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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죽을 거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었으면 좋겠네

by 보는 사람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예순여덟'이라는 저자가 소녀 시절부터 글쓰기, 소설(가)에 대한 열망을 오래 품고 있었으며 이런저런 생활의 부침 속에서도 글을 놓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제목은 저자의 그런 마음, 과정을 짧고 강하게 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제목은 왠지 저자가 아닌 편집자가 지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판매, 이윤을 생각해야 되는 출판사에서 요즘 선호하는 제목이 극적이고 도발적인 문장형 제목 같다. 제목은 저자, 작가보다는 출판사에 결정권이 더 있다고 들었지만 나라면 영 부담스러워했을 어투다. 감정의 최고치, 극단을 표현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나를 돌이켜 볼 때 어떤 일, 감정에 대해 '죽고 싶은' 정도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없었다는 자기 검열 때문이다. 걷고 읽고 쓰고 보고를 좋아하지만 다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정도의 열렬함은 아니다. 말 없는 좋은 동무들, 숨구멍 정도가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뭘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대상, 감정보다는 오히려 하기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경우는 좀 있었던 것 같다. 감정의 과잉이 많았던 1, 20대 때는 사는 게 죽을 거 같이 싫을 때가 많았고 나이 먹으면서는 밥벌이, 돈 버는 일이 죽을 거 같이 싫을 때도 있었다. 집이 죽을 거 같이 싫을 때도 있었다. 하기 싫은 게 죽을 거 같은 상태에선 하기 싫은 게 제거되는 게 급선무지 하고 싶은 거는 스며들 틈도 없으니까. 죽을 거같이 싫은 것들과 죽을 때까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게 삶인가 싶다.


요즘 에세이에선 보기 드문 글의 유장함, 말의 리듬이 살아있다. 혼자만의 심리, 생각을 설명하거나 읊는 근간의 산문과 달리 묘사가 뛰어나고 근현대 사극에서 느꼈던 생동감 있는 대화체가 읽는 입과 귀에 착 감긴다. 페이지 곳곳에서 문학에 대한 깊은 열망으로 오랜 세월 읽고 쓴 저자의 내공이 잘 느껴진다. 저자는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즐기는 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도 저자가 식당, 택시, 고향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 대화의 기록들이다. 문어체로 주로 쓰는 전업 글쟁이들과 다른 현장감, 생동감의 배경인가 싶다. 나는 택시 기사와 얘기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데 저자와 택시 기사와의 대화에서 등장한 '배고픈 다리'는 내가 지금껏 들은 다리 이름 중 두 번째로 아름답고 슬픈 다리다. 첫 번째 다리는 '헤어지기 싫은 다리'다. 어느 책에서 그 단어를 읽고 좀처럼 부화뇌동하지 않는 나도 그 다리가 있는 곳을 여행지로 겸사겸사 낙점해 간 일도 있었다. '배고픈 다리'는 굳이 안 봐도 알 것 같다. 도시에서 오래 산 내 연배의 중년들에게도 벌써 옛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때 묻지 않은 자연 풍경, 잘 만든 근현대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풍경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글들이 옛날 라디오 드라마, 입말 좋은 소설처럼 이어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별이 콧등을 찧을 것 같은 아름다움 밤은 날마다 이어졌다.... 별은 먼 곳의 소식을 되쏘아줄 것처럼 깜박거리고, 은하수는 그대로 내려와 우리를 덮어버릴 듯했다. (259쪽)
(허연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아 할머니 같다고 티끌 잡는 친구에게,)
"이것이 인생인 줄은 모르겠다만, 겉모습만 바꾸면 뭐하겠냐. 거울 보고 내 시점도 모를까 봐 그대로 둔다."(233쪽)



어떤 계기로 어떤 장면이 문득 기억날 때 이제 더는 '상처'가 아닌데도 수십 년 전의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책에는 똑똑하고 멋진 20대 여성이 '아버지가 없다'라는 이유로 연애하던 남자의 집에서 모욕당하고 터부시 되는 이야기가 두어 편 나온다. 나도 결혼 반대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었다. 지금 30년도 훨씬 더 넘은 오랜 죽마지우와 내가 처음 만났던 14살 무렵이다. 나는 아마 반에서 가장 가난한 애 중 한 명이었고 친구는 어머니가 육성회장인가 임원이었던 가장 잘 사는 딸 중 한 명이었다. 계급과 성격의 극단을 넘어 절친이 된 우리는 방 많고 먹을 게 많은 그 친구네 집에서 주로 놀았다. 어머님은 자주 뵀지만 아버님은 처음 뵙는 식사 자리였다. 아버님은 조카가 데리고 온 처자가 아버지가 없어서 집안에서 결혼 반대를 한다는 얘기를 하셨다. 친구 어머님과 친구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내 앞에서 난감해했고 내 사정을 모르는 아버님은 "아버지 없는 게 가 잘못 이가? 고만 좀 하소!"라는 어머님의 제지가 있기 전까지 '아버지 없는 자식 결혼 불가'에 대해서 계속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도 놓지도 못한 체 불편한 마음과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이 뒤에도 비슷한 일을 성인이 될 동안 더 겪었고 훗날 직장 선배 언니는 '이혼'한 사실을 퇴직하기 전까지 십몇 년 동안 숨기는 것도 보았다. 이혼은 그 선배의 동창과 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대한민국은 '아비' 없고 '남편' 없는 여자들은 그 자체로 '결함'의 낙인을 찍는 사회다. 그때보다 더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의 과부들은 누가 신랑 어디 갔냐고 물으면 미국이나 중동에 돈 벌러 갔다고 둘러대는 이들도 흔했다. 그나마 아비 없는 아들, 이혼남은 아비 없는 딸이나 이혼녀, 과부보다는 편견에 덜 시달린다. 이 책 서문 끝에는 <만약 이 책으로 내가 인세를 얻게 된다면 혼자서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바치고 싶다>라는 말이 나온다. 혼자서 아기를 키워 본 사람, 그런 사람 옆에서 오래 살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머리말이다.

요즘 한두 챕터씩 새로 읽고 있는 책에는 '자기 얘기가 없는 글의 허술함'에 관한 글이 나온다. 이론과 간접 경험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경험, 공부 하나 없이 어디서 읽은 얘기, 들은 얘기만 하고 내게 체화되지 못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머릿속 글의 한계를 지적한다.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의 가장 큰 덕목은 생동감 있는 문장의 형식 안에 든 경험과 체험에서 나온 진실성일 것이다. 진실하다고 모든 걸 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듯이 이 책의 몇몇 이야기는 시대와 나보다 한참 더 산 어른의 연배에서 온 한계로 이해는 하면서도 내가 마주했으면 불편했을 그런 이야기도 있다. 아는, 가까운 사이에서의 온정과 인정, 박애심이 깃든 관심과 말이지만 그 당사자에겐 불편한 질문과 훈수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는 입장에서다. '연희야 연희야' '흰니' '그 아이'의 몇 장면에서 그런 불편함을 느꼈지만 다른 독자들은 그냥 따뜻한 장면으로 좋게 느끼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달라진 시대상에 따라 부모, 친척 어른들이 '명절에 삼가야 할 질문'과 비슷한 맥락.

자기 얘기 없는 글의 불완전성에 대한 글이 나온 책에는 '글쓰기의 동기'를 세분화한 대목이 열 가지 정도 나온다. 그 동기 중 원초적이지만 하수의 동기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종류의 결핍으로부터 자극되어 이를 대리 보상하려는 욕망'과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하고 정리하거나 의미 자리를 부여하려는 동기'다. 그런데 <쓰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의 저자를 비롯해 아마 대부분이 저 두 가지 동기로 글을 쓰지 않을까. 글을 읽으며 저자는 이 책을 냄으로써 그 두 가지 동기는 어느 정도 보상되지 않았을까 싶고 그랬으면 좋겠다.

유려한 문장과 뛰어난 묘사, 한국 근현대사가 드라마처럼 녹아 있는 여러 장점이 있었지만 글 분량의 안배가 일정하지 않은 건 다소 아쉬웠다. 글 꼭지 당 5장 이상 되는 이야기도 있고 1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다. 스마트 폰으로 장사하는 틈틈이 SNS에 쓴 환경의 단점인가 짐작해 본다. 이 부분은 편집자가 체크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자의 글 원문을 최대한 보존해주려는 생각이었나 싶기도 하다. 다음에 책을 또 낼 때는 한 꼭지당 글의 길이가 좀 일정하면 글 전체의 흐름이나 읽는 호흡이 더 좋아질 것 같다.


북한 인민군 출신으로 30년 징역을 산 서옥렬 무기수의 이야기인 '서옥렬'과 관광버스에서 노래 대신 중증 장애 누나 얘기를 한 사람에 대해 쓴 '누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서옥렬’은 분단의 아픔을 담담하게. ‘누님’은 여성 중증 장애인을 둔 가족의 아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얘기다. 역시 눈물은 담담한 것보다는 절절에서 나왔다.
늘 달을 보라면 달은 안 보고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더 열심히 보는 사람이 있듯이 나도 그런 면이 종종 나온다. 저자 소개의 첫 문장엔 '소설가 후배'에게 '소설 쓰고 싶다'라고 했더니 '비웃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꽤 아팠기에 소개말 첫 문장에 썼을 것이다. 남의 꿈에 대해 그렇게 쉽게 함부로 비웃는 소설가는 누구일까?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쓴 사람일까? 10년만 젊었어도 되지도 않는 어설픈 검색 신공 발휘한답시고 '함평 소설가'를 검색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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