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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Sep 15. 2023

9화 가족은 모든 것을 수렴한다

        

손녀를 영어 놀이터에 데려다주고, 뒤에 있는 숲을 걷는다. 봄이 오는가 했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에 묻혀 허덕이고 있다. 담록(淡綠)을 넘어선 이파리는 진초록의 이야기들을 그야말로 쏟아내고 있다. 숲 속으로 스며들어온 바람은 여기저기 봄 내음을 확확 흩뿌린다. 봄 내음에 일격을 당한 숲은 자신이 돋워낸 초록의 뒤편으로 또 다른 초록의 시간을 불러 세우고, 불러 세우고, 불러 세우고 있다. 세상은 초록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숲은 초록의 두께를 더하고 있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는다.


사람들은 모두 바삐 걷고 있다. 송홧가루가 흩날리고, 주민자치센터 앞 작은 언덕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저들은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운 탓이다. 저들의 발걸음을 총총거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의 삶에 무거움을 얹어 놓았다는 말인가. 자신보다는 돌아보아야 할 가족을 위함이 아닐까. 저 사람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가족이 저들의 마음을 볼썽사납게 몰아치고, 걸음을 총총거리게 할 것 같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이어진다.     


문학 속에 담겨 있는 세상은 언제나 평안하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갈등하고, 침묵하고, 눈을 흘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이상으로 힘들고 가슴이 아프다. 그런 까닭에 문학은 실패한 삶의 기록이라고 말하는가 보다.


양귀자의 『한계령』에 등장하는 ‘나’의 이야기는 멀쩡한 사람의 오목가슴까지 짓누른다. 유년 시절의 친구이자 밤무대 가수인 ‘은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 역할을 했던 ‘큰오빠’를 대하는 소설가인 ‘나’를 보면 떠나온 고향, 가족은 잊힌 듯하지만, 의식의 심층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꾸러미이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소설 속의 인물이기를 바랐을까. 자신을 만나 달라는 ‘은자’, 자신의 어깨를 내주어 한몫의 사람으로 키워준 ‘큰오빠’는 자신의 마음속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가족의 가치이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고향의 의미이다. 변하지 않는, 변해서는 안 되는 가족과 고향. 그런 까닭에 그들을 만나는 것은 가족 또는 고향을 잃게 되는 것이다.      


퇴직하고 나서 아이들 곁으로 이사를 한 것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아도 가족일진대, 굳이 자식들 곁으로 옮겨온 것은 눈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라고, 자식, 손주들과 자주 만나 밥 먹고, 하하 호호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3월부터는 손주들의 하교와 하원길을 같이 하고, 영어 놀이터와 축구, 수영 교실을 데리고 다닌다. 오가는 길 잠깐이지만, 아이들이 재갈거리는 모습에서 활기를 느낀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늙은이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더구나 손주들의 재롱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누구나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은 시・공간이 있다. 고향이나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가 유년 시절 친구인 ‘은자’를 만나지 않으려는 것은 ‘은자’를 만나고 나면 25년 이상 담아두었던 고향의 이미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친구인 ‘은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고향의 이미지를 살려두고 싶은 ‘나’를 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줬던 ‘큰오빠’가 질병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끈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한동안은 나도 저렇게 바쁜 걸음을 걸었다.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었고, 힘이 들어도 그것이 가족을 위하는 것이라면 다 참아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힘든 삶을 버텨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식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나름 지혜롭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눈이 어두워지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지고, 총기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책을 읽어도 그 의미를 한참 동안 생각해 봐야 하고, 영화를 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순발력이 떨어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이럴 때 자식들이 큰 힘이 된다.


자식들이 모든 것을 다 잘해줄까? 살다 보면 서운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기에, 부모이기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자식들 앞에서 곱게 익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ㅡ할아버지, 지금 당장 저희 집으로 오실 수 있어요?

일곱 살짜리 손자 녀석이 전화해 대는 것을 보니,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가야 한다. 가서 들어줘야 한다. 손자 녀석이 헤살거리며 조잘조잘 늘어놓는 시시덕거림을 거들어 줘야 한다. 그것이 가족이고, 늙어서 사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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