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페르소나 Persona, 벗어야 하는 가면
페르소나 Persona는 원래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가 하는 가면을 말한다.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이 처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인간관계를 맺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김생김이나 속에 담겨 있는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 같은 경우에는 꼭꼭 싸매어 감추려고 하거나, 다르게 보이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페르소나 Persona이다.
어떻게 보면 상황에 맞게 대처하고, 사람들의 성격이나 입장에 따라 자신을 틀어 맞추는 바람직한 방법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열등감을 축적하여 심각한 난관에 부딪치게 되기도 한다.
정체성은 본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본질적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거짓을 보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이고, 들을 대로 말한다. 늙어서 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예전에 퇴근을 하다가 노인들이 모여서 노는 공원을 지나가게 되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팔각 정자 아래에서 노인들이 바둑판을 벌이고 있었다. 바둑이 심각하게 얽혀 있어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흑백의 치열한 다툼에 빠져들었을 무렵,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건넸다.
ㅡ 처음 보는 얼굴이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ㅡ아, 예, 뭐
이런 곳에 처음인지라 약간 당황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ㅡ 내가 반말로 해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봤다. 그랬다. 처음 보는 사람이 밑도 끝도 없이 반말을 하는데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ㅡ솔직하게 말해. 기분 나쁘잖아.
ㅡ예, 약간은 그렇기도 하긴 하네요.
ㅡ당신도 반말로 해. 여기에서는 모두 다 같은 처지의 친구가 되는 거야. 이곳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는 놀 수 없는 거거든. 그러니까 당신도 무조건 반말로 하는 거야. 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ㅡ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존댓말을 했다.
ㅡ여기 있는 사람들 왕년에 쟁쟁했던 사람들 많아.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대단했던 사람들이라고. 모두 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거야.
돌아오는 걸음이 조금 비틀거렸다. 마음이 무거워진 까닭이다. 늙어서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걸까?
자신을 숨기고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옳은 것일까? 다음 날 다시 그 공원에 갔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흐르고 있는 심사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다 똑같았다. 모두 다 무표정하였고, 무감각하였으며,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들은 개성을 다 내 다 버리고 있었다. 공원을 지배하고 있는 예리한 분위기에 가슴을 베이고 있었다.
ㅡ한 칸을 뛰어나가야 하는데.
바둑판 앞에서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바둑판에서 훈수를 하는 것은 뺨을 맞을 수도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바둑을 두는 사람이나 구경하고 있는 사람이나 반응이 없었다.
ㅡ흑이 잘못 두고 있는 것 아닌가?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반말을 건넸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남이 하는 일에 일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이곳의 질서요, 흐름이었다.
ㅡ막걸리 한 잔 할텨?
어제 그 사람이었다.
ㅡ나는 36년간 경찰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한 지 3년 째야.
막걸리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ㅡ처음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데 못할 짓이더라고.
자신이 현역 때에는 잘 나갔는데 무질서하고 무개념적인 곳에서 어우러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시간을 보내야 하는 까닭에 두꺼운 가면을 썼다고 한다.
ㅡ 당신도 공직에서 넥타이 매고 살았지? 어제 처음 보는 순간 알아봤거든.
노년의 삶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한다면 그런 곳에 가지 않아야 한다. 노년의 삶이라고 해서 시간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주관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놀아야 한다. 늙어서 만나는 친구는 취미가 같지 않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어떻게든 가면을 벗고 살아야 한다.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 할 일도 없고, 놀 사람도 없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공원으로 간다. 가면을 하나 뒤집어쓰고 대화도 없이 혼자서 하루를 보낸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다시 혼자가 된다.
은퇴 준비는 혼자서 놀 수 있는 마음과 네댓 시간을 걸을 수 있는 다리 힘을 기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공원에서 가면이나 쓰고 살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