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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

안희연의 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by 힘날세상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갖 수사를 다해 사람들은 여름을 말한다. 폭염, 불볕더위, 가마솥을 끌어들이고, 어떤 이는 용광로를 가져온다. 말하자면 여름을 혹독하게 무서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여름은 포악한 군주이고, 잔혹한 악마이다. 비는 이미 실종되었고, 바람 또한 뜨거운 입김만 쏟아내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여름에게 난타당하고 있다.



폭염 경보에 짓눌려 거실에 깔아놓은 대자리에 엎드려 안희연 시인의 책을 읽었다. 깊이가 있는 에세이를 읽었고, 여행지의 맛을 담은 산문집을 읽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따금씩 수목원에서 차갑게 몸을 식힌 바람이 창을 넘어왔다. 그럴 때마다 일부러 수목원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에도 짙은 그늘 속에서 궁굴려가며 익혀 놓은 바람을 담고 있는 숲. 그 두꺼운 녹음의 시간들. 그렇게 안희연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읽었다. 수목원을 바라보는 것처럼.


안희연의 책을 몇 권 샀다.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안희연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를 읽고 그대로 시 속으로 함몰되었다. 안희연. 예리한 관찰의 눈을 가진 시인. 날카롭게 사물이나 상활은 헤집는, 그리고는 보석 같은 것들을 꺼내어 놓는 마법사 안희연. 그녀는 정녕 마법사였다. 그 마법에 걸려 알라딘에서 몇 권의 책을 샀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짙어지면>,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그리고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에 빠져버렸다. 마치 사해死海에 누워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읽고 또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솟아나는 언덕의 이야기를.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 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청량하지는 않다. 너무나 뜨겁고, 너무나 냉정하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따스하거나, 그냥 잔잔하지만은 않다. 어느 정도의 흔들림이나 외치는 소리를 담고 있다. 내게 시는 그렇게 다가왔다. 시인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들릴 듯 말 듯, 또는 산이 흔들릴 듯 크게. 그러나 흔들림은 심했고, 외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책을 펼쳤으니 읽어야 했다. 시집이라는 게 책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시들이 어떤 모양이든 서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시집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은 오로지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한 편만 읽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시인이 응축해 놓은 고갱이를 살펴보려는 심사心思이다. 왜 '여름'이었고, 왜 '언덕'이며, 시인이 '배운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시를 읽은 나에게 시인은 무엇을 주려는 걸까 하는 것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나를 잃어버리겠다고? 그것도 온전히? 메가톤급의 폭발력을 보이는 첫 행이다. 앓어버리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일반적이라면 무엇인가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졌다는 말이다. 한 오라기도 몸에 두르고 싶지 않은 기억. 쓰라리고, 내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몸서리쳐지는 아픔. 시인은 세상에서 팽개쳐진 것일 게다.


시인은 언덕을 오르고 있다. 자신을 잃어버리기 위해. 자신을 잃어버려야 할 만큼 지금의 시간을 밀어내고 싶었기에. 무엇인가 얻어낼 수 있는 언덕이길 바랐기에 시인은 언덕을 오르고 있다.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으로.



누구에게나 언덕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햇볕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짙은 그늘, 저 멀리 평화가 넘실거리는 조망.



그러나 시인이 오른 언덕은 사방이 물웅덩이였고,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 있었다. 거기에다 애써 올라간 그녀의 언덕은 울상이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토끼마저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고요 뒤에는 폭풍우가 오고,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기에 언덕은 울상이다. 위로받기는커녕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언덕은 결코 시원한 바람이나, 짙은 그늘 따위는 내놓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동정하다가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었기에 밤이 오는 급한 내리막을 내려왔다.


시인은 언덕이 잃어버린 토끼를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그리고 왜 하필 많은 언덕 중에 이곳을 올라왔을까 후회한다. 이쯤에서 시인은 울었을 것 같다. 어쩌면 울다가 웃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린 시인은,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싶었던 시인은, 비빌 언덕이라고 가슴에 쓰고 그것을 믿으며 올라왔던 시인은 언덕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토끼 한 마리를 잃어버린 언덕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나 많은 물웅덩이,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픈 시인. 그 시인이 자신을 얹으려 했는데 울상을 짓고 있는 언덕. 그것은 두 개의 시간이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오르는 마음으로


안희연, '역광의 세계'에서 (p. 50)



시인의 시간과 언덕의 시간. 버려진 행성의 시간과 시인의 시간.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언덕을 오르는 마음으로 버려진 행성으로 가는 시인. 나를 잃어버리려고 언덕을 오르는 시인. 어디서든 시인은 두 개의 시간을 갖는다.



시인의 시간과 언덕의 시간은 어떻게 연결이 될까.


나를 가르치는 것은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 김남조, '겨울바다'에서



언덕의 시간은 시인을 가르친다. 김남조 시인을 가르치는 것은 겨울 바다이고, 안희연 시인이 깨닫게 하는 것은 '언덕'이다. 김남조의 겨울 바다는 매운 해풍에 모든 것이 다 얼어 죽었고, 안희연의 언덕은 수많은 웅덩이와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 있다. 게다가 토끼까지 한 마리 잃어버린 언덕은 울상을 짓고 있다. 모두 유치환 시인이 '생명의 서'에서 말하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이다. 말하자면 극한 상황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절망감의 시간이다. 그 시간이 회초리를 들고 가르치는 것.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것',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것.


여름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 우리의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다른 풍경이 된다. 그만큼 언덕은 우리의 시간 반절을 나누어 짊어진다. 그게 언덕이다. 우리가 땀 흘리며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유치환이 말하는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는 아라비아 사막이다.



폭우가 물러가고 쏟아진 염제炎帝 횡포 속에서 대자리 깔고 누워서 읽고, 엎드려서 읽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는 시. 사실 시는 어렵기도 하다.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읽으면 된다. 내가 시적 화자가 되어 화자가 부딪히고 있는 상황과 느낌,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며 읽고 또 읽어보는 거다. 은근하게 솟아나는 맛이 느껴질 때까지. 읽을 때마다 그 맛이 다르다면 좋지 않을까.



폭염의 한가운데에서 안희연 시인을 만난다. 여름 언덕을 오르고 있는 그분을. 그리고는 지금 나도 하나의 언덕을 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또 나의 구겨진 시간이 반으로 접힐 수도 있겠다는 위안을 받은 것 같다. 그러면 그녀가 말하는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어렴풋하게라도 보았던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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