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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Sep 24. 2023

11화 아직도 선생일까

      

ㅡ 선생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번 13일 토요일에 친구들 모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오시기 좋게 수도권으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오후 늦게 수필집을 읽고 있는데 전주에서 아주 고차원의 영어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제자가 전화를 했다

ㅡ 그래, 갈게.     


31년 전에 담임을 했던 3학년 7반 졸업생들이 1박 2일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한다. 매년 두 차례씩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부족한 선생인데도 꼭 불러준다. 담임을 하는 일 년 동안 대학 입시를 앞둔 3학년으로서 즐거운 일도 많고, 굴절도 많았지만,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학급이다.


일반적으로 인문계 학급은 개성이 뚜렷하고, 주관이 강하여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친구들은 여느 인문계 학급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나 학급의 분위기는 늘 살아 있었고, 활력이 넘쳤다. 급우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한데 어우러졌고, 힘으로 괴롭히거나 악한 본성을 가진 아이들이 없었다.


봄꽃이 한창 피어나던 날, 바람까지 코끝을 간지럽히던 날 아이들은 봄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한꺼번에 드러내었다.

ㅡ 오늘 우리 반은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00 대학교 축제 현장으로 간다. 우리가 좋아하는 보랏빛 향기 강수지를 만나러 가는 거야.  


학급 실장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교실을 뛰쳐나간 아이들은 대학교 교정에서 휘청거렸고, 다음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등교했다. 그러나 나는 학부모님들과 파출소 두 곳을 돌아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졸업식 전날 내장산으로 철 늦은 소풍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날 저녁 27명의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어떤 아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ㅡ 선생님, 내일이 졸업식인데 오늘은 용서가 되는 거죠? 그렇죠?

ㅡ 그래도 남에게 지탄받을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이들은 변기가 막히도록 토해냈고, 우리 반이 최고라며 떠들어 대다가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대부분의 아이들은 도망가버렸고, 일어나지 못한 8명은 나와 같이 서부시장에서 해장국을 한 그릇씩 먹고 졸업식장으로 갔다.      


세월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동안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있었고, 졸업 20주년 행사를 하면서 다시 만났다. 농장주, 공무원, 은행원, 교사, 태권도 학원장, 회사원, 변호사, 판검사, 전기공사, 건축업, 세무사, 언론인, 출판사, 경찰관, PD, 음식점, 노무사, 화가 등 각양각처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때부터 매년 두 번씩 얼굴을 맞대고 깔깔대면서 학창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담임을 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했는데도 꼭 연락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만, 나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ㅡ 내가 늘 부족한 선생이어서 여러분들 보기가 부끄러우니 이제 나를 그만 불러주면 안 되겠니?

ㅡ 참, 저희들은 선생님이 좋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부끄러워하시라고 만나는 거예요.

그렇게 10년이 넘게 우리는 만나고 있다.      


퇴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았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3학년 7반이었다. 학년 부장 선생님이 무척 미안해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온몸으로 학급 생활을 이어갔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걸음을 걸으려고 했고, 나는 그들의 걸음의 방향을 조금씩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사이에 웃음이 끼어들었고, 아픔이 자리 잡기도 했다. 그때 선배들이 나섰다. 명분은 ‘3학년 7반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교실이며 교무실이 온통 치킨과 피자 천지였다. 선생님들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고, 가을에 한 번 더 치킨과 피자가 배달되었을 때는 개교 이래 두 번째 일이라고 했다. 그때 피자와 치킨을 실컷 먹은 후배들은 지금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디고 있다.      

이제 50이 넘은 중년들인데 아직도 그들의 시간은 고3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학생 시절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성격이나 말투도 그대로이다. 가장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원만하게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교육이라는 것은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친구들이 건강한 마음으로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세상의 한 축이 되는데 내가 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하나의 선생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때 따뜻한 품을 내어주지도 못했고, 저들이 배고파할 때 나는 그들의 숟가락이 되어주지 못했었다. 그냥 그들 곁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은 나를 아직도 선생으로 받아 준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로 맞아 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선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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