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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장금 May 14. 2020

병실 세면대의 세면 금지 안내문

여기 세면대에서는 세수 금지, 양치질 금지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다. 4인실의 한 병상을 차지했다. 병실에서 몇몇의 이웃을 만났다.


이웃 1

이 병실의 최고 선임이자 무료한 병실에서 유일하게 활력이 있으신 분, 붙임성이 좋은 걸걸한 아줌마. 미인이고 친절하고 화통하다. 텃밭의 상추를 한 푸대 가져와 여기저기 넉넉하게 나눠주신다. 모르는 것은 잘 가르쳐주시고 사회생활도 병원생활도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보신 분 같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샘들과 관계도 매우 좋다. 원장샘과도 잘 아신다고 은근히 인맥을 과시한다. 볼수록 귀엽고 소탈하고 때론 믿음직스럽다.


이웃 2

교통사고 환자다. 여자 가해자와 남자 피해자라는데 같은 날 다른 병실에 입원했다. 남녀가 같은 병실을 사용하지는 못하니 남자분이 우리 병실에 자주 드나드신다. 객관적으로 볼 때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하고 달랜다. 이해 안 되는 상황이다. 부부는 아니고 잘 아는 사이라는데 식사가 나오면 남자분이 여자분의 침상에 밥을 가져와 같이 드신다. 남자분 말로는 여자분을 혼자 두면 밥을 안 먹어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여자분은 잠들기 전 누군가 통화를 하며 잘 자~라고 한다. 뭔가 애틋하고 야릇히다. 4인실이지만 커튼으로 개인적 공간을 구획하기 때문에 두 분이 식사하며 속닥이는 대화의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여자분은 말투도 나근나근 고상하고, 남자분은 빡빡머리에 아주 거친 이미지다. 하지만 외모와 달리 그녀는 살뜰히 보살핀다. 여자분의 남편분이 가끔 병실에 오시면 형님 형님 하면서 또 친하게 지낸다. 모두들 그들의 정체? 가 궁금하지만 아무도 물어보진 않았다.


이웃 3

환자인 70대 엄마와 40대 간병인, 첨엔 전문 간병인이 환자분을 친근하게 엄마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근데 정말 친딸이다. 딸은 종일 스마트폰을 본다. 가끔 엄마에게 밀도 높은 짜증을 낸다. 없는 게 나을 것 같기도. 밤새 티비를 큰소리로 켜 놓는다. 밤새 깨어 있는 건지. 바로 옆 침상이라 시끄럽긴 하지만 견딜만하다. 병실의 개인 티비는 볼륨의 최대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항의를 하면 더 성가실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아무도 밤을 지새우는 티비 소리에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이웃 4

이웃 1이 퇴원하시고 막 오셨다. 들어오자마자 "죄송합니다"를 연발하신다. 뭐가 죄송하냐고 물으니 편히 쉬고 있는데 자기가 들어와서 환의를 갈아입고 침구를 정리하느라 부스럭거려 성가시지 않냐는 것이다. 남에게 털끝만한 피해도 안 주고 사신분이다. 우리 병실에 지켜야 할 수칙이 있냐고 물어보신다. "그런 거 없어요." 병실 한켠에 세면대를 가리키며 "저기서 세면을 해도 될까요?" "병실의 세면대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멀리 있는 공용 화장실까지 가서 세면 하기 불편하니 일부러 설치해 놓은 거잖아요. 당연히 세면 해도 되죠. 그리고 마침 오늘 고참들이 퇴원하셨으니 모든 사소한 규칙은 우리가 정하면 됩니다." "제가 예전에 있던 병실에서는 여기서 세수하고 양치하는걸 다른 환자분이 싫어해서 사용을 못했어요. 우리는 그럼 여기서 간단한 세면은 하기로 해요." "예 ~ 당연하죠. 와 근데 정말 그런 병실이 있어요?"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한 병실의 세면대 거울에 붙어있는 메모가 얼핏 보였다. (여기 세면대에서는 세수금지, 양치질 금지/ 여기는 수저, 그릇만 씻으세요. 병실의 청결을 위해 협조 바랍니다.) 모두의 동의를 구한 것일까? 혹시 이런 발의를 한 사람은 화장실을 자유롭게 다닐 만큼 거동이 자유로운 환자는 아닐까? 병원이 환자의 위생도 중요하지만 편의도 중요한데 도대체 저 공지가 뭐람? 차라리 "조금만 더 위생에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면 적당하지 않았을까?  



이웃 5

연세가 조금 있으신 사모님이 오셨다. 인맥이 화려하다. 병원의 의사와 수간호사들이 몇몇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 1인실이 없어서 다인실로 왔다고 하신다. 1인실은 하루 숙박비? 가 25만원이란다. 불편한게 없냐고 물으니 세면대 바로 옆이라 수돗물 소리가 좀 거슬리지만 나머진 괜찮다고 하신다. 가만 들어보니 조용한 병실 한켠의 물소리가 넘 크긴 하다. 나는 양다리가 자유로워 세면대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혹시라도 사용하게 되면 "세면대 사용 금지"라는 안내문이 붙기 전에 미리미리 알아서 사용 시간이나 수압 소음에 주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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