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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Feb 22. 2019

그들의 변신-IS 김군과 카프카

문 안의 사람들

  포털 뉴스를 성의 없이 훑다 보니 ‘국민 장남’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기사 내용은 안 보고 제목과 미리 보이는 부분만 대충 보니, 탤런트 유준상 씨가 사건사고 많은 복잡한 집안의 장남으로 나오는 드라마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다. 국민 장남 옆엔 ‘절절한 가족애’ 어쩌고 저쩌고 나왔지만 절절한 신파도 싫어하고 가족, 국민, 국가 신봉 주의에도 거부감 느끼는 나로선 앞으로도 볼 일 없는 드라마군! 생각했다. 내가 가족, 국가 신화 만들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하나 이상의 애정을 가지지 못하는 마음은 불쌍한 것"이라는 마르크 블로흐의 말에 찬동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국가 만사 주의는 그런 "하나의 애정"을 신격화하고 조직 이기주를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나라 국민들은 국가에 그렇게 당하고도 국민스러운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온갖 데에 다 국민을 갖다 붙인다. 국민 여동생, 국민 배우/가수는 기본이고 최근엔 국민 이모, 국민 수녀와 국민 스님/신부도 봤다. 그렇게 많고 많은 국민 중 정작 ‘국민 대통령’만 없었다.    

  썩소와 실소를 날리며 국민/국가란 무엇인가? 장남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다 보니 늘 옆길로 잘 새는 나는 뜬금없이 수년 전 IS로 떠난 김 군과 카프카가 생각났다. 그 둘 다 가족과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못 느끼고 깊은 소외감 속에 방황한 정체성 불안자들이다. 김 군은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싫어서 테러단체 IS로 갔고, 독일의 국민작가로 불릴 카프카는 생전 내내 직장, 가족, 국가(민족) 어느 한 곳에서도 진정한 소속감을 못 느낀 채 소외감에 시달렸다.     



"나라와 가족을 떠나서 살고 싶다"


  흔히 매스컴이나 책에선 인간의 '소모'됨을 우려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오히려 잘 '소모' 된다는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살고 있었다. 가끔씩 나는 헷갈렸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잘 '소모'되지 못하고 있다는 열등감으로 우울해하는 건지, 아니면 '소모' 되느라 피곤한 자괴감에서 우울한 건지.... 그렇게 헷갈리는 날에는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나도 카프카의 저 그레고리 잠자처럼 한 마리 갑충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아니, 벌레는 좀 그렇고...... 새나 구름, 바람이 되었으면 싶었다. 그리되면 잘 '소모되고 싶다'와 '소모되기 싫다'에서 우울해하지 않아도 되고, 이 세상에서 쉽게 방역되거나 소거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수년 전 국경을 넘어 is로 간 18살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카프카의 그 이방인적 소외감과 고독을 떠 올렸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어디 한 곳에 마음 둘 곳 없었던 어둑하고 외로운 영혼-

"나라와 가족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국경을 넘어 is로 간 김 군)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그는 도대체 아무것도 기대할 바가 없었던 것이다-
김광규, 카프카 론(문학과 지성사 16쪽)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그의 동정은 사회 속에서 자기의 공간을 찾아보려는 시도로 되풀이되었다. 그중의 하나는 사회주의에의 관심으로 나타났다. (같은 책 17쪽)  

   

  양쪽 아무 데에나 '김 군의 말' 혹은 '카프카의 말'이라 적어도 두 사람의 글을 모르는 사람은 이게 누구 말인지, 누구에 대한 해석인지 잘 모를 정도다. 국경을 넘은 한국의 소년과(이하 '김 군'으로 호칭하기로 함) 독일의 카프카가 느낀 고독감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과 체코에 살고 그들의 말과 문화 속에 살았지만 한 번도 어느 쪽에서고 완벽한 '일체감'을 맛보지 못했던 카프카와, '나라'를 떠나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던 김 군의 고립감은 비슷해 보인다. 살고 싶다는 '실존'에 대한 각자의 열망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소수이긴 하나 좋은 친구, 책과 그림, 음악 같은 '예술'을 가까이 둔 카프카는 정신적, 심리 문화에 외로움과 동질감을 투사했고, '왕따'의 후유증으로 홀로 칩거하던 김 군은 '게임''전쟁' 같은 '인터넷' 문화에 경도됐을 것이다. 또, 그 소속되고 싶었던 집단이 카프카에게는 '사회주의'로 김 군에게는 'is' 같은 테러조직으로-  그러고 보니 카프카는 '까마귀'에, 김 군은 '외로운 늑대'에 자신(들)을 대입했는데,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시간과 장소에서 살아간다는 것, 외롭고 고독한 정서가 비슷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한 '자유'를 열망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소속'되고 '연대' 되고 싶다는 '구속감'도 같이 느끼고 싶은 양면성이 있다. 그 '자유'에의 갈망이 카프카에겐 '직장'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것이고, 김 군은 자기 존재의 근원인 '가족'과 '조국'  억압적 대상이었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도피'는 '변신'을 꿈꾸게 하는데 카프카의 변신은 '갑충'으로, 김 군의 변신은 'is 조직원'으로 명명되겠다. 그레고르 잠자는 그 무의식적 열망이 어느 날 갑자기 불가항력적이고 타의적 모습으로, 김 군은 오랜 계획하에 자의적으로 변신한 게 좀 다르겠다.    


문 안에서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나 김 군 둘 다 항상 '문(혹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방치와 무관심, 염원!으로 죽게 돼서야 문 '밖'으로 나왔고, 김 군 역시 '국경'을 넘게 되면서 비로소 방 밖, 문밖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작은방, 그보다 더 작은 '문'이 세상과 자신 사이의 큰 '금'이거나 '벽'이었고, 문밖의 세계는 '국경'보다 먼 거리였다. '문'앞에서 문을 열지 못하는 주저함, '가족' 속에서도 이방 감을 갖던 카프카의 심정은 <귀향>이라는 아주 짧은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카프카 전집4솔
나는 도착했다. 누가 나를 맞아 줄 것인가? 누가 부엌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가?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드는가? 나는 모르겠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나 그것은 따로따로 한 조각씩 차갑게 서 있다..... 내가 그것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것들에게 무엇인가. 나는 감히 부엌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단지 멀찌감치 서 엿듣고 있을 뿐이다.... 문 앞에서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점점 더 낯설어지는 밤이다.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기라도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경제적 도구'로 얼마나 잘 소용되고 '소모' 될 수 있느냐, 즉 '밥벌이'로서의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느냐가 존재가치의 유, 무로 취급되고 증명되는 세상이다. '실존'에 대해 고민하거나 '소모'되는 것에 대해 회의하는 태도는 배부른 심상이거나 루저의 부적응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습관과 의무감으로만 점철된 출근과 회사 업무에서 늘 기계처럼 바쁘고 소모되는 자신을 끊임없이 회의했다. 자신의 취향과 사상과 정반대 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굽실거려야 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많은 곳을 다니지만 정작 '그곳'은 보지 못하고, 그곳의 '밥'과 관련된 사람들만 보고 겪는 '장소성 없는 방문'의 일상에 신물이 났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휴식 없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데, 정작 그 '좀 더 나은 생활'은 요원하다. 집에 있는 가족들마저도 내 그런 희생과 노역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만 받아들이지 누구 하나 진심으로 묻고 위로하는 사람도 없다.    


식구들이나 그레고르나 그것에 습관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식구들은 고맙게 돈을 받고 그는 기꺼이 돈을 대주었지만, 거기에 특별한 온정 같은 것은 두 번 다시없었다. ( 카프카 전집 1 변신 135쪽)   

   

  언젠가부터 나는 여기고 저기고 그저 각자에게 '쓰이는'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걸 회의한다. 그레고르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각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일어나니 나는 '갑충'이 돼 있었다.    

<변신>에는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한 첫날에 벌레가 되고 나서야 '한 번도 안 깨고' 처음으로 편안히 깊이, 잘 잘 수 있었다는 의미심장 하 묘사가 나온다. 그가 모든 '의무감'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바라던 '변신'은 이런 게 아니었지만, 이제 회사원과 장남으로서의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줄 알았던 가정과 가족, 회사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오히려 자기 몫을 찾아서 더 잘살고 있다. 갑충으로의 변신은 지금까지의 세계와 '단절'되는 것이다. 그를 짓누르던 의무감, 책임감 등에서 '해방'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해방과 동시에 갑충이 되기 전보다 더 큰, 또 다른 고독과 고립감에 맞서게 된다. 갑충 전이나 후 어느 쪽에서도 그는 소속감에 실패했고 또 다른 고독과 고립을 맛보게 될 뿐이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냐, '절대 고독'이냐-

‘고독하되 고립하지 말라’는 멋진 말도 있지만, 그는 고독과 고립 양쪽 벽에 갇혔다.    

살다 보면 가장 가까운 존재가 서로를 가장 많이 소외시키는데 직장이나 가족이 그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직장(일)' '가족'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은 그의 생전 일기나 편지에 자주 언급되었다.    


직장은 저를 결코 굴복시킬 수 없고 오직 저를 철저히 파괴시킬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저의 가족들,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저는 이방인보다도 더 서먹서먹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와는 온종일 가야 스무 마디의 이야기도 하지 않고 저의 아버지와는 인사말을 빼놓고는 거의 한 마디도 말도 하지 않습니다. 시집간 저의 누이나 매부들하고는 성을 내기 전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 카프카의 일기(편지 초고)>    
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절대로 지족적일 수 없으며 또한 진실한 것일 수도 없다. < 변신 110쪽>   
아침에 문이 잠겨 있을 때는 모두가 그에게로 들어오려고 하더니, 그가 문 하나를 열어놓고 있는 지금이나 낮에 다른 문들이 열려 있을 때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바깥쪽에 열쇠까지 꽂아놓고 있었다.
< 변신, 129쪽>   


  그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자 가족들의 '진실' 혹은 '진심'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진심을 가지고 희생했던 가족들은 내 '경제적 가치'가 없어지자 '벌레'거나 치워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로 대한다.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는 '살아있는 것'이 그의 '죄'가 되었고, 그 죄를 없앨 수 있는 길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길밖에 없다. 결국,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가족들은 '자살방조'에 묵인하거나 동참한다. 모두의 합의! 하에 죽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손도 아닌, '하녀'의 손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자기 실존의 죄를 사멸하게 된다.    


  '변신'은 비인간적 상황과 모습,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세밀하게 묘사하지만 '감정'이 별로 없이 건조하게 묘사하는데 그래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나 양면성 같은 게 더 사실적이고 무섭게 느껴진다. 카프카의 여러 단편 중 '변신'이 가장 대중적일 건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에 대해서 느끼는 회의, 도구적 존재로서의 비감, 가까운 사이에서 더 크게 느끼는 고독과 갈등 등이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공명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한참 뒤에 읽은 <필경사 바틀비>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환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묘사, 우화적 기법들이 카프카를 떠올리게 했다.    


  휴무 전날은 특히 '잠'자기 싫고, 휴무 다음 날 출근은 일주일 중 몸이 가장 무겁다. 어느 휴무 날은 두 시간 차를 타고, 세 시간 이상 산책을 하고, 다시 두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왔는데도 자기가 싫었다. 그런 날 가끔 아! 나도 일어나면 잠자코 저 그레고리 점자처럼 한 마리 거대한 벌레가 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를 하릴없이 생각해 본 때가 있었다. 1년을 십 년 같이 살던 열심을 버리고 1주일을 5일 같이 살면서 휴무 전날의 불행감이나 무기력이 희미해졌음을 느끼며 내 병은 ‘너무 열심히 살아서’ 생긴 것이고, 내 몸과 마음은 적당히 게으르게 굴리는 것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카프카는 '변신'말고도 인간의 '동물화'나 동물의 '인간화'를 묘사한 작품이 여럿 있는데(원숭이, 단식광대 등), 특히 이 '변신'을 읽으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옛날 영화 'THE FIY'가 생각났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영화화된 게 많은데, 카프카 문학의 난해성 때문에 그런지 카프카를 다룬 영화는 있어도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건 없는 같다. 크로넨버그 감독이라면 이 '변신'을 철학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잘 만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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