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슬픈 시옷들
사약 같이 진하게 탄 커피를 잔이 넘치게 두 잔을 마신 뒤 진통제 한 알, 한방(韓方)약 한 봉지를 차례로 먹었다. 노독의 몸살에 종일 시달리며 자지도 깨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 가위눌린 것처럼 해롱거리다 커피, 약, 지는 해로 겨우 기운을 차렸다. 기운을 차리지 말고 약에 취해 그대로 잘까 하다가 쉬는 날 종일 커피와 약 속에 취해 있다 일하기 위해 잠을 자려는 노력이 무언가 억울해 다시 일어났다.
작년에 통독 후 다시 한번 정독으로 재독 하자고 시도한 후 마무리하지 못 한 책 속에는 마침 '노동'에 관한 이런 글이 나온다.
유한계급과 같은 특성으로 나타나는 그의 외양은 노동 분업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또한 부지런함에 대한 저항이다. 1840년경에 파사주에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재빨리 유행이 되었다. (....) 그의 평정심은 상품 생산의 속도에 대한 의식적 저항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램 질로크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김영민, <집중과 영혼> 중에서ㅡ
언젠가부터 문득 '삶'은 '섦'이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 사람의 일생이라면 섦은 삶의 서러움 같은 것. '섦'이란 말이 있는지, 문법적으로 타당한지도 모르면서 그냥 떠 오른 말이다.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제 자신을 잃고 버리며 살아내는 '서러움'의 또 다른 말 같고 장사익의 노래 <섬> 같은 것이라 서러움과 섬이 뒤섞인 말속에서 불현듯 '섦'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생각을 이어서 이 글을 쓰다가 과연 '섦'이란 말이 있기나 한지 국어사전 검색을 해 보았다. 있었다. 내가 생각한 섦과 비슷한 뜻도, 좀 다른 뜻도 있었지만 '섦'이란 말이 있었다.
'섦' : 낯설다, 익숙하지 않다는 뜻의 '설다'의 명사형. ‘ㄹ’ 받침인 용언의 어간 뒤에 붙어, 그 말이 명사 구실을 하게 하는 어미는 ‘-ㅁ’입니다. ‘설다’의 어간 ‘설-’ 뒤에 명사형 어미 ‘-ㅁ’이 붙으면 ‘섦’과 같이 적게 됩니다.
그래, 삶은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섦이고 빈틈 많고 모자라고 서투른 섦이다. '설다'에는 낯 섬의 뜻 외에 '서럽다'를 잘 못 쓴 '섧다'의 '설다'도 있고 밥이나 과일이 '설익었다'라고 할 때의 '설다'도 있고 '선 잠을 잤다'라고 할 때의 '설다'도 있다. '섦'이나 '설다'의 뜻이 제각각이지만 그 내용의 큰 얼게는 오래 보고 공들인다고 쉬이 적응되거나 익는 것은 아니라는 공통된 뜻이 들어있구나. 마치 삶처럼.
그렇게 저렇게 삶을 섦으로 만드는 것 중에는 '노동'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스쳐 들은 뉴스 가운데 정부에서 '근로'를 '노동'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저 말 하나 바꾸는 것보다는 내용의 알짬이 바뀌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말하나 마나이지만 단순해 보이는 단어 하나의 선택과 사용에 시대사 반영과 변천은 물론 사람과 일에 대한 단어 사용자의 근본 인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노동자'라고 하면 푸른 근무복을 입고 주로 공장에서 험하고 힘든 일을 (서서) 하는 생산직 노동자, '근로자'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근무자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공장에서 일해 본 적도 없고 '노동조합'이 있는 밥벌이를 한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예전부터 근로, 근로자라는 단어가 좀 가식적으로 들렸고 노동, 노동자라는 말이 좀 더 편하고 솔직하게 들렸다.
근로(勤勞): 부지런히 일함.
노동(勞動):
1.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2. 몸을 움직여 일을 함
'부지런히 일함'? 해석상으론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꾸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왜?'라는 반발심이 들고 이 말을 하는 자와 따르는 자의 논리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마당 쓰는 하인에게 뒷 짐 진 주인이 다가와 '(좀 더) 부지런해야 한다'라고 닦달하는 것 같고 '부지런한 국민'을 채근하며 근면 성실을 맹목적 기계적으로 국훈으로 제창하게 하는 국가의 세뇌와 훈계로 들리는 것이다.
반면 '노동'은 좀 솔직하다. 근로가 열심히 일 하는 자의 주체나 목적이 모호하다면 노동은 노동의 주체와 목적이 확실하다. '먹고살기 위해' '심신'을 부린다고 좀 더 선명하게 나와 있는 것이다.
내 몸과 노동은 내 입(말)이나 마음보다 언제나 과도하게 정직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그럴싸한 말, 언제 변할지 모르는 마음은 그 진실을 장담할 수 없지만 노동은 항상 정직했다. 하루를 쉬면 이틀 치의 일이 밀렸으며 꾀부리는 누가 있으면 그 몫을 다른 누가 감당해야 했으며 한 달을 쉬면 통장은 몇 달이 힘들어지곤 했다.
지금껏 살면서 IMF 때 한 6개월 정도, 퇴직과 휴직으로 한 6개월 정도, 다리 부상으로 한 6개월, 이런저런 가게를 열고 옮기고 접는 과정에서 한 두 달씩 쉰 걸 빼면 참 지긋지긋할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며 일 속에 살았는데 '노동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확실히 느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하루, 한 달, 일 년의 제 입 건사하는데 전전긍긍 열혈 봉사하느라 그런 걸 느낄 사이, 여유도 없이 제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고 몰아붙이며 무미건조하게 긴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도 긴 시간을 여전히 그렇게 살 것이다.
죽도록 일하다가는 진짜 죽는다는 장시간 노동 혹사에 대한 어느 기사도 있었지만 죽도록 일하지 않고서는 제 입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것이 가진 것이라곤 가난한 입과 정직한 두 손 밖에 없는 자들의 삶이다. 자수성가(自手成家)란 외국어 같은 말도 있지만 아직 성가(成家)를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성가 할 가망성이 거의 없는 자수(自手) 자로 머무는 자들의 삶 혹은 운명이다.
나는 한 번도 어떤 성가를 이루고 싶다는 시시한 야망 한 번 가진 적 없이 근근이 열심히 살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열심히'가 너무 피로하고 지긋지긋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근로나 노동은 그 비슷한 말이 노무, 작업, 노작, 노고, 노동, 근무...로 여럿 있는데 그 반대말은 오직 '휴식' 하나였다. 또 휴식의 비슷한 말은 '수면'이었다. 노동과 휴식의 불균형한 삶이 사전 속에도 드러나 있고 인간은 '잠'들지 않는 이상 일해야 된다는 준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섬찟했다. 노동의 비슷한 말은 그렇게나 많이 찾아내면서 노동의 반대말은 단 하나밖에 찾지 못한 (국어) 사전 제작자 또한 무서운 일중독자나 일 예찬자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를 젊음에서 멀어질수록 몸으로 먼저 깨닫는다. 어릴 땐 입으로 마음으로 장담하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 몸으로 체감되는구나!
김영민, 소로우, 법정 등의 고매하고 맑은 삶과 영혼들을 존경하고 독애하다가도 '쳇! 나도 남이 주는 더럽고 힘든 밥에 매이지 않고 숲 속에서 고고히 살며 산책이나 하고 좋은 글 읽고 보기 싫은 것들 안 보고 살면 내 입과 삶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거야'라는 근거 없는 시기심도 부려 보는 것이다.
<집중과 영혼>의 재독은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다. 집중과 영혼을 놓아야 노동의 이 피폐함을 엄살떨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무책임한 변명을 대면서. <집중과 영혼>은 '밥'을 위한 고된 일 속에서는 도저히, 도무지 사이좋게 양립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현실은 절절히 자문자답한다.
'사람'을 사람, 사람 빨리 읽으면 '삶' 같게도 들리고 '쌀' 같기도 하다. 사람이 먹는 쌀은 사람의 삶을 자주 서럽게 하지 않던가. 또, 사람이라는 글자로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그리다 보면 '섦'이라는 그림 같은 글자가 나오기도 한다. '서러움'을 빨리 말하면 '설움'이 되다 '섦'이 되고 그렇게 서러운 이들끼리 손을 잡으면 사람이 되다가 손을 놓고 홀로 있으면 '섬'이 되는 것이다.
쌀, 삶, 사람, 섦움.... 슬픈 시옷 글자들이다!
덧)
<섬>
순대속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 개 섬이다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
ㅡ장사익 1집 [하늘 가는 길]. 작사 신배승. 작곡/노래 장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