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詩視한 세상 1 ㅡ 김광섭, 산
무더위를 따라 하루를 보낸다. 아침부터 엉겨 붙는 끈적끈적함. 이게 다 습도 때문이라고, 어떻게든 습도만 걷어내면 견딜만할 거라고 마음을 얼러본다. 대자리를 깔고 드러누워서 견뎌보려고 하지만 살갗을 축축하게 적셔오는 염병할 놈의 습기.
밤새도록 열어놓은 창은 바람 하나 불러들이지 않는다. 바람마저 눅진눅진하게 젖어 버린 탓이다.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저 멀리 적란운이 뭉실뭉실하게 피어오른다. 솜처럼 솟아오르는 구름 아래 갈맷빛의 산자락이 늘어선다. 도시를 한꺼번에 끌어안으려는 듯한.
새벽부터, 아니 내가 이 도시에 이사오기 훨씬 전부터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 노적봉. 그 낮고 낮은 봉우리는 늘 수더분한 이웃 아저씨다. 막걸리 한 사발에 흥겹고, 소주 한 잔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황혼을 등에 업고 '두만강 푸른 물에' 같은 빛바랜 유행가 자락을 흘려보지만, 그나마도 매듭을 짓지 못하는, 그 입냄새 나는, 늘 다리 힘이 풀려 있는 아저씨. 그러나 노총각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던 아들이 장가들던 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양복으로 쫙 빼입었던, 유행가는 끝까지 못 불렀어도 하객들 앞에서 또렷하게 주례사를 쏟아냈던, 입냄새 따위는 한 오라기도 흘리지 않았던 이웃 아저씨 같은 노적봉. 겨우 164m의 키를 가진 노적봉.
장맛비에 속俗한 기운을 다 씻어낸 듯 제법 파릇파릇하고, 그래서 무언가 신선한 이야기들을 마구마구 퍼낼 듯한 노적봉은 오늘 참 아름답다. 거의 매일 노적봉이 내놓는 산길을 걸었다. 계류를 이룰 만큼 물을 머금지도 못해 물이 흐르는 골짜기 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지만, 나무들은 토닥토닥 잘 길러내어 그늘 짙은 숲길을 이리저리 흘려 놓은 노적봉에 앉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있는 바람, 없는 바람 다 끌어오는데 형편없는 바람이면 어떠랴. 손부채질 더해가며 시원하다고 너스레를 떨면 되는 것을. 흘러내리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다가 김광림의 시 <산>을 생각한다.
산
김광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 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날카로운 햇볕을 그늘을 펼쳐 막아내는 노적봉이나, 사람들 주변에 나지막하게 엎드려 자기를 봐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듣든 말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산을 제대로 바라본 김광섭 시인이나 무더운 여름과 맞서게 해 주는 멋진 응원군이 아닐 수 없다.
김광섭의 산은 단순한 자연경관의 대상이 아니다. 천애의 낭떠러지나 거대한 폭포를 가진 높고 커서 쉽게 오를 수 없는 산이 아니다. 새벽부터 마을 가까이 내려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 해질녘이면 조용히 되돌아가는 둥글둥글한, 그래서 참 정다운 산이다.
꽃잎 하나 다칠세라 함부로 몸을 흔들지도 않고, 굴 속에 사는 짐승들을 위해 돌 하나 들썽거리지 않는다. 아우르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 상할까 봐 종일토록 간섭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게 김광섭이 우리 앞에 내놓는 산이다. 그래서 김광섭의 산은 하나의 인격체를 뛰어넘어 인간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걸음이다.
김광섭의 산은 늘 우리 곁에 내려와 있다. 어느 곳이 산자락이고 어디서부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갑자기 솟구치는 산을 향해서는 한 순간의 찬사를 보내기는 하지만 마을 골목에서부터 부드럽게 길을 이어가고 있는 산에서 우리는 가족 같은 정겨움을 느낀다. 사람보다 앞서가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가는 게 김광섭이 말하는 산이다. 이웃 아저씨 같은.
그래서 산은 자기 품에 사람을 묻고, 꼭대기에 신을 모신다. 영원토록 품고 살아온 사람들의 영혼을 품어 산꼭대기의 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산. 그 산은 절대 높은 산이 아니다. 늘 우리가 기대고 살면서도 무심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어머니다. 늘 희생하다가 가엾은 모습으로 자식 앞에 눕고 마는 어머니.
낮은 산에서 늘 길을 잃는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걸어보라. 산이 높고 험하지만 길은 하나로 이어진다. 그래서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행여 헷갈릴까 봐 갈림길마다 걸음을 이끌어주는 이정표가 있다. 그러나 낮은 산은 거미줄 같은 갈림길이 많아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이정표도 없다. 높은 산은 요리사이고, 낮은 산은 어머니다. 요리사는 정확한 계량으로 설명하지만, 어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스며든 몸놀림으로 음식을 만든다. 간장 한 큰 술이 아니라 간장 조금이다. 어머니의 음식은 대충대충 넣은 재료와 양념들이 어우러져 맛을 낸다.
낮은 산에서는 길을 잃어도 그만이다. 잘못 내려간 곳도 산자락이 두르고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고, 낮은 산이라서 많이 어긋나지도 않는다. 그저 동네 사람들이 엮어놓은 삶의 이야기를 따라 몇 걸음 더 걸으면 제자리도 돌아갈 수 있다.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가는 산. 사람과 함께 하는 동반자다.
동반자이기에 우리는 산을 배려해야 한다. 산에 오르다 보면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산은 절대로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또 정복할 수도 없는 무서움을 지니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지만, 세상이 어수선하면 냉정하게 뿌리치는 게 산이다. 자기들의 세상인 양 마구 헤집고 파헤친 결과는 모두 우리들에게 큰 화로 다가온다. 산과 어우러져 살지 않고, 산을 지배하려고 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재앙이다.
산은 언제나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큰 가르침을 준다. 산이 나무를 기르는 방법에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품어 안는 것이 산이다. 그 품에 모든 나무를 품어 안고 바람을 부르고, 햇볕을 나누어 숲을 이루게 한다. 몸을 일으켜 산등성이를 만들고, 내려와 깊은 골짜기를 만든다. 그렇게 산등성이에서 살아야 하는 나무도 기르고, 물을 좋아하는 나무도 다독여가며 키워낸다.
시댁과 친정을 섬기며 살아야 하고, 본가와 처가를 받들고 살아야 한다. 배우자와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명절 증후군을 앓아야 하고,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 안에 늘 다툼이 있고, 울퉁불퉁한 삶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산은 참 현명하게도 한 기슭에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관용이고 배려다. 먼저 오는 봄은 봄의 기운으로, 좀 더 위쪽에 자리 잡는 여름은 여름대로 받아들이는 게 산이다. 팔을 벌려 하나로 품기도 하고, 여기저기 나눠주는 마음이다. 그것이 산이다.
산은 사람을 닮아 있다. 어쩌면 사람은 산을 따라서 산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만큼 산과 어우러져 살아간다. 산은 사람들에게 삶의 발판을 내어주고, 사람들은 산에 안겨서 살아간다. 말하자면 산은 그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울고, 웃고, 기쁘다가도 슬프고, 외롭고, 때론 살맛 나는 그런 우리들의 세상. 김광섭 시인의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