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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을 때, 들여다보자.

김훈, <자전거 여행>

by 힘날세상
눈 덮인 겨울 도마령을 홀로 넘어가는 '자전거를 탄 김훈'



그는 그의 자전거 '풍륜風輪'을 타고 겨울 도마령을 넘었고, 나는 '풍륜風輪'이 일으키는 바람소리를 따라 눈 덮인 도마령을 넘는다. 그는 가라앉을 만큼 힘들었고, 나는 힘들어하는 그와, 그의 '풍륜風輪'이 남긴 바퀴자국에서 가슴이 떨렸다. 말하자면 긴 여운이었다. 의식의 심층부에서부터 솟아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칼의 노래> 첫 문장을 읽고 김훈을 보았다. 소설을 쓰는 김훈은 언어의 마술사였다. 그는 이순신을, 이순신이 사는 세상을 멋대로 흔들었다. 흔들 때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의 소설은 말하자면 칼이었다. 늙은 가슴 하나쯤은 단박에 베어버리는.


그 칼에 가슴을 베이고 겨울 도마령을 넘는 '풍륜風輪'을 보았다. <자전거 여행>은 세찬 흡입력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빨려 들어가는 때마다 그의 펜은 힘이 실렸다.


풍륜이 길바닥에 짙은 바퀴자국을 남기는 곳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평생의 삶의 질곡이 그대로 담긴 얼굴을 겨우 들고 해바라기를 하던 할머니 앞에서 그의 자전거 풍륜은 멎었고, 바닷가 개펄에서 조개를 캐던 아낙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마다 거기에는 원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세상으로 향하는 그는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 길은 그대로 그가 향하는 세상이었으며, 그래서 그가 달려 나가는 길은 언제나 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들고 다니는 25,000 분의 1 지도 위에서 살고 있는 온갖 길들, 사람의 세상에서 사람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우마차길, 신작로, 임도, 등산로, 포장도로. 그는 그 많은 길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또 몸 밖으로 흘려보냈다. 흘러들어왔다가 흘러나가는 길 위에서 그의 자전거 '풍륜風輪'은 넘어지지 않았고, 김훈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만났다. 길 위에서, 스스로 멈추어 서는 그의 자전거 '풍륜風輪'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올르 때, 길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올 뿐만 아니라 기어의 톱니까지도 몸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내 몸이 나의 기어인 것이다. 오르막에서, 땀에 젖은 등판과 터질 듯한 심장과 허파는 바퀴와 길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땅에 들러붙어서, 그것들은 함께 가거나 함께 쓰러진다.

-김훈, 자전거 여행 '프롤로그' (p.18)에서



김훈과 그의 자전거 '풍륜風輪'은 어떻게 맞닿을까. '풍륜風輪'. 얼어붙은 겨울을 달려와 막혀버렸던 온몸의 숨구멍을 꽃잎으로 열어준다. 그렇게 보면 <자전거 여행>은 김훈이 쓴 게 아니라 '풍륜風輪'의 낡은 바퀴의 작품이다. 그러나 '풍륜風輪'의 바퀴를 굴려 동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김훈의 들여다보기, 관찰력이다. 김훈은 꽃이고 '풍륜風輪'은 꽃의 그림자이다. 그렇더라도 꽃의 그림자로 피어나지만 '그림자 속에 빛이 오글오글 들끓'고 있는 것을 보면 <자전거 여행>은 '풍륜風輪'의 작품이라고 하면 김훈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김훈은 자전거를 멈추어 세상을 만난다. '풍륜風輪'이 길을 달려 몸속으로 길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는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세상을 받아들였다. 눈으로 세상을 받아들였고, 마음을 열어 들여다본 세상은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났다. 그렇게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이어졌다.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고, 제각기 피어나 절정의 시간에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리는 동백,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산화散華하는 풍장風葬의 꽃 매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고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나지만 그림자 속에서 빛이 오글오글 들끓고 있는 산수유,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데, 말기암 환자처럼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지는 목련.


무엇일까.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어떤 꽃이어야 하는가. 김훈이 처음부터 꽃 타령을 부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전거 여행>은 단순한 여행의 이야기가 아니다. 홑겹의 단상斷想일 수가 없다. 꽃을 들여다보는 김훈을 우리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기에. 그 속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공명을 보아야 하기에.


놀랍게도 <자전거 여행>은 '꽃피는 해안선'에서 시작한다.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 그게 사람이 사는 모습이라고 하면 억지일까. 그가 '풍륜風輪'과 만나는 세상, 사람은 모두 이 범주에 있을 거라고 멋대로 매듭을 지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을 바라보는 김훈이었다. 그 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이었다. 김훈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관찰의 방식을 관찰하는 자세로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꽃이야기를 하던 김훈은 느닷없이 설요薛瑤라는 젊은 여자를 데려온다. 아름다운 몸과 한 줄의 시로 남아 있는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薛瑤. 꽃피는 봄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 속세로 내려와 버린. 반속요返俗謠 한 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젊은 여승 설요薛瑤.


구름의 마음이여 맑고 곧음을 생각하노니 雲心兮思淑貞

죽은 듯 고요함이여 아무도 보이지 않네 寂寞兮不見人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는데 瑤草芳兮春思芬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蔣奈何兮是靑春

- 설요薛瑤, 반속요(返俗謠)



무엇일까. 김훈이 설요薛瑤를 소환하고 있는 것은.


꽃은 한 여인의 운명을 여반장如反掌처럼 바꾸어 놓는다. 꽃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저마다의 운명으로 피어나듯이 김훈이 만나게 되는, 그 제각기의 모습을 지닌 세상은 그가 붓을 세워 그려 놓은 꽃이고, 그 꽃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걸까. 설요가 꽃 피는 봄날을 이기지 못한 것만큼이나 김훈이 만난 세상은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 댈 것이고, 우리는 그만큼 흔들려야 책을 읽는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걸까. 제멋대로 하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은 책갈피를 넘나들고 있고, 더위에 짓눌리고 있는 나는 온몸이 무겁다.


자전거 여행은 2000 년 마라톤에 빠져 있을 때 운명적으로 만났고, 울적할 때마다 습관처럼 읽었다. '풍륜風輪'이 멈추는 곳에서 만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김훈의 시선과 그것을 글로 바꾸어 놓는 그의 붓끝을 보는 즐거움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은근히 솟아나는 그의 시선과 붓끝을 부여잡고서.



김훈의 붓끝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묵직하게 들여다보는 데서 나온다. '들여다본다'는 말의 깊이는 '본다'라는 단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본다'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들여다본다'는 보이게 하는 것이다. 김훈은 늘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를 발견해 낸다. <자전거 여행>에서는 자전거를 멈출 때마다 들여다보고, 들여다봐서 발견한 세상을, 사람들을 말한다. 기자 출신답게 김훈의 문장에는 수식하는 말이 거의 없다. 즉, 부사나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는 사실적인 글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감동을 담고 있다. 바로 들여다보기, 즉 관찰의 힘인 것이다.


추송웅이라는 배우가 있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연극 무대에서 열연했지만, 10년 동안 그가 벌어 들인 돈은 겨우 10만 원이었다. 그는 죽어야 했다. 그래서 죽기로 했다. 그때 독일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하나를 건넸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인간이 된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과정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추송웅은 이 작품을 제대로 공연하고 무명배우의 설움과 거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부채들을 내버리고 죽기로 했다. 그는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 앞에 석 달 열흘을 앉아 있었다. 훗날 추송웅은 몇 년 동안 전국 순회공연을 했을 때보다 동물원에서 원숭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때가 가장 열심이었다고 했다. 그는 원숭이가 되기 위해 원숭이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막이 올랐을 때 철창에 매달려 있던 추송웅은 완벽한 원숭이가 되어 있었다.

그 원숭이는 추송웅을 살려냈다. 아니, 석 달 열흘을 들여다본 원숭이는 레드 카핏과 돈방석 위에 추송웅을 올려놓았다.


앞에서 말한 꽃을 들여다보는 김훈을 불러보자.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P.21)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 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風葬이다. (P.21)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P.23)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털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특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P.23)


이것이 김훈의 글쓰기다.

김훈의 글쓰기는 들여다보기, 관찰이다. 추송웅의 절박함 이상으로 김훈의 들여다보기는 날카롭다. 김훈의 들여다보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꽃을 바라보는 김훈은 거의 복지부동이었을 게다. 멈추고 멈추어 들여다보는 것. 그렇게 김훈은 꽃 앞에 멈추어 섰을 것이다.

들여다보고 난 후 김훈은 자신과 들여다본 대상 사이에 연결고리를 매달아 놓는다. 풍륜을 타고 달려간 김훈은 남해의 언덕에서 꽃을 만난다. 들여다보고, 받아들인다. 그의 펜 끝에서 꽃은 살아난다. 그때 우리는 꽃을 보아야겠지만, 김훈이 그려놓은 꽃과 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연결고리를 보아야 한다. 거기에 김훈의 이야기는 담긴다. 사람 사는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전거 여행>을 읽고 나서 김훈의 흉내를 내봤다. 김훈처럼 꽃을 들여다봤다. 꽃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골목이 보였고, 골목에 뒹구는 돌멩이가 보였고, 돌멩이에 붙어 있는 작은 모래가 보였다. 모래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무엇을 읽어낼 수 있다면, 모래에 얽힌 시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의 돌멩이나 작은 모래에 달라붙어 있는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을 가득 채울 만큼의 사람들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꽃밭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송웅이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서 '빠알간 피터'라는 원숭이를 창조해 냈던 것처럼,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노트북을 열 때마다 나는 청맹과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았던 세상이 지워졌고, 골목을 가득 채울 것 같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사라졌다. 허무하게도.


김훈의 자전거 '풍륜風輪'은 그렇게 눈 덮인 도마령을 넘어가고 있었고, 김훈은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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