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詩視한 세상 2 ㅡ 오규원, 하늘엔 흰 구름 떠돌고
장마가 참 허망하게 끝났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이 놈의 장마는 언제 물러날까. 꿉꿉해 죽겠고만' 이렇게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다. 그리고는 비가 그치자마자 '실질적으로 장마는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 자기들 편할 대로.
빗줄기가 요란했던 시간을 거두어 가는 끄트머리를 따라 파란 하늘이 허리를 굽히고 내려왔다. 뭉실뭉실하게 피어난 구름과 함께. 그리고 더웠다.
속옷 차림으로 대자리에 드러누워 있다. 제 몸을 휘돌려 토해내는 39,000 원 짜리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혼자서는 쾌적하다. 오직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누워 있었다. 남들이 어떻든지 나만 생각하는 세상 참 편하고 좋다.
그러다가 오규원의 시를 읽었다.
하늘엔 흰 구름 떠돌고
오규원
공중전화 부스 옆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칸칸의 부스 안에는 제각기 간절하고 급한 어른들이 전화선에 매달려 혹은 손짓하고 혹은 발짓하고 아이스콘을 빨다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목줄기로는 눈물보다 차가운 얼음물이 벌겋게 흘러내리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의 시선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툭툭 치며 간다 그럴 때마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쭐쭐 나온다
저 아이는 아마도 한국에서 태어나 혼자일 때 하느님과 통화하는 방법을 모르리라 저기 바라보이는 성당에는 하느님과 직통 전화가 가설되어 있으리라 그러나 공짜로는 안 되리라 한 사내가 아이 곁에 앉아 무어라고 달래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한사코 운다
울긋불긋 유명 메이커 상표의 타이탄 한 대가 서더니 아이를 밀치고 음료수 상자를 척척 쌓는다 상자가 하늘을 오르기 시작하더니 아이는 금방 간 곳 없고 하늘엔 흰 구름 두둥실 떠돌고 상자 가득 얼굴이 누우런 오렌지 주스병들은 출동 직전 서울의 전경처럼
공중전화 부스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 누구나 '아이가 왜 울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겠는데도 오규원은 바로 눈을 돌린다.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 급하고 간절한지 전화선에 매달려 허둥거리고 있는 어른들이다. 그들은 아이의 목줄기로 흐르는 눈물, 벌겋게 흘러내리는 얼음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의 목줄기를 흘러내리는 얼음물은 차갑다. 안쓰러울 만큼 차갑다.
아이는 가슴이 아프다. 무언가 답답하고 무서움에 짓눌린다. 아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매달아 본다. 아니 매달아 보고 싶다. '전화를 하고 있는 어른들은 전화하기 바쁘니까',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야' 아이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손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간절히. 애타게. 그렇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아이가 내놓는 손길을 그저 툭툭 차버린다. 그래서 아이의 눈물을 쫄쫄 흘린다. 얼음물보다 차가운 눈물을. 그 쓰라린 눈물을.
아이는 어른들이 사는 세상, 지나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어쩌면 저 아이는 그냥 아이가 아니다. 늙은, 호통치며 휘어잡았던 것들을 다 놓쳐버린, 숨을 제힘으로 쉬지 못하는, 퀴퀴한 어둠으로 가득한 골방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오줌이나 질질 싸버리는,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 아버지의 호통에 짓눌려 살았고, 진 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애지중지 길러 놓았던 그 잘난 자식들의 따돌림을 받으며 거동도불편한 몸을 이끌어 남편의 오줌을 받아내는 우리의 어머니다. 우리가 흔히 불효를 저지르는 그 어머니.
자식들을 낳아 길러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제야 보인다. 한 번도 안아드리지 못한 아버지. 업어드리지 못한 어머니가 가슴에 한이 되어 보인다. 시를 읽다가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아버지를, 어머니를 만난다면.....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혹여 만난다고 해도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여기저기 좋은 곳으로 놀러 다니느라 아버지를 외면했으면서 전화하느라 바쁜 척하는 어른들을 비웃었고, 어머니가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면서 좋은 요리 찾아 먹고 다녔으면서 아이의 시선을 툭툭 차버리는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을 수 있는가. 날카로운 비수가 가슴을 후비는 것보다 더 무섭고 아프다.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자식들의 흉은 감추고 훗날 넉넉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던 어머니, 꾸깃꾸깃 감추어 둔 돈을 어렵사리 꺼내어 헌금함에 넣고 놀러 다니며 좋은 것 먹고 다니는 자식들 발걸음에 평안이 내리기를 빌었던 아버지는 목줄기에 차디찬 얼음물을, 더 차가운 눈물을 흘리고 앉아 있다.
아이의 간절함이 아닌 울긋불긋 화려한 음료수 상자가 하늘에 닿는 오늘,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누구 하나 손을 잡아주지 않은 아이의 차가운 눈물은 그대로 벌겋게 흘러내리고 있지 않을까. 어디선가 숨어서 자기를 차단해 버린 어른들, 사람들을 향해 서러움으로 늘키고 있지 않을까. 꼭 그만큼, 아이가 어디선가 늘키고 있는 그만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출동 대기를 하고 있는 전경들처럼 매섭고 매몰차다. 막혀서 마음이 답답하고 단절되어서 관계가 무너져버렸다.
오규원은 섬세하고 깊은 관찰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가 단절되고 참 무참하게 무너져 있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시를 쓰는 방식이다.
개봉동과 장미
오규원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국문과 다니면서 겉멋이 잔뜩 들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게 오규원 시인이었고 그때 읽었던 <개봉동과 장미>라는 시다. 시골뜨기라 잘은 몰랐지만 얻어들을 바에 의하면 개봉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는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장미는 개봉동 사람들은 손에 닿을 수 없는 명품백이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고급 요리일 뿐이다. 그래서 개봉동 집들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개봉동 사람들 마음에서 장미는 피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무섭게 단절되어 가고 있다. 허울 좋게 개성이나 독특한 삶의 방식이라고 치장하고 있지만 세상은 계층화하고 있고, 토막토막 부러지고 있다. 느닷없이 밀려오는 폭우나 더위 같은 이상 기후만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막히고, 끊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문제다. 어울렁더울렁 어깨를 겯고 목줄기에 차가운 얼음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도 잡아 일으키고, 골목을 구부러지게 만들기도 하는 불편한 의문 투성이인 장미도 문을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세상을 살아야 한다. 오규원의 시를 읽었다면, 읽지 않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