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9 박웅현, <여덟 단어>

6. 권위權威 ㅡ 동의할 수밖에 없는

by 힘날세상

권위權威ㅡ동의할 수밖에 없는


큰 컵에 따라온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다섯 단어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단어 권위權威에 대한 내용은 너무너무 쉽게 이해가 되었는데도 호락호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미인 앞에서는 눈을 뜨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 우리는 정말 '문턱증후군'에 빠져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예 매몰되어 있다. 소위 '문턱'이라는 가림막 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주눅들다'이다. 기운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태도나 성질. 딱 들어맞는 말이다.



대학생 때 겨울 방학을 절에서 보낸 적이 있다. 알량한 문학앓이에 빠져 방황하던 무렵이었는데 소설을 쓰겠다는 겉멋이었다. 절의 주인. 절대 스님이 아닌, 산신山神님이라 불러야 했던 탐욕의 화신. 그러나 깊이가 있던 눈빛을 쏘아대던 스님. 아니 산신님의 아들은 청와대 경호원이었다. 눈이 참 많이 내렸던 날, 무릎까지 빠지던 산길, 마을에서 40여분을 걸어 올라와야 했던 그 눈길을 헤치고 우체부는 투덜투덜 걸어왔다. 발신인이 청와대 경호실 000이라고 적힌 편지 한 통을 들고서. 평소라면 등기우편도 마을 이장님 댁에 놓고 가던 우체부가 일반 우편물 하나를 들고 눈길을 걸어오게 했던 이유는 오직 청와대 경호실이라는 여섯 글자였던 것이다.


요사채 뒤에 붙어 있는 방 아궁이에 애꿎은 군불만 때다가 석 달만에 빈 원고지만 들고 나왔었다. 잔설이 남아 있는 산길을 내려오면서 투덜투덜 걸어 올라왔을 우체부를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을 테지 청와대 경호실에서 보낸 편지가 아닌가.' 그때 내가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읽었다면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대한 굴복'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박웅현이 말하는 '권위權威'는 '동의한' 것이 아니라, '동의된' 것이라야 한다. 왜 '동의된' 것이라야 할까. 파면된 대통령이 패딩이나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녀 구설수에 올랐다. 파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권위는 '동의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외 순방을 가면서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맥주를 마시고, 축구경기나 한가하게 보고 있었다는 그의 권위權威는 어땠을까? 박웅현이 왜 '동의된' 권위權威라고 말했을까?


'동의하다' '동의되다'의 차이. 여기에 박웅현의 힘이 실려 있다. '동의하다'는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동의되다'는 것은 그 대상의 영향으로 나 스스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검은 셔츠와 무릎이 구멍 난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스티브 잡스. 자신의 회사를 드나들거나, 음식점에 식사하러 갈 때도 그 헐렁한 청바지 차림으로 혼자서 다녔다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심지어 대기가 많은 음식점에 갔다가 사람이 많아 밥도 못 먹고 그냥 나왔다는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 세계적인 광고회사 TBWA의 장 마리 드루는 한국에 올 때 혼자서 왔다고 한다. 비서를 동반하면 비용이 두 배로 들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의 회장이었다면 이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진료 예약을 하려면 몇 달씩 걸리는 최상급 의료기관에 우울증이 있다고 곧바로 입원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들의 권위權威와 같을까?


박웅현이 왜 굳이 '동의된'이라고 썼는지 이해가 되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누구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스스로 끌려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대통령의 자리에 있어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사람들 위에 서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진 권위, 즉 내 의사와 상관없이 '동의한' 권위權威일 뿐이다.



박웅현은 권위의 진정한 원천이 '실력'과 '인격'에 있다고 강조한다. 실력은 해당 분야에서의 전문성과 능력을 의미하고, 인격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이다.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타인이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동의된' 권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훗날 우리가 좀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되었을 때 만들어진 권위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영국인들은 외부의 법규는 모름지기 개인 내부의 입법자에게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웅현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의 한 구절을 독자들의 가슴에 담아준다. 그의 메시지이다. 내부의 입법자가 내리는 비준. 그것이야말로 '동의된' 권위權威인 것이다.


책을 덮는다. 박웅현의 '권위權威'에 대한 통찰은 단순히 개념적 구분을 넘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을 보여준다. 우리가 받들어야 하는 진정한 권위는 남을 누르는 힘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힘이며, 두려움이 아닌 존경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슴에 담아준 메시지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8 박웅현, <여덟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