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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련 Sep 25. 2018

2_ 푸른 도포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련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건강을, 동생은 출근을 핑계로 삼았다. 얼굴 대신 목소리로 안부를 전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아빠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예전처럼 소리 높여 내려오라며 강요하진 않으셨다. 그가 이혼을 결정하며 스스로 내려놓은 권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했다. 집안 어르신 가득한 그곳에서 나답지 않은 가면을 쓰고 억지로 웃고 있지 않아도 됐다. 벽 하나를 두고 갓 쓰고 앉아 술잔 비우기 바쁜 남자들과 쉴 새 없는 부엌일로 분주한 여자들. 그 속에서 혼자 분개하며 소리 높이는 나에게 철없고 어린것이, 여자가, 버릇없이 군다며 손가락질하는 비정상적인 곳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게 외로움보다 더 큰 위안을 줬다. 집안의 중심, 다음 대를 이어갈 장손임과 동시에 불청객인 나를 보며 아빠는 쓰게 웃겠지. 두 딸을 위해 많은 것을 바꾸셨지만, 어깨에 가문이라는 큰 짐을 떨쳐낼 수 없었던 아빠는 오늘도 부재중 전화를 남기셨다.

 


한국 근현대사에 휘말려 위세를 잃은 경상도의 양반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철저히 구분하며 유교전통을 목숨처럼 여긴 문중 어르신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옥색 도포자락이 멋스럽고, 흰 수염이 정갈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름보다 호나 큰 어르신으로 불렸던 할아버지. 옛날 사람 치고 큰 풍채와 위로 솟은 긴 흰 눈썹 그리고 매서운 눈빛은 호랑이를 닮았다 하여, 마을의 하얀 범이라고도 불렸다(작은할아버지는 검은 범). 엄마는 새벽 동틀무렵 깨어나 할아버지가 기침하면 드실 차를 준비했고, 할아버지는 몸단장 후 자리에 일어나 그날 읽을 책과 부채를 손에 쥐고 정자에 오르셨다. 건강이 좋지 못해 모든 농사일을 소작주고 난 뒤에도, 엄마가 할아버지를 깨우는 일은 없었다. 동네 잔칫날 많은 술을 드시고도 휘청임 하나 없었고, 향교나 재사에 오르실 때는 화선지 버리는 일 하나 없이 붓을 내려놓으셨다. 어렸던 나는 감색 바탕에 머리와 허리띠 장식이 화려한 제례복보다, 주인을 똑 닮은 옥색 도포를 더 좋아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마치 제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 했다. 종갓집 5남매 중 유일한 아들로 자라 할머니마저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아빠에게 호통을 칠 수 있는 건 오직 할아버지뿐이었다. 멀리서 온 며느리가 외롭진 않을지, 고된 시집살이에 남몰래 눈물 흘리진 않는지 세심히 챙긴 건 역시 할아버지뿐이었다. 부부가 다툴 때면, 모자라게 키운 저를 탓하라며 고개를 숙이셨고 편하나 없는 엄마에게 유일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다. 회사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게 누구보다 중요했던 아빠로 인해 엄마는 집에 홀로 남겨졌지만, 할머니는 첫 손주를 품어 몸이 힘든 며느리보다 일에 지친 제 아들을 챙기기 바빴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위해 멀리 시장에 혼자 나가셔서는 햇과일들을 할머니 몰래 쥐어주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라며 들꽃들을 꺾어다 주시곤 했다. 나와 동생이 태어나고, 분가를 하여 따로 살게 됐을 때도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하나면 엄마는 기를 펼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암으로 병원신세를 지게 됐을 때, 딸들보다 지극정성으로 돌본건 어쩌면 당연하게 엄마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잡으며 이름을 부른 건 제 뒤를 이을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바로 엄마였다.



나에게도 할아버지는 등대 같은 존재였다. 세상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선인 같아 보였다. 어떠한 질문에도 허투루 답하는 일 없이 조곤조곤 설명해주시곤 했다. 왜 딸인 나는 남자 사촌들과 달리 아빠나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없는지, 왜 호적에는 엄마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지, 왜 나는 내 조상을 모신 향교나 재사에 올라 인사를 할 수 없는지 등 어린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다른 문중 어르신들은 예와 법규가 그러하다며 쉽게 내치셨지만, 할아버지는 내 기준에 맞게 하나씩 바꾸어 주셨다. 재사에 올라 분정례의 먹을 가는 것, 나보다 어린 남자 사촌동생의 뒤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아빠 옆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 모두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유산 같은 거였다. 할아버지가 읊어주시는 책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긋나긋한 말투가 좋아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허리춤에 꽂고 다니시던 곰방대가 사라지고, 알싸한 은단으로 바뀐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에게 끝없는 배움을 주고 싶으셨던 할아버지는 한창 중간고사 준비로 바쁜 나에게 방해될까 하루하루 악화되는 본인의 증세를 비밀에 부치라며 신신당부하셨다. 고작 1년에 몇 번 치르는 시험이 뭔 대수라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과거 앞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참 무색하지만, 힘든 일 앞에서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더 이상 든든한 방패막이가 없는 이 집안.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할아버지는 내게 어떤 조언을 주셨을까. 할아버지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을까.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 가족은 여전히 한 지붕 아래서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할아버지의 옥색 도포는 아빠가 물려받았고 아빠는 중요한 제사를 지낼 때에만 그 도포를 꺼내 입곤 한다. 할아버지가 쓰셨던 붓을 들고 차례 지방을 쓰는 모습과 희끗해져 가는 머리카락에서 할아버지를 찾는다. 엄마는 이혼 후 아빠나 그 집안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지만,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눈물반 웃음반으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딸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채 떠난 나와 내 여동생 사이의 네 자매들을 기리는 연등 옆에는 꼭 할아버지의 연등이 함께 걸려있다.



몸과 마음은 편한데, 잠에 들기가 참 어렵다. 외면하기 어려운 게 뿌리이고 핏줄이라 그런가. 그렇게 치를 떨며 싫어하는 그곳도, 할아버지의 고운 옥색 도포도 언젠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될 테다. 제 목소리를 드높이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나는 잘 지킬 수 있을까. 더 이상 엄마처럼 외로운 사람을 만들지 않으며, 할아버지께서 주셨던 지혜들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을까. 그럼 지금부터 나는 무엇부터 바꾸려 노력해야 할까. 일단 내일 아빠의 부재중 전화에 답을 해야겠다.







조금 알 것 같다.

인정받고 싶어 안달난 이 삐딱한 마음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타고난 성별로 인해 겪은 부정과 한계, 그 모든 걸 뛰어넘기 위해 나는 언제나 집안사람들의 화제가 되어야 했다. 소꿉놀이 인형보다, 로봇을 쥐고. 100점으로 가득한 시험지를 뽐내고. 미술, 음악, 체육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어리숙하거나 우는 모습으로 책잡히지 않게 감정을 닫고. 그렇게 재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나는, 그 부작용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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