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즈데이북

코니윌리스

by 김빙하

둠즈데이북을 읽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1권 3분의 2 정도밖에 도달 못했었다. 1페이지 펼치자마자 괴이한 모습의 시신이 발견되거나 수수께끼 같은 등장인물들이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해서 궁금증을 마구 불러일으키는 스릴러 위주로 독서를 하다가 장편 sf를 읽으려니 좀처럼 달아오르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 책을 들고 있는 도중 몇몇 굵직한 사회 이슈에 흥분하고 절망하고 행동하느라 한 2주 동안은 거의 한 자도 읽지 못했다.

지난주 말 즈음부터 다시 책을 손에 잡아 읽기 시작해서 1권을 다 읽을 무렵에는 속도가 한껏 붙었고 2권은 손에 들고 놓을 수가 없었다. 다 읽고 난 지금은 소설을 다 읽어버린 게 너무 아쉽다.


2054년 12월의 옥스퍼드에서는 역사학도 키브린이 네트를 통해 중세로 가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병이 전염되기 시작한다. 시작은 네트를 작동시킨 기술자 바드리이고 이후 바드리와 접촉 이력이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병원으로 후송된다. 키브린을 중세로 보내 놓고 걱정에 휩싸인 던워디 교수와 의사 아렌스 등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옥스퍼드는 격리된 상태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열병으로 쓰러져 간다. 던워디 교수는 중세로 간 키브린이 돌아오지 못할 상황에 놓일까 봐 노심초사하면서도 격리되어 학교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페스트의 시기를 살짝 피해 1320년 12월의 스켄드게이트라는 옥스퍼드 인근으로 시간 여행을 간 키브린은 중세에 도착하자마자 열병을 앓아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한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가장과 떨어져 몸을 피해 그곳으로 온 듯한 가족 중에서도 로즈먼드와 아그네스라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특히 애정이 생기고 가족들과 그 하인들, 마을의 신부 등의 사정들도 파악해간다. 12세 로즈먼드와 약혼한 늙고 뚱뚱한 귀족과 그 일행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도착하고, 이어서 주교의 특사를 비롯한 성직자 세 명이 도착해서 성대하게 크리스마스 전야의 축제를 펼친다. 그러나 이튿날 성직자 두 명이 한 명을 남겨둔 채 도망치듯 떠나가고 로즈먼드의 약혼자 일행도 함께 떠나고 난 후 이 마을에는 무서운 질병이 돌게 되고 키브린과 로슈 신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


이 소설은 코니 윌리스의 1992년 작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운 점은 작가 코니 윌리스의 예지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판데믹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1992년에 2054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이미 40여 년 전에 전 세계적인 판데믹 상황이 있었던 것, 그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병 발생 시 격리와 통제, 역학 조사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미래를 쓴 것이다.

그러면서도 깨알같이 다양한 인간 군상의 캐릭터를 잘 버무려 놓았고 특히 옥스퍼드에 격리된 미국인 단체의 불평불만이나 역학적 조치에 대한 음모론적 시위가 일어나는 모습에 대한 묘사를 보고 있으면 코니 윌리스는 분명히 1992년에 이미 2020년을 왔다 갔을 것이라는 상상마저 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은 건, 미래에 대한 통찰, 전염병에 대한 대책, 시간 여행보다도 인상 깊게 다가오는 내용은, 전염병 발생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타인에 대한 의무와 배려이다.

물론 ‘휴지를 너무 많이 써’서 관리하고 있는 조교의 애를 먹이는 미국인들이나 끝도 없이 평가와 불평만 늘어놓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학부모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걱정하고 타인의 무사를 위해 기꺼이 노력하는 전개는 뒤로 가면 갈수록 뭉클하게 만들었다.

중세로 간 키브린도 마찬가지.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위생과 미개한 풍습에 안타까워하고 거기도 체면치레와 희생양을 찾기에만 골몰하는 사람이 있음에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자신과 함께 하는 어린 로즈먼드, 아그네스와 무식하지만 헌신적인 로슈 신부에 대한 애정과 경의로 전염병의 한가운데를 헤쳐 나가는 모습이 숭고하게 그려진다.

스토리의 기둥은 1320년으로 간 키브린이 무사히 현재의 옥스퍼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를 놓고 2054년과 1300년대 중세의 역병의 상황이 낳는 역경과 자포자기, 희망과 반전 등이 펼쳐지는 풍부한 스토리와, 한편으론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내용에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먹먹한 느낌이 없어지지 않는 소중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