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소나무라고 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새벽녘에 잠을 깼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서 여간해서는 새벽녘에 잠을 깨는 일이 거의 없다. 더 자야겠다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으나 잠은 멀찌감치 달아나고 말았다. '정신이 은화처럼 맑'다던 소설가 이상이 생각났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거실로 나왔다.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빗방울은 바깥세상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다. 봄날의 새벽은 비와 함께 하루를 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은 저마다의 숨을 들이켜고, 제각각의 날숨으로 하루를 닫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하루를 세울 것이다. 나는 오늘을 어떤 걸음으로 걸어야 할까. 목표 같은 것이 없는, 그래서 계획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나의 걸음은 보헤미안의 그것이었으면 좋겠다. 방랑자, 세상이나 관습에서 자유로운 걸음을 걷는. 예술이나 문학가는 아니더라도 필리스틴(Philistine)으로 빠지지는 않는 걸음.
커피를 한 잔 마셔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 느낌에서 커피잔까지 들어 올린다면 저 빗속을 비틀비틀, 이리저리, 휘청휘청, 갈팡질팡 걸어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 생각을 밀어내는데, 느닷없이 양구 펀치볼이 들어와 자리 잡는 게 아닌가. 비 오는 날 창가에 매달리는 빗방울을 보다가 펀치볼을 생각하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펀치볼. 거기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친구에게서 얻어들었던 펀치볼. 언젠가 TV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에서 한 번 보았던 펀치볼. 의식의 심층부 어디쯤에 나도 모르게 잠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펀치볼은 참 강력한 흡입신공을 시전하였고, 울고 싶은 데 뺨 때려 준다고 나는 배낭을 패킹하였다. 새벽을 달렸고, 돌산령 터널을 뚫고 펀치볼에 들어섰다. 화채(Punch) 그릇(Bowl) 같은 완벽한 분지의 가운데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말하자면 감동이었다. 펀치볼에서.
펀치볼의 아침은 고요를 넘어 적막함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렸고, 가라앉는 적막을 쓸어가기도 했다.
ㅡ오늘 걷는 길은 오유밭길 중에서도 도솔숲길로 대략 9.5km 남짓되는 숲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저를 잘 따라오시면 야생화가 펼치는 아름다운 향연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안내사는 앞서 걸었고, 7명의 탐방객들은 바람에 떠밀려 뒤를 따랐다. '지뢰'라는 팻말과 조바심으로 나란히 걸었다. 안내사는 가끔 철문을 열었고, 우리가 통과하면 잠갔다. 말하자면 펀치볼의 숲길은 세상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나, 누구나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헤픈 산길을 아니었다. 막고 가두어 놓은 길, 제한된 걸음으로 세상의 기운이 흐르고 있는 길, 그래서 걷고 싶은 길이었다.
부부소나무 전망대라고 했다. 부부소나무라고 했다. 펀치볼의 속살을 들춰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소나무가 있었고, 전망대가 있었다. 그리고 펀치볼은 교태롭게 누워 있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개의치 않았고, 쏟아지는 햇볕을 그 관능적인 속살로 다 받아내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했고, 가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왜 핏물이 흘러야 했냐고 했다. 눈으로 덮인 펀치볼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다고 했다.
부부소나무 전망대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서 펀치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겯고 서있는 것이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뿌리까지 하나가 되었을 것 같은, 누가 봐도 다정한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펀치볼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서 있는 소나무는 눈이 침침하고 다리 힘이 빠져나가는 우리와는 달리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하게 서 있다. 우리도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봄날의 기운이 가득하게 내려오고 있는데도 남은 날을 꼽아보는 때가 많은 늙은이들의 마음은 허허로운데 소나무는 푸른 이파리 드리우고 솔향을 은은히 풍겨내고 있었다.
부럽다는 생각으로 돌아서는데 그들과는 조금 떨어져서, 더 크고 우뚝하게 서 있는 또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보았다. 아무런 교감도 없는 듯이 서 있는. 좀 소외된 듯하고, 밀려난 듯한 느낌을 보이는 또 한 그루의 소나무.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채, 부부소나무의 뒤편에 조용히 서 있었다.
ㅡ 이 나무는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야?
ㅡ그러니까 안 어울리네.
ㅡ베어내는 게 좋을 듯하네. 그래야 부부 소나무가 되지.
사람들의 궁시렁은 떼로 몰려 가, 그 한 그루의 소나무를 흔들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소나무에 끌려들었고, 좀 굽은 듯한 소나무에 눈길을 주었다. 부부소나무에 비해 허리가 굽어 꾸부정하게 서 있는 소나무는 거친 몸을 세우고 부부소나무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을 따라 429 고지의 신갈나무가 서 있었다.
105발의 실탄과 수류탄 두 발을 매단 탄띠를 허리에 차고 처음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던 날, 두려움에 짓눌려 호흡이 어지러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억누르고, 감추고 숨기고 있었으나 누군가 내 얼굴을 주의해서 들여다봤다면 그 부끄러운 모습을 남김없이 보았으리라. 방탄헬멧, 두꺼워서 무겁고 불편한 방탄조끼가 머리와 가슴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DMZ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군사분계선 남쪽이므로 적은 없을 거라고, 그것보다는 발밑의 지뢰가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50만 촉광에 빛나는 하사 계급장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참 알량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그 두려움에 맞서며 걸었다.
ㅡ정하사, 부끄러워하지 마라. 나도 처음에는 무섭고 두려웠다. 여유 있게 걸어. 눈에 힘도 빼고.
대원들의 맨 뒤에서 같이 걷던 선임하사님이 나직하게, 그러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들킨 것이었다. 티 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도. 부끄럽게도.
수색정찰 B-2코스는 429 고지에서 끝난다. 소대장이 GP와 무전기로 교신을 하는 동안 우리는 사방을 경계하고 매의 눈으로 살폈다. DMZ는 참 평화로웠다. 하늘은 푸르렀고, 청량한 공기가 가득했다. 나뭇가지에서 담록의 이야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온갖 꽃이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나무도 DMZ의 한 구성원으로 429 고지 꼭대기에 서 있었다. 신갈나무였다.
신갈나무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무의 영험이었을까. 수색정찰을 마치고 GP로 복귀하는 걸음마다 그 신갈나무는 서 있었다. 야간 경계 근무, 수색정찰, 매복 근무 등 GP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나무는 내 의식의 중심에서 우뚝 솟아 있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 그 나무는.
안내사는 걸음을 서둘렀다. 송가봉이 펼쳐놓은 산자락에 온갖 야생화를 지천으로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야생화의 수줍은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일행들은 송가봉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수색정찰을 마치고 돌아가는 대원들 같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무 말없이 서 있던 소나무는 신갈나무가 되어 있었다. 그날 429 고지에서 보았던 신갈나무가 되어. 두려운 마음으로 기대어 서있던 신갈나무가 되어. 딱 한 번 보았던 신갈나무가 되어 서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였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버리고 나와 같이 있는 어머니였다.
울고 싶었다. 따스하게 내리는 봄볕을, 노랗고, 하얗게 피어 봄을 노래하는 들꽃들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젖먹이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