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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가을로 향하는

미토未土같은 세상을 달래주기를

by 힘날세상
거실 창을 두드리고 있는 빗줄기 앞에서 참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다.




새벽녘, 잠에서 깨었을 때 굵은 비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창가에서 비는 제 몸을 던지고 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잠을 다 씻어내지 못한 나도 덩달아 창에 기대었다. 유리창의 감촉이 차갑게 스며들었다. 아직은 새벽이 분명하다. 빗방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창에 무수한 수직선을 그어댔다. 비의 수직선. 이렇게 말하고 가볍게 웃었다.


가을이 다가온 것인지, 아직 여름의 시간인지 졸가리를 잡을 수가 없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홍차 같은. 흔히 환절기라고 말하는 지금을 명리학에서는 미토未土라고 한다.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을 준비하는 미토未土. 미토未土는 흙을 말한다. 그것도 메마르고 갈라져 푸석푸석 먼지가 이는. 그야말로 척박한 땅이다.


그 척박한 땅에 거센 비가 내리고 있다. 마음까지 싹 씻어갈 듯한 비가 새벽과 더불어 내리고 있다. 힘차게.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빗줄기를 바라보며. 메마르고 갈라졌던 땅에 물줄기가 흘러 부드럽고 촉촉함으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가을을 맞았으면 좋겠다. 여름의 폭염을 지나며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우리들의 마음도 카스텔라처럼 말랑말랑해졌으면.


짙은 숲으로 들어갔지만 더위를 피할 수 없었다. 더위는 모든 의욕을 꺾어버렸고, 걸음걸음마다 족쇄를 채워 놓았다. 책장을 넘길 수 없었고, 자판을 두드릴 마음까지 다 빼앗겨 버렸다. 그냥, 마그마 같은 햇볕에 짓눌려 살았다. 생활의 루틴은 깨졌으며, 그만큼 사람들은 비틀거렸다. 여름은 참으로 포악했다.


비를 쏟았다. 그 지옥불처럼 뜨거운 햇볕을 걷고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극한 호우'(폭우보다 더한 비가 내리다 보니 이런 말이 생겨났다.)를 쏟아부었다. 어떤 것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비를 퍼부어 마을을 물로 덮어버리고, 끝내 산을 무너뜨려 흙으로 세상을 덮었다. 여름의 포악질은 계속되었다.


태풍을 기다리다니. 그렇게 내리는 비속에서도 사람들은 태풍이 왔으면 했다. 나무가 좀 부러지고, 유리창이 여기저기 깨지더라도. 태풍이 여름의 포악을 뒤엎어주기를 기다렸다. 끓어오르는 남해의 바다를 뒤집어 물고기들부터 물고기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싹싹 씻어주었으면. 참 알 수 없는 이율배반이다.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고 바동바동 뒹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 떼가 물어 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 김정한, <사하촌>에서



여름을 건너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영락없는 지렁이였다.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 가지 바동바동 뒹굴고 있는. 모든 것에 짓눌려 있었다. 경제는 후퇴하였고, 장사는 안되었으며, 세상은 어수선했다. 사람들을 선동하였고, 세상을 둘로 갈라놓았다. 미국 대통령은 높은 관세를 부과하였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미국 대통령에게 우리나라를 구해달라고 했다. 세상은 무섭게 소용돌이쳤고, 그만큼 국민들은 발버둥질 치는 한 마리 지렁이가 되어 갔다.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했고, 국민들은 그 얇은 은박담요 하나를 뒤집어쓰고 '키세서'가 되어 길바닥에 앉았다. 살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눈을 맞으며 분노의 함성을 질렀고, 계엄군의 총을 멘 손으로 붙잡아 흔든 여자분도 있었다.



새벽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있다. 황폐하게 말라붙은 미토未土의 땅덩어리를 적시고 또 적시어 밟으면 발가락 사이로 간지러움이 느껴지는, 그렇게 부드러운 흙으로 바꾸어 놓기를. 이제는 더는 포악한 여름이 세상을 뒤덮지 않기를. 자신들의 잘못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고 있는 그 뻔뻔한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 주기를. 잠시 맡은 권력을 제 것인 양 휘둘러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양두구육羊頭狗肉 같은 정치인들을 두드려주기를. 모든 것이 붓두껍 하나 잘못 찍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또 찍어대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을 깨우쳐 주기를.


미토未土의 시간 위로 내리는 빗줄기에 기대어 서 있는 새벽 마음은 아름다운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가을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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