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 산문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염제炎帝라고 하던가. 겨울 추위를 동장군冬將軍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여름날 폭염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더위를 일컫는 말도 많아서 불볕더위, 가마솥 더위, 용광로 더위, 심지어 마그마 더위와 같이 무서운 말들에 빗대기도 한다. 비유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하는 것일 게다. 그에 비해 추위는 기껏해야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매서운 한파 정도 아닌가.
낮에는 에어컨의 치마폭에 숨어 있다가 저녁에 공원에 가서 러닝을 했다. 젊었을 때 마라톤을 하던 시간을 반추하며 땀을 흘리고 나면 몸속을 휘젓고 다니던 잡雜것들이 더러는 빠져나오기도 하는 까닭이다. 가진 것이 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땀범벅이 되고 나서 찬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나니 개운하다.
수박이나 한 입 베어 물고 배통을 다 드러내놓고 코 골며 잠이나 자면 좋을 것을 독후감을 쓰겠다고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 접속이 안된다.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소설론 시간에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읽었던 이범선의 <고장 난 문>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한 달 이상씩 방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문이 고장 나서 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그걸 못 참고 하루 밤새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요새 며칠 노트북을 열어보지도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인터넷이 먹통이 되니까 불안해지는 거다. 무료. 허무, 무사, 침울을 거쳐 고통으로 이어지는 마음이 코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소설 속의 화가가 된 느낌이다.
그 불안한 마음으로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을 펼쳤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그녀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를 우연히 읽고 난 후 미친 듯이 끌려들어 구입한 안희연의 산문집. 그녀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과 함께 여름을 건너게 될 책. 가슴을 울리는. 어쩌면 글 쓰는 자세에 대해 드러나지 않게 말해주는. 불빛을 비추어야만 내용이 드러나는 암호 같은 책.
이렇게도 글을 쓰는구나.
글은 이렇게 쓰는구나.
그녀가 열어 보이는 세상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늘 내가 보던 흔한 일상이었다. 귤, 밤, 케이크, 얼굴, 빨래, 하모니카, 화초, 단추, 겨울 등등. 나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
안희연은 그 사물들 안에 담겨있는 세상을 낱낱이 꺼내 놓는다. 그러면 그 세상은 생생한 숨을 쉬며 살아나고, 나는 그 세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희연은 시인이 아니라 마법사다. 빈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고 빈 손에서 비둘기를 날아오르게 하는 마법사. 그녀의 마법은 실로 대단하다. 여러 모양으로 그려놓은 세상은 깊이가 있었고, 팽팽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칠해놓은 저마다의 색깔. 나는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저는 상상합니다. 아마 당신도 귤을 숨겨본 적 있는 사람일 거라고, 당신의 귤은 무엇이며 당신은 그 귤을 어디에 숨겨두었을까요. 겨울은 겨울의 속도로 흐르고, 숨겨둔 귤은 잊혀가고, 우리는 또 삶에 노랗게 질린 얼굴로 무럭무럭 나이를 먹겠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창밖은 겨울. 당신은 제 속을 읽었는지 불쑥 이런 말을 꺼냅니다. 그나저나 까먹는다는 말 좋다. 귤을 하나씩 까먹을 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지워지는 거야. 난로에 귤 구워 먹으면 진짜 맛있는 거 알지. 차가운 귤을 까먹으면 차가운 기억이, 따뜻한 귤을 까먹으면 따뜻한 기억이 지워진다면 좋겠다. 이렇게 난롯가에 도란도란 앉아서,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먼 기억까지 서둘지 않고 지우면, 그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런 뒤에도 남는 귤 하나가 있다면.
'귤의 시', 에서(p. 16)
겨울이면 둘러앉아 무심코 까먹는 귤에는 우리가 숨겨 놓은 것들이 있다. 어쩌면 다 지우고 싶은 것들. 귤을 까먹듯이 하나씩 하나씩 지워내고 싶은 것들. 그러나 끝내 남아 있는 하나의 귤, 아니 우리의 시간. 지우지 못하고 죽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마법사는 마법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는다는데. 어디까지나 그 마법을 본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 놓는 것이라는데. 안희연 시인이 시전하는 마법의 비밀은 찾을 수나 있을까.
마음은 안으로 삼키고 귤을 통해 귤 너머를 본다. 혹등고래의 왼쪽 눈, 내 영혼의 푸른 꿈, 나는 그 귤을 어디에 숨기려는 걸까. 이번에는 손에 쥐어볼 생각 않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먼 훗 날 이 세상에 더는 내가 남아 있지 않을 아침을 상상하면서.
'귤의 시', 에서(p. 17)
이 세상에 내가 남아 있지 않을 아침, 내가 숨겨둔 귤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있는 세상에서는 나를 감출 수 있고,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고, 고급진 포장지로 감쌀 수 있겠지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숨겨 둔 귤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인데. 그때 밀려올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잘 살아야겠다.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안희연 시인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를 읽었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고 쓰고 그걸 믿으면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p.45)
두 줄을 읽고 마음을 빼앗겼다. 이렇게 쉽게도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안희연이라는 시인. 그녀의 시는 블로그가 아니라 책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쓴 산문집도 몇 권 같이 샀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매미가 극성으로 울어댈 때, 고작 한 달을 살려고 7년을 땅속의 어둠을 견디는 매미의 마음으로 읽어야지. 그때는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이라는 책. 여행지에서 키워가는 마음의 키, 인간성의 몸무게를 담은 책. 한여름에 피어나는 적란운과 함께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좋다.
그건 그렇고, 다시 안희연 시인의 마법에 빠져보자.
잎 하나가 지면 잎 하나가 반드시 나는데 새 줄기는 이전 줄기 안에서 줄기를 가르며 올라온다는 것. 그걸 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안에 있어.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어.
내게 없는 것을 밖에서 억지로 구할 때마다 칼라디움은 말했다. 애쓰지 마. 결국엔 흘러가게 되어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파리하게 말라가고 무늬가 지워져 가는 잎. 세상 모든 일이 그래. 하지만 머잖아 돌아올 잎이 있어.
'신발에 맞는 발을 고르러 나간 언니는 어떻게 되었나'에서 (p. 81)
안희연은 말했다. 세상은 안에 있다고.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부딪히는 존재 안에 그득한 세상을 꺼내어 색칠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세상이 가지고 있는 바탕색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무섭도록 날카로운 칼을 들고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7월의 더위. 점령군처럼 쿵쾅쿵쾅 짓밟아대는 여름. 모든 것이 귀찮다. 두 팔을 벌려 봄부터 새 잎을 피워내는 여인초, 벌써 30년 가까이 삶의 애증을 나누고 있는 뱅갈 고무나무. 그냥 화초이고 말 못 하는 식물일 뿐.
그러나 안희연은 꽃보다 잎이라는 칼라디움에 담긴 세상을 열어 놓는다. 모든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 못하고 있는 거라고. 지금 좀 말라비틀어져도 머잖아 돌아올 잎이 있다고. 세상은 그런 거라고.
여인초. 뱅갈 고무나무 안에 담겨있는 세상은 어떤 모양일까. 나는 그들 세상을 어떻게 품어야 할까. 내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들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그것들과 나 사이의 공간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인터넷이 끊어지고 난 후 세상이 없어지는 게 아닐 테니 내 앞에서 끊어진 세상과의 사이에 무엇을 담아 두어야 할까. 세상은 인터넷에 담겨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거라면 무엇으로 그 세상을 키워가야 할까.
박웅현이 <여덟 단어>에서 첫 번째로 말한 '자존自尊'을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하는 것은 '자존自尊'이고, 그것은 삶의 기준점을 내 안에 두어야 세울 수 있다던.
그러면, 나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의 안에 세워둔 기준점과 그것이 키워내는 의미는 어떻게 받아야 하나?
그러니까 우리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면 되는 것을. 꺼내보지도 않고 총 맞은 것처럼 쓰러지지는 말자. 우리의 삶은 항상 내 안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들 모두 외부에서 밀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내 안에 가득한 마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이립而立'을 말하여 스스로 일어서라고 했고, '불혹不惑', '지천명 知天命', '이순耳順'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향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한 것일까. 모두가 내 안에 있는 마음으로 맞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안희연 시인이 칼라디움을 통해 내놓는 은근한 가르침이다. 내 안에 다 담겨 있다는. 그것이 세상으로 나가는 걸음이라는.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과수원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각자의 사과나무를 심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 아닌 다른 것으로 본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 마음이라거나 심언이라는 단어로 쉬이 대체할 수 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은 장소 말이다. 사람에 따라 평생 하나의 나무만 공들여 심을 수도 있고. 최대한 많은 나무가 자신만의 속도와 모양으로 자라나는 풍경을 기쁘게 바라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때때로 아니 사실은 자주 그러하듯 햇빛과 물이 늘 충분한 것은 아니다. 바라고 믿는 것과 무관하게 나무는 시들고 열매는 상한다. 그럼에도 그 나무를 어떻게든 길러보려고 편향과 열정을 다하는 것. 누가 내게 삶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예술 혹은 문학의 정의를 물어도 아마 같은 대답을 하지 않을까.
'사랑의 단상'에서 (p.179)
삶을 나무를 기르는 것으로 정의하는 안희연 시인. 햇빛이 충분하지 않고 물이 부족한 현실. 잎이 시들고, 마침내 열매가 상하는 아픔. 충분히 무너질 법할 때, 편향과 열정을 다하는 것. 시인은 이것이 삶이고, 문학이며, 예술이라고 말한다. 몸에 착 감겨온다. 낭창낭창한 회초리같이.
책의 제목.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치기稚氣어린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신과 밤, 밤과 당신이 눈앞에서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두 개의 공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사이에 하나를 더 놓아볼 때도 있습니다. 당신과 밤과 귤, 당신과 밤과 유가 사탕, 당신과 밤과 부엉이, 당신과 밤과 엽서, 당신과 밤과 시...... 당신과 밤 둘 뿐일 때는 쇠공을 손에 쥔 것처럼 무거울 때가 많았는데 그 사이에 하나를 더 놓으니 다른 리듬이 생겨납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마음 건져내 말릴 수 있고 마음 안에 작은 창과 난로를 들일 수도 있습니다.
'에필로그'에서 (p.200)
책을 덮으면서 개운하지 않은 머릿속에 아금박차게 드러 앉아 있는 '당신'과 '밤'을 본다. 무얼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당신'은 그리움의 대상이기는 하더라도,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깊이 가라앉아 있는 어떤 기억일 거라는 것 말고는 형용할 수 없었다. 이쯤 해서 책은 독자의 소유일 뿐이라고 외쳐본다. 내가 마음대로 찢고 발기어버리는, 나만의 시선이 머무는 곳.
'당신'은 아무래도 우리 앞에 마주 서 있는 '시들고, 열매는 상한' 나무일 것 같다. 그러니 결국에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 쉽게 들여다 보이지 않는 어렵고 힘든 삶. 그게 '당신'이라면, '밤'은? 식어버린 커피 잔 앞에서 자꾸만 무너지는, 무어라고 정의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골칫덩어리. '밤'. '두 눈이 우물처럼 깊어지'게 해주는 게 '밤'이라면 그건 잠재되어 있는 자아일까.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결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움들일까. 시인이 속시원이 정의해 주지 않아서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당신'과 '밤'. 시인이 두 손에 들고 저글링을 하고 있는 그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 것들.
그럼에도 당신은 자주 눈앞에 없는 사람,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모습으로 제게 왔습니다. 살면서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기억의 터널이 있다면, 제겐 이 이야기들이 터널 안 풍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일에 관해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번번이 당신이라는 공이 발치로 굴러와 속삭였습니다. 나를 줍지 않으면, 이대로 두면, 나는 언제까지나 발에 차이며 굴러다니는 공으로만 남아 있을 거야.
'에필로그'에서 (p.200)
'먹고 사고 사랑하는 일에 관해 가볍게' 쓰려고 했다는 안희연 시인. 그런 시인의 발치에 굴러와 속삭이는 '당신'이라는 공.
나를 줍지 않으면, 이대로 두면, 나는 언제까지나 발에 차이며 굴러다니는 공으로만 남아 있을 거야.
안희연은 그 공을 주워 '당신'으로 형용해 놓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워야 할 공, 우리의 발에 차이며 굴러다니는 공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워야 하는 우리 몫의 삶이다. 우리와 같은 공간을 나누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 여인초와 뱅갈 고무나무, 덜그럭거리는 낡은 선풍기 사이에 우리가 끼워 넣어야 할 그 무엇. 그래서 나와 그것들이 각자 품어 기르고 있는 세상을 하나로 이어볼 수 있게 해 줄 그 무엇.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말하는 당신일 게다.
우리가 흔하게 마주하는 소소한 것들은 모두 다 '당신'과 '밤' 사이에 끼워 넣고 들여다보면 내 앞을 막아서는 어둠을 뚫어내는 플래시의 불빛을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상이 보인다고 말하고 있는 안희연 시인. 한 번쯤은 찔려보고 싶은 낭중지추囊中之錐. 그 날카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