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화 방房

by 힘날세상
인공지능 Copilot이 그려준 이미지.


나는 항상 아내 옆에서 잔다. 늙으면 각방을 써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도 아내 옆에서 잔다. 아내가 산 돌침대 반절을 차지하고 잔다. 아내가 돌침대가 등이 배긴다고 아들과 눈을 맞춰서 고르고 골라서 산 토퍼에서 몸을 눕힌다. 아내가 깨끗하게 빨아서 고슬고슬하게 펼쳐놓은 하얀 이불을 덮고 가끔씩 코를 골며 잔다. 편안하다.



창문을 타고 넘는 불빛을 막아야 한다고 달아놓은 암막 커튼을 치고 눈을 꼭 감고 잔다. 아내의 손을 잡고 허벅지에 낮은 베개를 하나 끼고 아내를 바라보고 잔다. 편안하다.



잠자는 때를 제외하면 나는 내 방에 박혀 있다. 3 미터 20짜리 책장과. 기다란 책상을 넣은 방에 앉아 논다.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하게 밀어 넣고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앉아서 눈에 띄는 대로 집어온 책을 읽는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그냥 읽는다. 시집도 가져다 읽고, 어쩌다가는 성경도 읽는다. 그렇다고 신앙이 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다시 읽으려고 뺐다가 다시 꼽아 놓았다. 소설이라는 게 한 번에 끝까지 읽어야 하는데 열 권이나 되는 걸 멈추지 않고 읽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방에 들어가서는 집에 혼자 있어도 꼭 문을 닫는다. 갇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방 밖의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단절이라기보다는 휩쓸리지는 않으려는 마음이다. 세상이 나를 향해 밀려 들어오는 것보다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필요한 만큼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기적일까. 편향된 삶일까.



내 방은 작다. 그래도 이상의 소설 '날개'에 나오는 '손수건만 한' 해가 드는 만큼 작지는 않다. 하루 종일 해가 들고, 사람들이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세상이 바라다 보이는 방이다. 그러나 그 방에서 날개의 '나'처럼 혼자서 논다. 퇴직하면서 자동차 다음으로 많은 돈을 주고 산 노트북을 열고 써지지 않는 글을 쓴다. 하루를 두드린 자판은 한 줄 글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속이 상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혼자서, 세상을 저만큼 밀쳐놓고, 흘러가는 세월도 보고, 울고 가는 사람들의 생활도 본다. 혼자서 보다가 지치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세상으로 나가 걷는다. 뒷산을 걷는다. 나무 사이로 난 좁은 숲길을 걷는다. 햇볕을 따라 걷기도 하고, 바람 가운데를 가르고 걸어도 본다. 걸음은 걸음을 낳고, 그 걸음을 많은 상념들을 불러다 놓는다. 그렇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걸음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늘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내 걸음. 내 걸음조차 보지 못하는 나. 그렇게 나의 방은 답답하다.



밤을 기다린다. 어쩌다가는 밤이 시작도 하기 전에 잠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에는 시골집 마루 밑에 떨어진, 쿵쾅거리는 유년시절을 들고 그대로 새벽을 만나기도 한다. 작은 방에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해도 나를 오롯이 만날 때도 있다. 감사하다.



'작가의 산실' 같은 거창한 이름은 붙일 수 없지만, 나는 방에서 살아나고 싶다. 소설가 이상이 절규하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가 날개가 돋아났으면. 허황스럽지만 그런 꿈을 꾼다. 물론 나는 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에게 날개가 돋아나지는 않는다는 걸. 또 그만큼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꿈을 꾼다. 도둑의 심보이다.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빠져 폭설에 내리던 겨울을 건넜다. 몇 번을 읽었을까. 그야말로 홀릭이었고, 매몰이었다. 폭설에 세상이 묻히던 것처럼. 황정은의 '연년세세', 김대현의 '홍도'를 읽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었고, '칼의 노래'를 읽었다. 서철원의 '최후의 만찬', 남난희의 태백산맥 종주기 '하얀 능선에 서면'을 읽었다. 책 읽기에 어떤 중심이 있는 게 아니고, 손에 쥐어지는 대로 읽었다. 남독이었다. 그들이 펼쳐내는 세상에서 하늘을 봤고, 땅의 속삭임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김없이 털어놓는 삶의 일면을 주워 담으며 16층 아파트의 무거운 고요를 즐겼다. 그러나 세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방을 무의미하게 헤매고 있었고, 나의 노트북은 열리지 못했다. 말하자면 패배였다.



나의 작은 방에서 나는 언제나 패배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뚜벅뚜벅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한 자신들의 호흡을 했고, 당당한 걸음이었다. 태백산맥을 한 달 동안 홀로 걷는 동안 남난희는 분명한 자기의 걸음을 걸었다. 김훈의 자전거 '풍륜'은 자기 속도로 굴러갔다. 나만 나의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장미숙은 '의자, 이야기를 품다'를 읽었다.



마음속에 툇마루 하나 들여놓고 산다는 건, 현실에 지쳐 꿈조차 시들어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욕심이 지나쳐 마음이 사나워질 때도 마음속의 툇마루는 내게 속삭인다. 버려야 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먼 곳의 신기루가 아닌, 가까운 곳에 있는 소소한 행복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ㅡ 장미숙, '툇마루'에서



장미숙은 툇마루 하나쯤은 들여놓고 살아야 한다고 한다. 현실에 지쳐 꿈조차 시들어 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툇마루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툇마루는 말하자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인 셈이다.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집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툇마루에서 식은 보리밥을 한 그릇 퍼다가 담북장을 한 숟가락 퍼넣고 우걱우걱 씹어대던, 그 배부름을 즐기며 엎드린 채로 숙제를 하다가 낮잠에 빠져버렸던, 밤이면 대문 옆에 있는 개복숭아를 한 소쿠리 따다가 먹으며 모기에 뜯기면서도 먹었던 툇마루가 있었다. 어떤 날은 툇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자기도 했었다.



장미숙의 툇마루를 읽다가 지금은 다 없어지고 만 툇마루를 생각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마루판 하나가 삐그덕거리던 그 툇마루는 '현실에 지쳐 꿈조차 시들어 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툇마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음으로 품고 있는 툇마루는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방은 야누스의 얼굴이다. 문을 열면 하나의 세상이고, 문을 닫으면 단절이다. 세상을 향한 문을 열어두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나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그때마다 갇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늘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의 방에 있고, 나는 나만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문을 닫는다고 해서 세상과의 단절은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세상으로 통하는 통로는 방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고, 내가 읽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내가 웅크리고 있는 작은 방은 그 옛날 시골집의 툇마루이다. 장미숙이 말하는 '현실에 지쳐 꿈조차 시들어 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는 툇마루'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방에서 '꿈초자 시들어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는데?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겠다고, 아니 문을 열어 세상을 받아보겠다고 밤을 밝히고, 자판을 두드리고, 책장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방문은 늘 닫혀 있였고, 나는 불안했고, 숨을 할딱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을 향하고 있는 나의 방은 늘 불안하다. 참외서리를 하러 갔던 다리 건너 마을 아저씨가 우리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린다. 참외서리를 추궁하러 온 것이 아닌데도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다는 떨림이 가득했던 것처럼 께적지근하다. 자꾸만 이상의 '날개'가 생각나는 그런 방이다.



그래서 아내 방에서 잔다. 오늘도 코를 골며 뒹굴며 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1화 편의점, 어디까지 가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