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전古典 - 시대를 관통하는 지혜의 힘
인문학적 삶의 태도 여덟 가지를 말하겠다던 박웅현은 느닷없이 사랑가를 부른다. 김용택 시인의 '첫사랑'이다.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설날입은 새 옷도/아, 꿈같던 그때/이 세상 전부 같던 사랑도/다 낡아간다네/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내게 새로 열렸으면/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시골의 낡은 찻집처럼/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웬 사랑타령인가 하고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의 한 구절을 기어이 더 내놓는다.
누가 그랬던가 '영원한 사랑'이라고? 영원한 것은 오직 돌과 청동과 푸른 하늘뿐이다. 저 이끼 낀 돌 속에 사랑의 혼이 서려 있을까? 그렇지 않다. 흘러가버리는 것, 먼지가 되어버리는 살, 무너져 버리는 사랑의 철저한 무無ㅡ해묵은 돌들이 증언하는 것은 그런 것뿐이다. 모두가 무너지고 오직 화려한 대문만 남은 이 사랑의 성城은, 그리하여 마땅히 하나의 폐허인 것이다.
이쯤 해서 알았다. 박웅현은 쟈크 프레베르의 <고엽>이라는 샹송까지 내놓았지만 그가 왜 이러한 사랑가를 쏟아내는지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변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 같은 '사랑'도 시간 앞에서, 세월 앞에서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이 사람들을 앞에 앉혀놓고 강연한 내용으로 쓴 것이므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불쑥 본론부터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 청중들의 이목을 끌어당겨야 할 필요성을 그는 잘 알고 있었으리라.
고전古典
1. 사전에 기대어보면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통
틀어 이르는 말
2. 어떤 분야의 초창기에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이룩해 후대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저작 또는 창작물.
사전적 정의에 기대어 볼 때 고전은 어떤 가치를 변함없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도, 그래서 사람이 바뀌어도 불변의 가치를 가치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불변의 가치. 연년세세로 이어질만한 가치.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삶의 태도. 그것을 박웅현은 고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전은 앞에서 말한 본질과 무엇이 다른가. 본질이 아닌 것이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고전이라면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고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것, 즉 본질과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본질을 담고 있는 것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면면히 이어져 오는 고전인 것이다.
'고전'이 '본질'과 일정 부분 맥을 같이 한다고 한다면 '고전'도 '본질'과 같이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고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그 읽을만한 가치는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읽는 사람의, 보는 사람의, 듣는 사람의 몫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전'을 박제하여 일정한 틀에 가두어 놓는 짓을 하고 있다.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은 성역이고,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무조건 명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예술이든 문학이든 그 가치와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았을 때 나도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소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도 있다.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은 모두 서양의 것인가. 문명과 물질이 발달하면서 세상이 좁아지고 있다. 서양과 동양이 혼재되면서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소위 'K-POP'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고, 동양의 젊은이들이 서양식 사고방식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양, 서양을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화 사대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죠프의 형제들>에서 느끼는 마음의 일렁임 못지않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들끓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때, 서양의 유명한 클래식은 훌륭한 치료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유행가 한 소절도 상황에 따라서는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우리 선조들의 과학 발명품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장영실이 만든 천문관측기구,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이율곡, 이퇴계의 저서보다 논어, 맹자, 탈무드를 앞세우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80년 먼저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우리나라 직지심경에 대해 얼마나 가르치고 있는가. 애국심을 길러야 한다며 국사만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정파에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인 인물 중심의 편협한 역사가 중심에 놓여 있다. 선조들의 생각과 그것에 힘입어 만들어 놓은 과학적 발명품을 가르치고 배워야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깨우치고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지니게 될 것이 아닌가.
박웅현이 말하는 고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 우리 마음속에 소중한 가치로 담겨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무슨 피아노협주곡만 고전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작곡하고 연주하는 가야금협주곡에서도 고전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앞에서만 북적거릴 것이 아니라 신윤복, 김홍도의 풍속화 앞에 앉아 당시 선조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동적구조動的構造'라는 말이 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이다. 국문과 학생이라면 시험문제를 꼭 받아 드는 말이기도 하다. 작품은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작품의 내용과 가치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알퐁스 도테의 <별>이라는 소설을 고3 때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다. 우리는 양치기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비웃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50살이 넘어서 꼭 <별>을 읽어보라고 당부하셨다. 지금은 목동인 '나'의 순수한 마음 앞에 숙연해진다.
'고전'은 오랫동안 이어져 오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틀에 박힌 듯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고전'이라고 딱 정하지 말고, 정해놓고 강요하지 말고, 가치를 담고 있는 '고전'을 스스로 찾아내고, 찾아낸 가치를 실현하고 면면히 이어갈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문화사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