 변해서 숨어 있는 거예요. 잘 살펴봐야 해요.' 동화를 많이 읽더니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빵을 빵으로만 보지 않고, 외계인 어린이로도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깊이 파고 들어가 보는 생각.


'깊이 들여다본 순간들이 모여 찬란한 삶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박웅현의 메시지는 어쩌면 어린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이 아닐까. 깊지는 않지만 넓고 넓게 확장해 버리는 사고, 무엇이든 연결해 버리는 사고.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견문見聞'은 아닐지라도 그 출발점일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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