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가엽지 않아요?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말이에요.
왜 이렇게 됐을까.
스물아홉에 사춘기는 너무 가혹하다. 어른이 되지 못한 설익은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하는데, 마냥 열아홉처럼 부딪히기엔 어쭙잖게 철이 들어버렸다. 그래서 지난봄에는 휴가를 내고 열흘을 쉬었다. 세상과 나를 분리하며, 내 마음속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을 기록하겠다 약속했고 총열개의 글을 썼지만, 메모장에 고이 간직한 채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다. 얻은 것도, 바뀐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일상으로 돌아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절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성장할거라 생각했던 나를 조롱하는 듯, 유치한 상념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회사 프로젝트로 심리상담 전문가를 만나게 됐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한 시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놨다.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어졌고 나름 긴장이 됐는지 양손에 깍지를 낀 채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메모를 하던 펜을 내려놓고 내가 뱉었던 말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말했다. 세련님, 소리 내서 저를 따라하세요. '선생님,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나는 그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고작 다섯 마디, 짧은 문장. '열심'이라는 단어를 뱉다 목이 메었고, 크게 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고작 다섯 마디 뱉는데, 온 감정이 요동쳤다. 그리고 그녀는 내 감정을 그대로 받아 답했다. ‘정말 수고 많았어요.’ 결국 처음 본 사람 앞에서 눈물이 터졌다.
삐딱한 인정욕구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은 성장과 관계. 이 둘을 양립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기도 쉽지 않은 것들 아닌가. 성장에 집중할수록 관계는 희미해지고, 관계를 붙잡다 보면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을 발견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아니다.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잘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만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큰 것을 원했고, 있는 힘껏 에너지를 발산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방전시켰다. 아니 정확하게는 에너지를 방전시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 에너지는 주위를 불편하게 했고 떠나게 했다. 정작 잘못한 것은 나인데, 떠난 사람들을 원망했다.
삶에도 끝이 있듯, 에너지도 고갈이 온다. 3년 혹은 10년 뒤, 언젠가는 모르겠지만 분명 사그라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나에겐 무엇이 남게 될까. 타인의 인정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 그걸 지탱해줬던 에너지는 더 이상 없고 그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을 테다. 그동안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과연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 자책하며 공허함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답을 찾아야 한다. 이 뒤틀리고 삐딱한 인정욕구를 끊어야 한다.
결핍을 인정하는 것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삐딱한 마음은 오래된 결핍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딱지가 앉아 때 묻은 상처를 꺼내 마주하고, 감아버린 한쪽 눈 마저 뜬 채 지긋이 들여다봐야 한다. 감당할 수 없어 버리고 온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는 것. 작은 키만큼이나 미숙한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타인의 인정 없이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이 지난한 사춘기를 끝낼 수 있는 것도 결국 나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보다 속도가 나지 않을,
그래서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나의 여행은,
길게 시작된 또 다른 휴가를 빌미로,
이렇게 첫 발을 연다.
언젠가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나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