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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Sep 12. 2023

8화 손자는 자란다


     

 “스톰 x는 현관문, 에이스는 주방, 프론 폴리스는 뒷베란다, 스카이 스와트는 안방, 댄디 엠뷸런스는 화장실을 지켜라. 나는 프라우드제트와 함께 거실을 지키겠다. 절대로 우리 집에 도둑은 들어올 수 없다.”


  다섯 살짜리 손자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모든 로봇과 공룡 등을 총동원하여 집안 곳곳에 배치해 놓고는 자기 방 창문 아래에 뾰족뾰족한 장난감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현관 밖에 물을 뿌려 얼려 놓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현관문 앞에는 종이를 잘게 찢어 놓고 그 앞에 손선풍기를 가져다 놓았다. 임무를 부여해 준 장난감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준비를 잘하고 있으라고 몇 번씩 확인한다. 크리스마스에 아빠 엄마와 맥컬리 컬킨이 등장하는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고 나서는 캐빈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손자는 항상 자신의 로봇과 장난감들과 더불어 자기의 세상을 만들며 논다. 로봇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잘못한다고 혼내고, 큰소리치다가 좋아서 시시덕거리며 웃어댄다. 무엇이든 손자의 놀잇감이 되었고, 대화의 상대가 된다. 자기가 잘못하여 넘어져 놓고는 옆에 있는 돌고래 인형을 쥐어박는다. 자기가 넘어진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도 등장인물들을 채근하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금방 죽이 맞아서 깔깔거린다. 온종일 이야기하고, 온몸을 가만 놔두지 않고 움직인다. 넘치는 에너지를 어찌할 줄 모른다. 어떤 일이든 자신감이 넘친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참 재미있다. 가끔 나도 손자의 놀이에 초대된다. 주어진 배역을 잘못하면 핀잔을 주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래서 놀이에 참여하게 되면 열성적으로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강아지가 되어 기어 다니기도 해야 하고, 미끄럼틀이나 그네 역할도 해야 한다.      


  어린 시절 우리의 놀이터는 고샅이었고, 들판이었다. 그네를 타본 적이 별로 없고, 시이소오는 이름만 들어봤다. 들판에서 만나는 개구리, 물뱀이 놀이 대상이었고, 담 너머로 뻗은 가지에 달린 개복숭아는 익기도 전에 우리 손에 희생되었다. 30분 이상 걸어가서 만나는 철길은 재미나는 놀이터였다. 별로 얻어지는 것도 없었지만 지나가는 열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열차를 탈 때 신발을 벗고 타는지 신고 타는지에 대해 친구들과 목소리를 높였고, 증기기관차와 디젤기관차는 누가 더 힘이 센지를 놓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이야기의 마지막은 기차를 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네에서만 맴돌아 보고 겪는 것이 지극히 한정되었던 시절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기차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책보자기를 내려놓고 서울행 열차를 타고 떠나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그들의 아픔은 이해하지 못하고 기차를 탔다는 사실에 기가 죽었다. 서울로 갔던 친구들은 명절에 집에 올 때 꼭 구두를 신고 왔다. 끝이 뾰족한 구두는 반짝거렸고, 그만큼 나는 풀이 죽었다. 30분 이상을 걸어 기차를 탔고, 기차를 타고 40분 이상 가서 다시 30분 이상을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다. 늘 배가 고팠고 시내에 사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할아버지, 꼭 잡고 있어야죠. 오뽀(손자가 붙여준 돌고래 인형 이름)가 불편하잖아요.”

인형의 꼬리를 꼭 붙들고 헤엄치며 먹이를 잡아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지난날을 돌이키다가 인형을 잡고 있는 손을 나도 모르게 놓아버린 모양이다. 손자의 질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 오뽀가 어떤 꿈이 있는지 아세요?”

다섯 살짜리가 하는 말은 어른스럽다.

  ”글쎄, 오뽀의 꿈이 뭘까? “

  “할아버지는 어른이면서 그것도 몰라요? 오뽀는 수영선수가 꿈이거든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우리 동동(중국에서 유치원 다닐 때 선생님들이 부르던 이름)은 꿈이 뭘까?”

  “저는 오뽀랑 바다에서 헤엄치고 노는 거예요.”

  손자의 꿈은 언제나 바뀐다. 그때그때 자신과 같이 놀고 있는 장난감들과 같이 노는 것이 꿈이다. 어느 날은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라고 해서 물었더니 장난감들 다 태워주고 싶다는 것이다.    

 

  도회지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로 돈을 벌러 갔던 친구들이 부럽지가 않았다. 편하게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훗날 몸을 던져 힘들게 살아야 하는 시골이 아니라, 편리하고 넉넉한 도시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굣길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살고 싶었다. 탐욕이라기보다는 짓누르고 있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와 같이 어울리는 장난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디서든 만나고 부딪치는 작은 생명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어른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세포적인 꿈이 아니라, 개구쟁이 마음으로 만들어가는 자신의 세상 그대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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