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부서진 남자

마이클 로보텀 장편 소설

by 김빙하

마침 이 소설의 도입부를 읽고 있을 때 박사방 조주빈이 검거되고 신상이 공개됐다. 범죄가 심하게 잔인한 점과는 별개로 그의 용모는 지극히 평범하게 못났고 기자들이 마이크를 갔다 댔을 때 뱉는 말 또한 왜소한 자아를 어쩔 줄 몰라 자아도취라는 도피처를 선택한 못난 남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줬다. 일면식도 없는 여성들을 sns만으로 빠르게 굴복시키고 소위 '노예'로 만드는 방법은 대단한 데에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여성들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범죄자가 시키는대로 하면서 지옥같은 시간을 견뎠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는 알몸에 하이힐만 신은 여성이 다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투신하기 전 경찰과 심리학자인 조 올로클린이 설득을 위해 다가가지만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여인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말을 내뱉은 채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린다. 목격자가 많은 자살이니 아무도 타살을 의심하지 못하지만 죽은 여성의 딸만이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어서 다른 여성이 또다시 타살 흔적은 없지만 유사하면서도 기괴한 방식으로 죽은 채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연쇄살인 가능성을 두고 수사에 들어가게 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와의 통화 한 번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여인들. 전례 없던 살인 방식과 알 수 없는 살인의 이유가 하나 둘씩 밝혀지며 수사에 참여하는 심리학자와 심리를 조종하는 범인 둘의 대결로 치닫게 된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심리학자 조는 파킨슨병이 잠식해 가는 육체와 그 안에 침잠해가는 정신, 그로 인한 가족과의 불화로 인해 점점 불행해져 가는 인물이다. 제목 <산산이 부서진 남자>가 가리키는 인물이 이 주인공 조일거라는 추측을 안고 읽기 시작했지만 소설은 결국 인간성이 조각난 사람이란 타인을 부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혀를 낼름거리며 독을 내뿜는 독사같이 자신의 혀로 타인에게 내상을 주기를 즐겨하는 자들은 무수히 많고, 근래에 와서야 그런 방식의 가해가 범죄임을 인정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댓글, 사이버불링 등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런 행위를 오락거리처럼 소비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궁핍한 자아상이 자리잡고 있다. 약자와 여자를 골라 괴롭히고 정복하기를 선택하는 심리는 결국 자신이 동경하는 집단에서 주목받고 지위를 높이고 싶은 심리다. 그 인정을 위해 기꺼이 악의 축제에 동참한다. 빈약한 자아상을 보상받기 위해 타인을 부수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사실은 ‘산산이 부서진’ 사람들이다.


물리적 린치는 없으나 협박과 멸시의 언어로 피해자를 꼼짝없는 노예로 만든 사건이 현실에서 조주빈이고 강훈이고 갓갓이다. 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냐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가해자는 안들어오고 피해자만 들어온다. 자신이 그런 부류라면 이 소설을 한 번 보기 바란다.

피싱 사기가 수사기관의 지위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는 범죄라면 조주빈이나 n번방 같은 범죄는 익명의 불특정인이 피해자의 신상정보를 알고있다는 사실로 공포심을 주어 성공하는 범죄다. <산산이 부서지는 남자>에서도 범죄자는 피해자들의 신상정보를 담보로 삼는다. 차근차근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본격적인 공격을 할 때의 무기는 전화다.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자신과 가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신상을 이용한 협박에 무너져 내리는 과정은 순식간이다.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노예가 된 피해자가 스스로 파멸해 가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길고 지옥같은 시간이다. 범죄자는 피해자의 이 지옥같은 고통의 시간을 즐긴다.


피해자와의 물리적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나름 기발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기에 현실의 성착취방 범죄에 빗대어 얘기하느라 말이 길어졌지만, 아무리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도 이 소설의 기본 토대는 수많은 스릴러가 그렇듯 남자와 남자의 대결이다. 남성 심리학자와 심리고문 전문가의 대결이고 결국은 서로 상대의 가족을 가지고 한 판 승부를 하는 것이기에 가부장 남성끼리의 충돌이다.

여성 혐오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내용에 여성 혐오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고 억울한 여성 피해자들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성적 모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성착취방 사건의 피해자를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한 번 이 소설을 읽으라고 썼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큰 테두리에서 보면 서로 반대편에 있는 남자들의 고뇌와 한 판 충돌에 대한 이야기이고 디테일하게 보면 자극적인 묘사와 성적 속어가 난무한다.

특히 매우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범인의 특출난 능력에 대한 판타지이다. 영국 특수부대 출신이라서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됐다는 설정은 남성성과 능력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고, 특수부대 경험 때문에 비인간적으로 변해갔다는 식의 설정은 너무 흔한 남성 고뇌 서사의 변형판이라 식상하다. 이런 식의 범죄자의 고뇌와 남성적 실력 판타지의 결합은 현실에서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지만 -현실의 수많은 범죄자를 보라. 뒤틀린 사회성과 성욕의 찌질한 결정체일 뿐인데- 여전히 많은 스릴러 소설에서 차용하고 있는 설정이다.

게다가 미성년자인 피해자의 딸이 주인공 심리학자를 사랑한다는 내용까지 보면 오 마이 갓!이 저절로 육성으로 나온다. 이 작가 자신의 판타지를 소설에 너무 충실하게 반영하는거 아니야?


대체로 흡입력이 있지만 초반부에 몰려 있고 중반 이후부터는 늘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어디로 갈 건지 감이 다 잡힌다는 점도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