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현재現在 ㅡ개처럼 살자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인문학적 삶의 태도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밤을 새우며 쓴 글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벌인 강연을 모아 놓은 것이다. 강연은 다시 들을 수가 없기에 책을 읽는 것보다 더 강력한 충격을 주어야 한다. 한 번 듣고 지나가는 그들이 무언가 받아 적을만한.
그런데, 그런 강연을 하고 있는 그가 '현재'라는 화두를 들고서 청중들에게 던진 말은 좀 불안하기도 하다.
'개처럼 삽니다.'
TV 대담 프로그램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의 질문, '계획이 뭡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개처럼 산다니. 이건 신선하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대답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그가 덧붙인 말을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개는 밥을 먹으면서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자면서 내일의 꼬리 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박웅현. 그는 이 한 마디로 모여든 청중을 무너뜨려버렸다. 그리고 던지는 한 마디. 그건 확인 사랄이다.
'Seize the moment, Carpe diem현재를 살아라.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박웅현이 말하는 '현재'는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이자 철학이다. "현재에 충실하게 인생을 살아나가자"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현재에 충실하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는 밥맛을 느끼고,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책을 읽을 때는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우리를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알림은 우리의 집중을 흩뜨리고, SNS는 다른 사람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멀티태스킹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 가지 일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순간순간들을 챙기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일까. 무엇이 제대로 된 삶의 태도일까.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아니면 하나의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 깊이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인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과거에 대해 후회하거나,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에 눌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을까.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ㅡ가족과의 저녁 식사, 친구와의 대화, 혼자만의 독서 시간 등ㅡ을 진정으로 음미하지 못했을까.
어제는 아산 천년 숲길 중 천년비손길을 걸었다. 13.49km. 숲길과 마을길로 이어지는, 그중에서 7할 정도가 땡볕의 포장도로를 걸어야 하는. 힘든 걸음이었다. 산길을 걸을 때는 풍족하고 넉넉한 걸음을 이어가지만,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라고 해도 포장된 마을길을 걷는 걸음은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어제도 그랬다. 오돌개 마을에서 백학동 마을을 지나 송악저수지에 이르는 길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롯한 삶의 체취를 따라 걸었다. 그러나 송남휴게소에서 봉곡사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도로 위에 내려놓는 발걸음은 의미가 없이 터벅거릴 뿐이었다. 땡볕과 아스팔트를 튀어 오르는 지열에 숨이 막힐 즈음에서야 박웅현을 생각했다.
'개처럼 걷자.'
봉곡사에서 갈미봉을 넘어 오돌개 마을에서 솔바람길을 따라 봉곡사로 돌아왔으면, 장강 1리 마을에서 긴골산 길을 따라 그늘에 덮인 숲길을 걸었더라면. 이런 놓쳐버린 시간들을 떠올리지 말자. 다음에는 이런 땡볕은 걷지 않을 거야. 좀 더 좋은 산길을 따라 바람과 조망을 즐기며 걸을 거야. 어디선가 맴돌고 있을 다가지오지 않은 앞날을 그려보는 일은 끄집어 들이지 말자. 그냥 지금 땡볕이 작열하는 포장도로를 걷는 걸음에 힘을 주자. 박웅현의 말을 한 번 따라 해 보자.
지금 내가 걷는 걸음. 지금 내가 부딪치고 있는 시간. 내가 받아들이는 세상에 집중하며 걸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 내가 걷는 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 위에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포장도로 위에서는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몇 마리의 개미, 거의 말라붙어버린 시냇물 아래에서 물고기는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힘든 삶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나 또한 어젯밤부터 통증의 신호를 보내던 무릎의 아픈 이야기와 함께 걷고 있다.
박웅현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의 변화를 요구한다.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머물러라. 나는 정말 아름답구나.
잃어버리기를 잘하는, 박웅현의 딸이 새로 산 아이팟에 적어 놓은 글귀라고 한다. 이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하며 악마의 힘을 빌리는 대가로 만약 자신의 삶에 만족해 이렇게 외칠 수 있다면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는 말이다. 박웅현은 딸이 이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말에서 그녀가 자신과 같이 '개처럼 살자'는 삶의 태도를 가진 것 같아 좋았다고 한다.
지금, 지루하고 지루하기만 한 땡볕이 쏟아지는 도로를 걷고 있는 지금은 내가 마주한 '현재'이다. 박웅현의 말대로라면 나의 걸음 하나하나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비틀거리는 나의 걸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개망초, 발밑에서 헤매고 있는 개미, 그리고 지느러미를 휘젓고 있는 가녀린 물고기를 만나야 한다. 그들과 삶을 나누어야 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현재'이다. 내가 충실해야 하는 현재, 개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는 현재.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걸음을 바로 세울 수 있었고, 봉곡사로 올라가는 길은 생생하게 살아났다.
봉곡사로 가는 길을 걸으면서 나는 외람되게도 '개처럼 사'는게 무엇인지 깨닫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