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닌 6년 전에 장기/시신 기증신청을하셨다. 나도 그 뜻을 이어받아 4년 전에 기증 신청했다. 혹자는 살 날이 한참 남은 나까지 굳이 그리 미리 해 놓을 건 뭐냐?라고도했지만, 출생도 순서가 뒤바뀌니 죽음은 그 순서를 장담하기더힘든것. 건강할 때 미리 제 삶의 마지막을 준비해 놓는 것도 좋지않은가. 물론 통계나 평균 수명대로라면 내가 어머니보다 훨씬 오래 살 확률이 많겠지만 사는 게 꼭 확률처럼 되지도 않고 통계나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통계 저간의, 평균치 이하의 삶도또 얼마나 많은가?
어머닌 장기 기증 신청 6년 뒤인 2018년 7월 경, 국민연금공단에 직접 가셔서 '사전 연명 의료서'도 접수해놓으셨다. 신청자가 많아서 등록 카드는 해를 넘긴 올해 2019년 3월에서야 받았다.자식들이 그것까지 한 걸 알면 심란할까 봐 혼자 조용히 말없이 가서 처리하고 오신 건데 그 뜻을이해하고 찬성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차후나도 어머니 뜻을 이어받을것이다.
'존엄사'라는 거창한 말을 주억거릴 것 없이 고통스러운 최후의 상황에서 나와 주변이 덜 괴로울 자율적인 죽음을 맞이하자는 단순함에서 출발한 것이다. 심리, 경제적 참사를 최소화하고 출생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죽음이라도 좀 자율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다. 또, 산 사람 누울 땅도없는데 죽은 사람까지 넓은 자리 차지하고 누워 있다는 게 영 면구스럽지 않은가.
이제 '연명의료 거부(존엄사)'에 대한 일종의 '죽음 선택권'이 우리나라에서도 법제화됐다. '웬만해선 죽지 않는 시대'에 의미 있고 반가운 뉴스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 결정이나 가족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연명의료 결정법(존엄사법)'이 시행된 지 1년을 넘겼다. 그동안 연명의료를 거부한 환자가 3만 6천 명, 사전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도 11만 5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시점에 상영된 지 좀 됐지만 '존엄사 청원'을 얘기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이 영화의주제와는다소다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생각났다. 몇 년 사이,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유명 인사들의 자살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자살한 이들 중에는 오랜 고통과 불운으로 누가 봐도 살 이유보다 죽을 이유가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게 널리 알려진 자살자들은 외면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마지않는 조건이었다. 부러워하던그들을향해사람들은무책임하고 이기적이다, 납득가지 않는죽음이라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반면, 무명의 삶들 대게는 죽음마저 무명해서 오래, 많이 회자되는 죽음도 결국은 살아서 영광을 누린 자들의것이다.그러나 어떤 자살이건 그 죽음의 이유와 정도를 본인 말고 누가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외형적으로는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마감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음의자유, 자살권운운하면 이 세상의 많은 윤리주의자와종교주의자들이 쌍수를 들고 날 훈계하리라.
삶을 제 의지대로 살 자유가 있는 것처럼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있어야하지않겠는가.죽음보다 못 한 고통속에 오래, 깊게 처한 이에게 그저 삶의 의무만을 강요하고 무책임한 희망을 주문하는 건 멀쩡히살아낼 수 있는 자들의 이기심과 설교는 아닐지?라고이영화는 묻는다. 그래서 영화속에서 신부나 수녀들이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이튼에게 신의 사랑과 주인공의 인내를 설교하고 설득하려는 장면은 그저 허공속출처 없는 메아리, 코미디 대사 같다. 그 장면을 보면서 "너나 잘하세요!"라는 대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반종교적이고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만 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충분히 신을 원망하고 거부할만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신에 대한 경외와 믿음, 이 세상에 대한 긍정성이나 낙천성을 져 버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등장하는 what a wonderful word 나 smile도 그런 긍정성의 표현일 것이다. 여전히 신을 믿고 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하지만 나 자신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도무지 아름답지 않으니 "제발 나를 고만 죽게 허락해 주세요."라는 절박한 구원 요청이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청원이며 '인간 존엄'이 과연 어떠한 상황, 상태에서도 생명의 의무만 다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자기 생을 스스로 마감한 사람 중,'행복전도사'라불리이가 있었다. 늘 '행복'을 외치고 다녔고, 이 세상은 행복할만한 곳이다라고 쉼 없이 부르짖고 다녀서 자타칭 그렇게 불렀지만 정작 자신은 별반 행복하지 못했는지 남편과 함께 어느 여관에서 동반자살의주검으로 발견됐다. 평소 주야장천 행복과 희망, 인내를 외치고 다니던 그녀의 삶과죽음은 일면위선적이거나모순적이다. 희망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한테는 배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 살아생전에 나는 그녀의 희망, 행복 만능주의가 저어기 불편한 구석이 많았지만 죽고 나니 그녀 평소 언행과 지독히도 상반된 육체의 고통과 결단이 좀 이해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튼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한때 지상 최고의 마술사로 사람들에게 환상과 기쁨을 주는 행복 마술사였다. 그 자신도 사랑과 돈, 어느것하나 부러울 것 없는 빛 속에서만 살았지만 마술 도중 불의의 사고로 얼굴을 제외한 전신마비 불구가 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 곁에서 고통 동행을 하는 게 괴롭다. 어머니도 오랜 친구들도 다 보내고 간호사를 비롯한 최소의 인원만으로 대저택에서 산다. 자신이 똥오줌 싸고 있는 것도 느낄수 없는 처지가 되어 의료기구와 약물로 하루하루 생명을 연명해온 지 어언 14년이다. 현재 그의 불행은 역설적으로 많은 장애인과 불행자들의 희망이자 귀감이다. 그는역설의희망에어퍼컷을날리며 이렇게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국가에 안락사허가 청원을 한다.
"나는 나의 삶을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의 죽음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튼의 안락사 청원에 큰 상처와 배신감에 젖지만, 그의오랜 고통에 깊이 통감해 안락사 청원과 변론에 동참한다.고통스럽지 않은 자신들의 상처와 죄책감보다는 지독한 고통에 처한 자의 막다른 선택을 아프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튼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에 자신의 청원을 찬반 투표에 부친다. 처음엔 그의 청원을 배신, 위선자, 반종교적이라 비난하던 여론이 차츰 그의 상황과 심정에 공감과 지지를 보낸다. 이튼은 여론 형성으로 법원을 압박하지만 종교계 눈치 보기, 오랜 관습 깨기, 법 제정 후의 차후 부작용을 두려워한 법원은 이 청원을 기각한다.
이튼의 직업이 마술 사였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과거에 신기에 가까운 마술로 못 하는 게 없었고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삶을 살았지만, 현재의 그에겐 마술대신 연명의 심술만 남았다. 신묘한 마술은커녕 약물과 의료보조기구를 빼면 코 위에 앉은 파리조차 쫓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를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들에게서 자신의 안락사에 대한 동의와 도움을 이끌어 내고 마지막 순간을 축제처럼 함께 보내는 장면이 내겐 이튼의 새로운, 마지막 마술 같았다.
이튼의 어머니가법원 청원 장면에서 풀샷으로 클로즈업되면서하는말이있다.짧은 분량이지만 절제된 감정선과 임팩트 있는 대사로 이 영화 주제를 잘 대변한다.
이튼의 어머니는 판사에게 묻는다.
"이튼의 생명은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그의 생명을 낳았으니 어머니인 내 것입니까, 아니면 하루도 쉬지 않고 14년이란 세월 동안 그를 간호해준 소피아의 것입니까, 이런 청원서를 내주고 싸워주는 데비아니의 것입니까, 또 이 청원을 결정할 판사님 것입니까? 이튼의 생명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이튼 개인의 것입니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칼라감, 확실하고 단일한 주제, 단순한 드라마 전개, 불행한 상황에서의웃음과긍정성, 신에 대한 수긍과 경외 , 과잉과 신파는 인도영화의 특질들을 잘 보여준다. 요즘 영화 주제나 주인공 캐릭터가 시대상에 맞춰복합다단해지는데복잡한거싫어하는단순감동파 관객들도 편안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표현한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인데 한마디로 '술수'가 별로 없는 정직한 영화다. 영화가 나온 지 8년 된 지금, 인도에선 이튼의 청원이 허락됐는지모르겠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도 법적 가족이 있어야 돼!
'연명의료 결정법'으로이제우리도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고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이 최소화된 것은 반길만한 것이나 아직 개선해야 될 점이 좀 있다. 두 가지 정도만 짚어보고 싶다.
먼저 '사전 연명 의료서'를 신청한 자에 대한 결과 통보, 확인증 발급 같은 게 잘 안된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생각보다 많은 신청자 접수로 '접수 완료, 확인'의 통보가 지연되는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신청자의 별도 요구가 없으면 접수 확인증을 안 주고 확인증 수령도 등기가 아닌 일반우편으로 발송하는건 이해가 잘안 된다. 우체통에 그냥 꽂아 놓고 가면 되는 일반 우편은 오배송, 분실의 문제가 있고 그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다. 세금 고지서 배부도 아니고 한 인간의 '죽음'에 관한 정보다. '등기비는 예산문제로...' 운운하는 건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오래 살고 헌신하다 고통에지쳐이땅을떠나고자하는,한 인간의 마지막 선택에 대한 국가의 인사 치고는 너무하지 않은가. 또,주민번호와 '연명의료' '장기기증' 등이 기재된 카드 내용은 일반 우편 사고나 개인 정보 유출과 달리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너무 앞서 나간 걱정일까?
두 번째는 이 '자기 죽음의 결정권' 조차 한국식 '호적 등재 가족' 중심의 법제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독거노인,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 호적상 부부는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의 부부에 대한 자기 의사 결정권은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이들이야말로 기나긴 고통을 가장 먼저, 빨리 끝내고 싶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이라도 자기 삶의 주인이 돼야 하지 않을까? 비혼, 만혼, 이혼, 무자녀 부부 등의세태를 반영해 앞으로의 복지 제도가 가족 중심이 아닌 개인, 1인 중심이 돼야 하는 것처럼 존엄사 결정권도 1인, 개인 중심이 돼야 할 것이다. 아니 존엄사 결정이야 말로 더욱더!
영화 속에서 이튼과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로'what a wonderful word'가자주나온다.약물과법적연명만남은생존이아닌,추억의시간으로마감하고가져가고싶은간절한청원의노래, 해방의 노래 같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조차 '법적 가족의 유무'로 차별받지 않는 'wonderful word'가 되기를 바라며 노래로 감상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