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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비타 Apr 15. 2022

집 앞 벤치

익숙해지는 것에 관하여

우리 집은 아파트의 일 층이다. 이사 다니며 늘 층간 소음이 신경 쓰였는데, 아이가 마음껏 뛰어도 눈치 안 볼 수 있어 선택한 집이다. 처음에 이사를 오고 나서 거실 밖을 보니 전에 살던 집과 다르게, 바로 앞에 보이는 나무와 창 사이의 거리가 참 가까웠다. 푸르른 잎이 무성한 벚꽃 나무, 단풍나무를 보고 있자니 마치 나만의 정원을 하나 가진 것 같았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고, 창문을 열면 손에 닿을 듯한 초록색 나뭇잎과 대화를 할 수도 있겠다는 소녀적 감상에 젖어 새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로맨틱한 상상도 잠시, 눈에 안 보였던 작은 쪽문이 담장 코너에 있어 행인들이 수도 없이 지나다니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것은 낮은 철책 담 너머 놓여있는 기다란 벤치였다.

벤치는 몇 미터 간격으로 도로 끝까지 놓여있었고, 아침에 속옷 차림으로 거실에 나왔다가 문득 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적도 있다. 그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친 듯했다. 아파트의 고층에 살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스트레스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맘에 들던 창문에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거실에 나올 땐 창밖부터 살펴보게 되었고, 오히려 커튼을 치고 있는 게 편했다. 여전히 초록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 이젠 벤치만 보였다.



사생활이 노출된다며 조처를 해 달라고 관리실에 항의도 해 보았으나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담장의 높이를 올릴 수도 없고, 그냥 살아야 하느냐는 생각에 새로운 집에 정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창 밖 풍경이 주는 즐거움과 사생활 침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거실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야 할까 답답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한두 명씩 벤치에 앉았다가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문득 벤치에 몇 명이나 앉을까 궁금해져서 세어 보기로 했다. 낮에는 강한 햇빛으로 바깥쪽에서 거실 안이 보이지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편한 마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차츰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거실 통 창이 영화 스크린이라고 생각하고 느긋한 기분으로 커피까지 마시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터 간격으로 놓인 벤치는 대로변에 있어 마을버스에서 내려 건널목을 건넌 사람들이 잠시 걸터앉아 있기도 하고, 오전 산책을 하던 할아버지가  걸음 쉬어가다가 꾸벅잠이 들기도 했다. 유치원에 다녀오는 손자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할머니도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싱그러운 풋사랑을 하는 연인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기도 했다. 지난봄 벚나무에서 눈처럼 꽃잎이 흩날릴 때는 밤늦게까지 벤치는   없이 주인이 바뀌었다. 이젠 거실에 나올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느덧 이사    년이 되어간다.  오는 , 바람 부는 ,  오는 , 꽃비가 내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벤치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벤치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그 의자에 처음으로 앉아 보았다. 자연스레 시선은 거실 유리창으로 향했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와 철제 담장으로 가려져 누군가의 집이라는 것 외에 별생각이 들지 않는 그저 네모난 유리창이었다.

창밖 사람들을 바라보며 관계를 유추해 보기도 하고, 측은히 여겨보기도 했으며 슬쩍 웃기도 했으니 결과적으로 나의 사생활이 침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쪽 행인들의 짧은 휴식 시간을 엿본 셈이다.





인생이 누군가와 익숙해지는 과정인 것처럼 나도 집 앞 벤치와 어느새 친해져 있었다. 벤치는 아무 조건 없이 공간을 허락하고 시간제한도 두지 않았으며, 말없이 쉬어가는 사람들이 하는 혼잣말을 들어주는 듯했다. 집 앞 벽돌색 나무 벤치는 이제 우리 집에 없어서는 안 될, 다정한 배경 화면이 되었다.


역시 1층에 살기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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