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느낌도 이제는 사라질 판
설다방은 좁은 골목에 있었다. 당시에 상당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전주안과 옆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설다방.
다방茶房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쉴 수 있도록 꾸며 놓고, 차(茶)나 음료 따위를 판매하는 곳.
8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 다방茶房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대부분 2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한복을 입은 '마담'과 짧은 치마를 입은 '레지'가 값싼 음악을 틀어 놓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가 불렀던 노래의 '짙은 색소폰 소리'가 바로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든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에서 약간의 희롱과 지폐가 넘나들었다. 주변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들은 아침 가게문을 열어놓고 몇몇이 모여 커피를 배달시켜 마셨다. 이른바 모닝커피이다. 전화를 받은 마담은 "김양아, 금은방에 커피 석 잔 가져다 드려라."라고 톤이 높은 목소리를 건넨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부스스한 레지는 보온병에 다섯 잔 정도의 커피를 담아 달려간다. 익숙하게 커피를 잔에 따라 대령하고 나면 "김양아, 너도 한 잔 마셔야지." 배가 나온 전파사 사장이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던 카메라 가게 사장은 약간의 음흉함이 섞여 있는 눈초리로 레지의 몸을 샅샅이 훑으며 추파를 던진다. "김양, 몸매가 갈수록 좋아진다. 요즘 연애하냐?" "어머머 양사장님, 왜 이러실까. 요즘 누가 불러주지도 않는데." 아침부터 오가는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애매한 대화 속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레지는 전파사 사장이 건네는 커피 넉 잔 값을 받는다. 웃음 지으며 짓궂은 남자들의 희롱을 받아준 대가로 그중 한 잔 값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다. 희미한 섹슈얼리티sexuality가 다방에는 늘 흐르고 있었다.
돈 없는 대학생들에게 사실 다방은 상당한 사치였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다방으로 몰려다녔다.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어렵게 꼬드긴 여학생과 어설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때로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조건 가져다주는 소위 '엽차- 대부분 보리를 끓인 물'만 마시고 나오기도 했는데, 가난한 대학생의 뒷모습을 어머니 같은 마담은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설다방은 점잖은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다.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전주에서 이름 좀 날리는 문인들이나 화가들이 둘러앉아 짙은 담배연기를 흩날리며 세월을 희롱하던 곳이었다. 장발을 휘날리던 젊은 이들은 언감생심 소위 설다방 골목으로는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설다방을 드나들게 된 건 엉뚱했다. 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시위가 한창이던 때, 관통로 객사 앞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젊은 대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선뜻 시위에 참석하지 못했던 어른들은 주머니를 털어 빵과 우유를 사다가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어느 날, 그날따라 경찰들의 진압은 평소와 달리 강경했다, 최루탄을 난사하여 객사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백골단을 피해 도망치던 대학생들 일부는 설다방 골목으로 달아났고 궁지에 몰리자 아무 가게나 들어가 몸을 숨겼다. 백골단은 가게마다 들쑤시고 다니며 학생들을 끌어냈다. 2층에 있는 설다방으로 학생들은 피신했고, 몰려온 백골단에게 어머니 같은 마담이 '설다방은 노인분들이 노는 곳인데 어디서 행패냐'며 한복자락을 휘둘러가며 큰소리치는 바람에 그대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어른들의 공간이었던 설다방에 젊은이들이 드나들었고, 설다방에선 입구 쪽에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를 몇 개 내주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심기를 고려하여 조신하게 행동하였고, 행여 흡연은 감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대개 음악다방으로 몰려다녔다. 그 시끄러웠던. 입구부터 쿵쾅거리고 있는 건 알바하는 DJ들이 볼륨을 잔뜩 올려놓은 신청곡들이었다. 그렇게 지하실을 가득 메운 음악 속에서도 젊은이들은 익숙하게 대화를 나눴고, 심지어는 잠을 자기도 했다. 작은 메모지에 신청곡을 적어 레지에게 주면 유리벽 안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있는 DJ가 가벼운 멘트와 함께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때 DJ들은 청바지 뒷주머니에 커다란 도끼빗을 꼽고 다녔다. 어떤 이는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게 멋있다고 찾아오는 여학생들도 많았다. 그런 여학생들을 보기 위해 남학생들도 음악다방으로 몰려들었다.
팔달로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가 문을 열었고, 젊은이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음악감상실이라고 하기에는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음악소리는 거의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큰 소리인 까닭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젊은이들은 무조건 그런 분위기가 좋았던 것이다.
거기에 비해 설다방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남인수의 무너진 사랑탑 같은 흘러간 노래를, 그것도 들릴락말락 하게 틀어 놓았다. 당시 세상을 흔들었던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는 설다방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돌체에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목소리를 키우고 팔달로까지 쏟아져 나올 때, 설다방의 동백아가씨나 알뜰한 당신은 한 발자국도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돌체로 몰려들었을 때 꼭 설다방만을 찾던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당시 설다방에는 최승범, 이기반 , 김교선, 이기우, 박동화, 문치상, 하반영 등 전주에서 이름 꽤나 떨치던 문인, 예술인, 화가 분들을 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그분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오늘날 같으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 젊은이들은 더러 찾아갔고, 설다방을 찾는 어른들은 그런 젊은이들을 부모 같은 마음으로 받아 주기도 했다.
그런 설다방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다가 전주에 갔다가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일부러 설다방 골목으로 들어가 봤는데 건물을 대개 그대로인데 설다방이 있던 건물은 사라지고 전주안과는 더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괜히 갔다는 후회감이 들었다. 가지 않았더라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설다방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었을 텐데,. 옛것이 어디 그대로 남아 있겠는가. 이제는 완산동 골목을 돌아다녀봐도 골목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다가공원 아래 한옥 골목도 골목은 남아 있었지만, 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던 집이 아니라 반듯반듯한 양옥집으로 변해버려 조금도 예산의 분위기가 아니다.
사라진 것들, 사라지고 있는 것들. 그 옛날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설다방에서 느긋하게 한담閑談을 나누던 그 유명한 분들도 이제는 다 유명을 달리했으니 이 시대에 아직 남아 있는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 이래저래 애를 태울 뿐이다. 풍남동 은행나무 골목은 억지로 만들어 놓은 한옥마을에 밀려났고, 남부시장 개골목은 오직 그 좁은 길만 남아 있을 뿐 소위 '미제바지'를 팔던 가게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완산동 수도골목도 그 몸집을 배나 넓혀 놓아 더 이상 골목이 아니었다. 어은골 그 좁고 삐뚤빼뚤했던 골목은 차량이 드나드는 찻길이 되었고, 다가동 기와집들은 추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추억이라고 가슴에 묻어두기엔 너무 가슴이 절였다.
중국 여행을 할 때마다 부러운 것은 옛것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고성古城이 얼마나 많은가.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는 길을 그대로 남겨 놓은 채 흘러간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붙잡아 놓고 있는 고성들. 조금 불편하고, 복잡하더라도 옛 것을 옛 것 그대로 남겨 놓았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