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은 가장 익숙하고 오래된 광고물이다. 우리가 어떤 회사나 매장을 잘 모르고서도 그곳이 어떤 상품과 품목을 파는지 알 수 있는 것도 간판을 통해서다. <김밥천국> <버르장머리> <목터져노래방> <몸부림모텔>등은 상품의 정체성이 단박에 드러난 좋은 예다. <김밥천국>이나 가위가 그려진 <버르장머리>처럼 간판만 보고도 그곳의 업종을 알 수 있는 직설의 광고도 있지만, 간판만으로는 그곳에서 파는 상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름도 많다.
우리가 흔히 ‘별다방’이라고 얘기하고 원두커피를 즐기는 이라면 최소 몇 번은 갔을 <스타벅스>만 해도 그렇다. 이미 브랜드 자체가 광고인 그 매장은 이제는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그곳이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걸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집에서 봉지 커피믹스만 주로 마시는 시골 할매들한테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스타벅스>를 물으면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스타벅스가 글로벌 커피 매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그 브랜드명의 유래까지 아는 이는 의외로 적을 것이다. 스타벅은 하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커피 좋아하는 일등 항해사 이름이라는데 나 같이 아직 모비딕을 읽지 않은 사람과, 읽었더라도 그 스타벅을 연상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간판 명인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다국적 커피점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곳의 맛이 ‘간판값’ 보다 못하다는 소리도 많다. 우리가 흔히 외모와 학벌, 직업 같은 어떤 외형적 조건이 좋은 사람을 ‘그 사람은 간판이 좋아’라고 얘기하고 그 조건, 명성에 못 미치는 행동이나 실력을 보일 때 ‘그 사람은 간판값을 참 못해. 간판이 아깝다!’라는 비하를 한다. 반면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외형적 조건이 안 좋으면 ‘그 사람은 실력은 좋은데 간판이 안 좋아서…….’라는 말도 한다. 간판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오죽하면 개업하면 ‘간판을 걸었다’라고 하고, 폐업하면 ‘간판을 내렸다’라고 하겠는가. 이때의 간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라거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라는 뜻도 되는 것이다.
나는 간판에서 시대상과 그 시대의 언어, 정신을 읽기도 해서 가끔 간판 읽는 재미로 소일하기도 한다. 일명 ‘간판 여행’이다. 동네 골목, 여행지 도심과 한갓진 시골 구멍가게 간판들에서 그 주인장의 어떤 성격, 생활 철학 같은 것이 엿보이는 것이다. 블로그 등 개인 홈페이지의 주인장 아이디나 전자 메일 주소 명도 그의 어떤 염원이나 욕망, 혹은 상실을 드러내는 간판이지만 상가 간판엔 그런 게 좀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서 흥미로운 여행지다. 내가 간판 이야기를 제법 길게 주절거리는 것은 간판에 관한 아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꼽아 보니 벌써 20년 년 전 이야기구나!
카롤린 봉글랑, 열린책들, 1994
(지금은 절판된 표지)
밑줄 긋는 여자가 IMF를 만났을 때
20년 전, 동생과 나는 내가 사는 도시의 국립대학교 뒷골목에서 카페를 했다. 앞서 다른 곳에서 동종업을 한 경험이 있고 장사 수완이 좋은 동생은 메뉴와 홍보, 영업에 주력하고 늦게 합류한 나는 금전 관리, 매장 인테리어, BGM 같은 걸 맡았다. 기존에 장사하던 곳을 인수했는데 가게 한쪽 벽면에는 칸막이가 쳐진 붙박이 나무 장식장이 있었다. 빈 술병 몇 개와 액자가 대충 얹어져 있었고 비워진 선반도 많아 공간 이용이 무성의해 보였다. 면적이 제법 넓어 뜯고 새로 뭐를 만들기엔 시간과 돈이 많이 들겠고 그냥 놔두고 쓰기엔 모호한 구조였다. 책장으로 꾸며 북카페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 좋을 것 같았다. 집에 있던 내 책을 가져오면 추가 비용도 별로 들지 않고 이 인근에는 없는 색다른 카페가 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요즘 유행하는 그런 북카페인데 밥과 술까지 팔았으니 내 식견이 한참 앞섰구나!
가게의 전체적인 배열을 정하고 간판 작명에 고심했다. 당시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를 재미있게 읽던 나는 그 이름에 꽂혔다. 우리가 여자니 <밑줄 긋는 여자>가 좋겠다고 했다. 동생은 '밑줄 긋는'이 계속 걸린다고 했다. '외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장사) 공친다'라는 뉘앙스가 물씬한데, 게다가 밑줄 긋는 '여자'라니……. 괜히 간판 이름대로 가게 운이 따라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나는 가게도 북카페 분위기니 간판명이랑 잘 어울리지 않냐, 봉 여사의 서평 기사를 메뉴판 한쪽에 붙여 책과 함께 테이블마다 두자, 음식 대기 시간에 읽게 하면 문화 서비스와 함께 자연스러운 마케팅으로 이어진다고 회유했다. 나처럼 사소한 일에 목숨 안 걸지만, 귀는 얇은 동생은 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사진-픽사베이
처음엔 인근 카페와 다른 분위기, 독특한 간판명과 ‘라면+커피(음료) 세트’를 비롯한 여타 경쟁가게에 없는 다양한 메뉴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가게 위치가 도로가 아닌 뒷골목이라는 지리적 불리함에 주변 점포의 영업정지, 매출 부진으로 인한 휴업과 폐업이 늘면서 상가가 죽고 고객 유입도 점점 줄었다. 또 가게를 얻을 때 ‘국립대학’이란 학교의 특수성을 인지 못 했던 시장조사의 실패도 있었다. 이전에 하던 가게도 대학가 근처였지만 정류장 바로 앞이라는 입지 조건이 좋았고 금수저 자제들이 많은 예체능 대학이라 학생들 씀씀이가 좋았다. 돈까스 정식에 나오는 디저트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양이 적으면 돈을 추가로 내고 다른 것을 시켰다. 시험 기간이나 방학도 별로 타지 않았다. 수업이 있거나 없거나 카페에 몰려와서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 국립대학의 학생들은 시험 기간이 되면 포차 붕어빵 장사도 덜 된다는 것은 장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 짱 박혀 있고 비시험 기간엔 과외를 하고, 방학엔 본가에 갔다. 소도시, 시골에서 온 지방 유학생들은 방학하면 다 본가로 간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원룸도 없어서 지방 학생들은 기숙사 아니면 개인 민가에서 하숙했다. 등록금 싼 국립대학 학생들이라고 다 가난한 집 딸, 아들만 다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또래는 씀씀이나 문화 분위기도 다 친구 따라가는데 국립대 학생들은 사립대 예체능대 학생들보다는 확실히 알뜰한 소비를 했다. 사립 예체능대 학생들은 맥주 500cc 호프와 당시엔 고급진 메뉴였던 피자 같은 안주도 곧잘 시켰는데 국립대 학생들은 소주 1병에 싸고 양 많은 오뎅탕을 시켜 물 부어 가며 오래, 나눠 먹었다. 부모들에겐 참한 학생이었으나 장사치에게는 참하지 않은 고객이었다.
안 되는 이유가 나날이 늘어나는 동안 월세와 전기세 등의 관리비가 몇 달씩 밀리다 월세가 밀렸고 급기야 보증금에서 월세를 까먹는 사태가 왔다. 몇 명이 되던 알바를 다 내보내고 둘이 하는데도 수지가 안 맞았다. 지나가던 개도 알아 들었다는 IMF였다. 우리 집 가정 경제는 오래도록 늘 IMF적 위기에 있어서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도 심각하게 체감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증금이 월세로 다 대체되고 원금보다 큰 카드빚을 떠안고 문을 닫게 됐을 때 IMF가 비로소 실감되었다. 결국, 동생의 우려대로 ‘밑줄만 긋다’ 가게를 접었다. IMF는 대한민국 경제 전반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지만 ‘마시고 입고’에 해당하는 외식, 의류업은 가장 빨리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2시의 데이트> 최장수 DJ, 김기덕
당시 <두시의 데이트>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애청자 사연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시절이 그럴 때라 ‘힘들어서 못 살겠다’라는 내용이 태반이었는데 그 사연 중 꼭 우리 상황 같은 내용이 있어서 웃다가 울 뻔해서 오래도록 기억한다. 우리와 비슷한 업종인 커피숍 주인이었는데 IMF를 맞고 나서 하루하루가 버는 돈보다 내야 할 돈, 갚아야 할 빚이 더 늘어나더란다. 세금 내기도 힘들어 에어컨도 꺼 놨다가 손님 들어오면 키곤 했단다. 그런 날이 계속되니 우울감과 낙담만 늘었고 어느 날 손님이 들어왔는데 “어서오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어떻게 오셨어요?”란 말이 튀어나오더라는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손님은 “야이~ 이 주인장아, 찻집에 차 마시러 왔지. 왜 왔겠소? 이 집 왜 이렇게 더워, 거 에어컨 좀 켜 보소” 했다는 내용이다. 손님 구경을 하도 못하다 보니 “어서오세요”란 인사도 깜박했다는 웃기고 슬픈 사연이었다.
사글세살이도 오래 했고 학교 공락금은 항상 젤 늦게 냈지만 큰 빚 없이 근근이 살던 우리는 장사 몇 년 만에 카드 돌려막기, 신용 불량……같은 사회면 뉴스에 나오는 그런 빚쟁이가 되어 있었다. 온 식구가 매달려 그 빚을 갚는데 근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던 것 같다. 갚을 땐 정신도, 여력도 없어서 몰랐는데 다 갚고 계산해보니 그 돈이 어마어마했다. ‘갚은 돈을 보니 그동안 없어서 돈 못 모았다는 게 거짓말이었나! 이렇게 갚을 수 있는 돈이라면 왜 구경 한 번 못했을까?’라는 서러움과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내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같았다. 갚는 정신으로 모으지 못한 불찰이었다.
지금도 엄마나 동생은 "세상에!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짓는 데가 어딨노? 결국, 이름처럼 됐다 아이가?"라며 내 작명 센스에 혀를 끌끌 찬다. 실지로 그 책을 읽은 소수 고객, 젊은 학생층에선 신선하다는 반응도 있었으나 아재들은 간판 이름을 갖고 웃기지도 않은 농이나 시비를 걸곤 했다.
“여 간판 이름이 ‘밑줄 긋는 여자’ 란다. 뭐 시켜 먹고 밑줄 긋고 돈 안 내고 가도 되는교? 흐흐. ”
그때의 여러 가지 정황상 꼭 간판명 때문에 그리된 것은 아니지만 작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예화가 가까운 데 또 있었으니…….
영화 <가을의 전설>
전설처럼 문 닫은 <가을의 전설>
그때 우리 가게 아래층 지하에는 당시 유행하던 소주 칵테일 가게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오픈했다. 20대 친구 둘이 하고 있었는데 몇 달 있다 보니 영업을 하지 않았다. 어린 친구 둘은 장사 이견으로 자주 다퉜고 장사도 안되던 차에 미성년자 단속에 걸려 '영업정지'가 되면서 이 차 저 차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그 가게 이름은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영화 제목을 딴 <가을의 전설>이었다. 결국, 그 건물 지하 가게는 영업 몇 달 만에 ‘전설’처럼 사라졌고 그 건물 2층은‘밑줄 긋다가’ 보증금 다 날리고 나온 것이다. 이름대로!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 영감의 예언은 틀렸다. 지구나 인류는 건재했고 내가, 우리 집이 망했으니까.
짧고 강렬한 생-마릴린 먼로
가수들은 노래 제목이나 가사 내용 따라 인생이 따라간다고 하던데 범인(凡人)들의 일생도 예외는 아닌가 싶다. 동생은 나와 함께 국립대 앞에서 ‘밑줄을 긋기’ 전에 사립대 앞에서 카페를 했다.
'화려하게, 짧고 굵게, 정열적 사랑'이 인생 모토인 동생답게 가게 이름도 <마릴린 먼로>였다. 물론 간판엔 먼로 얼굴도 크게 그려 넣었다.
유동성 인구가 많은 좋은 터에 현금결제 시대였고 부잣집 자제들이 많이 오는 예체능 대라 그런지 학생들 씀씀이도 좋아 장사가 잘됐다. 투자금도 다 뽑고 집 마련에도 큰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하려던 찰나 가게 월세가 무섭게 올랐고 IMF가 왔다. 마린린 먼로의 삶처럼 짧고 굵게 재미를 봤다. 근근이 손해만 면한 채 임대 계약이 끝났고 세가 좀 싼 국립대 상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합류했고 양식과 칵테일 제조법을 직접 배워 주방과 바 인건비를 줄이고 홀 서빙 아르바이트도 최소화하는 긴축 경영이란 것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차린 곳이 <밑줄 긋는 여자>였던 것이다. 경증의 문자 애호증과 이런 일련의 사연들이 합쳐져 간판 이름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일까?
인생 부동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수년 전 전주 한옥 마을에 갔을 때 아주 인상적인 간판을 하나 보았다. 사철 인파가 넘치는 한옥마을 중심가에 있는데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한 편의 드라마가 연상되는 인생 샷이 나오는 건물이 하나 있다. 건물 외양은 볼품도 없고 허름하다. 흔한 기와지붕 아래로 조립식 패널 벽과 시멘트 벽이 부조화하게 합체된 몸체다. 왼쪽 조립식 벽면엔 철제 새시문이, 오른쪽 시멘트 벽면엔 낡은 나무 미닫이문이 달려 있다. 게다가 미닫이문 위쪽은 일부 깨져 있고 양쪽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낡은 짐들은 폐업한 지 오래된 가게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볼품없고 허름한 가게 앞에서 찍는 게 무슨 드라마샷, 인생 샷이냐고?
이 건물 간판은 <인생 부동산>이다. ‘부동산’이란 간판만 떼면 동네 작은 슈퍼인지 그냥 가정집인지 모를 정도로 평범한 외양인데 오로지 이 간판명 때문에 비범한 건물이 돼 버리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꼭 그 부동산에 ‘내 인생’을 내놓으러 온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드는 것이다.
‘내 인생 내놓습니다. 매매, 전세 다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자기 인생을 내놓고 싶을 때가 한 번도 없었는가? 사람 인생도 매매가 되는 부동산 같은 게 있다면 나(당신) 인생은 사글세, 전세, 매매 어디에 내놓고 싶은가? 사람 인생도 매매나 대여가 되는 부동산이 있다면 팔고 지금과 다른 새뜻한 인생을 살거나 다른 인생을 사고 싶지 않겠나? 그런 게 가능한 거래소 같은 게 있다 해도 은행처럼 어떤 담보 조건이 붙을지 모른다. 영혼을 팔라거나 그림자를 팔라거나 장기를 팔라거나……
음악은 그때 내 선곡 중 하나인 <닭대가리> 동생은 이런 음악도 손님 쫓는 폐업의 요인 중 하나라 말했다.
덧) 글 작성자의 무능과 부족으로 대학에 대한 일부 묘사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댓글로 대답했지만 댓글을 건너뛰는 분들도 계실 테니 여기 다시 말을 붙입니다.
글 중에 나오는 국립, 사립대에 대한 묘사는 특정 학교들에 대한 비교나 비하가 아닌, 간판 단상과 필자 과거사의 복기 가운데 나온 극히 단편적 묘사입니다.
"20년 전"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국립대라고 다 가난한 학생들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또래는 씀씀이나 문화가 다 친구 따라간다"라는 부연도 있지만 읽는 이의 입장과 사고에 따라 부정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며 앞으로 어떤 계층, 시대상이 나오는 이야기는 개인사를 기술할 때도 좀 더 신경 쓰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