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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장금 Jun 07. 2020

아동 우울증, 한국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우울하다

한국 교육 100년 = 30년 노예, 40년 반공 산업, 30년 인적자원

지금은 코로나 19로 학교의 야간 자율학습이 중단된 상태지만 지난해까지도 고등학생인 딸은 매일 10시에 학교 일과를 마쳤다. 학기초 학부모 면담에서 선생님께 야간 자율 학습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학교의 분위기 아이의 학습 관리 등 여차저차한 이유로 결국 자율 학습을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저녁, 딸이 마치는 시간에 학교로 마중을 갔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딸아이의 친구를 함께 태워서 왔다. 그런데 아이의 친구가 집이 아닌 다른 목적지에 내려 달라고 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니?" 그 친구는 영어 과외를 간다고 했다. "밤 10시에 영어 과외를 간다고? 그럼 언제 마쳐? 집엔 어떻게 가니?" "12시에 마치면 과외 선생님이 집에 태워주세요." 


평소 그 아이의 엄마와 친분이 있었던 터라 전화로 물어봤다. "그 시간에 과외를 보내면 애가 너무 힘들어하지 않아?" "나도 보내기 싫은데 애가 과외를 안 하면 불안해해서 그 시간에라도 과외를 받고 싶어 해. 믿을만한 선생님이 있다는 게 든든한가 보더라구"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 원해서 10시 이후에 하는 영어 과외라니...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다. 학생도 행복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불행하게 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대한민국 학생들이 너무 가엽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님은 한국의 교육은 반교육이라고 비판했다. 교육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궁극의 교육에 완전 반대된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개개인의 특성, 소양, 재능을 이끌어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끌어내기는 커녕 밖에 있는 죽은 지식을 많이 집어 넣는 것을 진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은 지식을 많이 습득한 아이들을 똑똑한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어느 나라든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강한 자아와 개성,
그리고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그나마 미약하나 쬐끔 자아를 가지고 있던 아이도 12년 교육시스템 안에 넣으면 완전히 짓밟히고 찌그러져서 개성과 자아가 상실되어 나온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에서 얻은 것은 표현 하기조차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저 연탄 공장에서 연탄 찍어낸 듯, 아무런 개성 없이 수학 몇 점, 영어 몇 점이 전부다. 12년 교육의 결과로 교육의 궁극인 강한 자아와 개성, 인격이 성장했을까? 대한민국의 교육은 자아와 개성을 소멸시키고 과도한 경쟁으로 인격마저 상실하게 한다.  


학생들이 스펙을 갖춰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스펙은 주로 무기의 사양에 대해 언급할 때 쓰는 단어이다. 학생들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능적 역량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를 하나의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의 우리의 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교육, 민주주의자를 기르는 교육을 해 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지난 100년 교육을 냉철하게 돌아보자. 

30년 황국 식민 노예교육, 40년 반공투사 및 산업역군 교육, 30년 인적자원교육이 전부다. 


30년(1919-1949년) 일제 식민 치하에 이른바 황국 식민 교육을 받았다. 말 잘 듣는 노예를 키워 내는 교육이었다. 1950년 해방 이후의 40년의 교육은 반공투사 산업 역군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었다. 독재 국가주의(10년 민간독재 + 30년 군사독재) 동안에 이루고자 했던 교육의 목표다. 그 후 민주화가 힘겹게 이루어져 신자유주의 민주 정부가 30년간 했던 교육 역시 인적 자원(Human Resource) 교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00년의 대한민국의 교육은 반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한 민국이 지난 100년간 단 한번이라도 인간을 키우고자 한 교육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교육을 견뎌야 하는 것이 끔찍하다.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우니 청소년 자살률 1위가 통계로도 계속 증명된다. 1년 평균 250명의 아이들이 자살, 더 끔찍한 것은 1/3이 상시적인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특수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유는 학업 스트레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현실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이젠 청소년뿐만 아나라 아이들마저 우울하다. 아동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검은 백마'라는 말과 같다. 형용모순이다. 어떻게 아이 앞에 우울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가는가. 어떻게 아이 앞에 우울이 붙을 수 있나. 아이들은 온 세상이 놀이터이고 보이는 모든 게 장난감이고 놀이의 대상인데 우울함 틈이 어딨나. 그러나 한국의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우울하다. 너무나 끔찍하다. 더 이상 이렇 상태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한국 교육의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교육의 또 다른 목표는 강한 자아를 가진 개인이
또 다른 개인과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고 교감하면서 사는 능력,
즉 사회적 자아를 갖도록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교실 자체가 이건 완전히 생존경쟁의 전쟁터,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그런 끔찍한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거기에서 아이들에게 이기라고만한다. 이 무슨 회괴한 교육이란 말인가. 


심리학에서는 유년기의 정서가 평생을 좌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처럼 경쟁 교육의 기반으로 만들어진 승자는 어떨까? 경쟁 교육의 승자가 오만해 보이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다. 늘 1등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은 한 인간을 내적으로 망가뜨린다. 그런 사람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가 된다면?  이것이 한국 교육의 심각한 문제다.


교육의 목표가 달라져야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을 인적 자원으로 키워내는 교육 시스템이 끝나야 한다. 자원을 기르고 기능적으로 써먹다가 버리는, 아이들을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하나의 기능적인 인적 자원으로 보는 그런 관점을 끝내야만 한다. 인간은 존엄하고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해야 한다. 기능적으로 쓰다가 버리는 자원적인 기능을 가진 인간으로 키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연대하고 움직이면 교육도 바꿀 수 있다.
코로나에서 기품 있고 성숙한 모습으로 연대하여 세계가 놀란 것처럼
교육도 연대하여 교육혁명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세바시 김누리 교수님 강연 내용을 참고해서 적었습니다)

https://youtu.be/1CDa8sCiw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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