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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3-2 말하는 자에서 읽고 쓰는 자로

고통의 고백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인간으로

by 보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 3-2

말하는 인간에서 읽고 쓰는 인간으로

말하는 자에서 읽고 쓰는 자로


가난한 여성의 글쓰기는 허세?


신기하게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 공포는 잠시 사라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경험하며 뒤라스는 글 쓰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자기 삶이 되는 황홀한 체험을 했다.”
경향신문,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1) 가난·모친의 멸시 극복한 작가…


20세기 초의 한국 여성 지식인 연구자라는 장은영이 경향신문에 기재하는 연재 기사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중 영화 <연인>의 원작자 마르그리뜨 뒤라스에 대해 쓴 글의 일부다.

내가 띄엄띄엄 읽다 만 기사 속에서 저 문장을 기억하는 것은 기획 기사의 첫 번째 글이기도 했고, 어느 분이 저 기사를 읽고 내가 생각났다고 한 말 때문이다. 물론 그 말을 한 사람도 들은 나도 내가 뒤라스와 동급이라는 착각을 하진 않았다. 그 말을 한 분은 기사의 부제(副題)인 ‘가난을 극복한 작가....’에 방점을 두고 '뭐가 됐든 계속 쓰라!'는 응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가난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작가도 아니라 ‘가난한 여성(사람)도 글을 쓰는’에 의미를 부여해 저 기사를 읽었다.


경향(장은영)의 저 글엔 뒤라스의 어머니가 딸에게 ‘가난한 여성의 글쓰기는 허세’라고 한 말이 인용돼 있다. 내가 한정적, 단편적으로 발견한 것은 가난한 사람도 글을 쓰지만 못 배운 사람이 글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다. 나만큼 가난하거나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글을 썼지만 나보다 못 배운 사람이 글 쓰는 것은 잘 못 보았다. 전업 작가들 말고도 sns에서조차 글 좀 쓰는 사람들 중 공장 노동자, 시장 상인, 영세 자영업자들의 글은 잘 없었다. 뭔가를 쓰는 사람 대부분은 달 뜨기 전에 밥벌이를 마치거나 시간 운용의 자유로움이 있는 프리랜스였다. '대학 나온' '많이 배운' 사람이었다. 그런 짧은 관찰로 보면 가난한 사람이 글과 멀기보다는 못 배우고 시간 없는 사람이 글과 먼 게 사실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못 배운 사람이 가난할 경우가 더 많긴 하다.


내 학벌, 내가 해 온 일에서 만난 사람, 내 계층의 사람 중 글을 읽거나 쓰는 사람은 거의 내가 유일했다. 나는 읽지 않은 사람 중에서 ‘읽는 사람’이 됐고 쓰지 않는 사람 틈에서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휴게실 안의 <좋은 생각>과 미용실의 주부 잡지 말고는 1년에 책 한 권 볼일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뭔가를 읽고 있는 나는 신기하거나 예외적인 인간이었다.

그들은 나를 ‘이(우리) 일과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 했다. 내가 특별히 지적이고 어려운 말을 골라 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사 앞, 회의 시간에 ‘머릿속 말을 별 어려움 없이 바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이유로 나는 그들과 좀 ‘다른’ 사람이 됐다. 사유서나 보고서, 민원서 몇 장으로 나보다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들이 나를 ‘막 대하기 어려운’ 인간으로 생각하게 했다. 세상엔 말과 글의 허상, 작은 힘이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어떤 기자가 기자 돼서 가장 힘든 것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취재할 때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말의 두서가 없고 억울한 감정만 반복하지 억울한 사실,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 알고 지낸 사람 대부분은 말과 글에 능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살아오면서 잘 대하지 못했던, 정리되지 않은 말을 오래 듣고 있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말, 말 너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귀와 마음이 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얘기를 논리 정연하게 풀어 쓸 수 있는 것도 일종의 '계급'과 '권력'임을 다시 깨달았다.


말하던 사람에서 읽고 쓰는 사람으로

쓰기-자기 해소에서 성찰로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은 못 배우고 가난한 자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말(만) 하던 인간이 어떻게 읽고 쓰는 인간으로 성장하는가! 이 책은 가난한 연인들의 연서를 빙자한 가난 보고서로 시작해 빈자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인간에게 ‘대화’ ‘소통’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로 시작해서 ‘쓰는 인간, 읽고 쓰는 인간(의 성장)’으로 끝난다.


나도 누군가의 인용으로 본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은데 김영하였던 것 같다. 누가 '글 잘 쓰는 비법'을 물으니 '연애편지' 쓰듯 쓰라고 했다. 연애편지를 쓸 때는 오로지 한 명의 대상만 생각하면서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초집중해서 온 마음으로 쓰기 때문에 자기 능력치 최고의 글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이 소설 주인공 마까르도 '연애편지'를 쓰면서 글이 일취월장한다.

소설 속 남자와 여자는 경제적 수준은 비교가 무의미하게 똑같이 가난하지만 둘의 지적 수준은 차이가 많다. 남자는 의무교육만 겨우 마쳤다. 스스로 고백하듯 읽은 책도 별로 없고, 그 몇 권 안 되는 책도 시답잖은 3류 연애소설이 전부다. 반면 여주인공 바르바라는 지금은 가난한 고아지만 부모 생전엔 사립 기숙사 학교에 다녔고 외국어 개인 교습도 받았다. 요절한 첫사랑이 독서광이라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많은 문학책을 읽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은 지하철 좌석의 낯선 사람이 읽고 있는 책도 괜히 궁금한 법이다.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이 읽는 책에 대한 궁금함과 동참은 당연지사!

그에 대한 우정이나 사랑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었다.......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사랑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연애편지 초기 마까르의 편지는 두서없는 독백에 가까운 장광설 문체다. 바르바라에 대한 서툰 연정, 현실을 포장한 실속 없는 말을 별 내용도 없이 몇 장씩 쓴다. 바르바라의 답장은 그에 비해 늘 간결하고 짧다.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할 말이 많은 법이지만, 둘의 언어 운용력과 독서 수준 차이 때문이다. 편지를 주고받을수록 마까르도 둘 사이의 글과 지식의 격차를 자주 깨닫는다.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어 진다. 대화의 갈증이 글자, 자기 언어의 갈증으로 발전한다.

제가 이렇게밖에는 못 쓴다고 너무 흉을 보지는 말아요. 지금까지 쓴 것을 읽어 보니 정말 두서가 없네요. 저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써보려 하면 결국엔 실없는 소리나 잔뜩 늘어놓게 되고 말죠.... 제게 글솜씨가 없다고, 너무 형편없다고 흉을 보지는 말아주십시오. 문장력이라도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의 편지는 일상 공유와 신세 한탄에서 이웃과 문학 얘기로 확장된다. 편지가 쌓일수록 마까르의 문장은 진일보하는데 연인의 독서교육이 한몫한다. 3류 연애소설, 성애소설이나 읽는 마까르에게 그런 책은 그만 읽어라며 푸시킨과 고골의 책을 빌려준다. 하숙집 문학 낭독회와 작가모임에 기웃거리며 문학에 대한 귀동냥도 한다. 점점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커진다. 작가가 되는 상상도 해본다. 그런 글이라면 자신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과 말까지 하게 된다.


한국은 동업자에 대한 예의와 보험으로 평론가, 서평가 외에 같은 창작가끼리 현존 작가에 대한 실명비판은 잘하지 않는다. 자기 글 속에서 언급하는 것도 삼간다. <가난한 사람들>엔 도스토옙스키의 선배들인, 당시 현존 작가와 그들의 책이 실명 언급된다. 이제 갓 데뷔한 20대의 애송이 작가 책에서 자신들의 이름, 작품을 발견한 당사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아는, 모르는 여러 작가와 작품 이름이 등장하는데 특히 푸시킨과 고리키 작품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고통을 고백하는 사람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자로

-쓰는 인간의 성장 일기


마까르는 푸시킨의 <역참지기>를 읽고 나서는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내 이야기가 자세하게 씌어 있다.'며 깊은 공감을 한다. '그런 책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살면서 그것을 모르고 지나쳤다'라는 통탄도 한다. 소설 속 상황, 인물을 현실에 대입한다. 자신과 같은 비루한 인생의 아주 평범한 일상도 글이 될 수 있구나. 너와 나의 얘기, 모두의 얘기일 수 있으며 세상에 남의 얘기는 없다고 깨닫는다.

반면 고리키의 <외투>를 읽고는 몹시 격분한다. 작가들은 무슨 권한으로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정밀화, 현미경처럼 묘사하냐, 어떤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뭘 먹고 어떻게 사는지 왜 남의 사생활을 시시콜콜 기록하냐. 그렇게 다 까발려 놓고 처음의 고통에서 탈출하지 못 한 그대로 끝내버리냐. 외투를 찾게 하든지 월급을 올려 주든지 계급이라도 올려 줘야 하지 않나. 보상 없는 공허한 일상의 반복과 충실한 묘사만 있는 문학은 쓸모없다는 문학론까지 편다.


고리키의 <외투>에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은 책 속 주인공에게서 자기 자신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흡사한 무능한 주인공의 무력한 결말에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걸 연인이 권한 데서 모욕감을 느낀 것이다. 나도 어떤 글이나 영화에서 들키기 싫은 내 결점이 부각된 인물을 보면 기분이 안 좋았다. 마까르는 이제 단순히 '말'하던 인간에서 '읽는 인간'으로, 읽는 인간에서 '해석'하고 '쓰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외투>에 대한 장황한 분노 속엔 마까르의 발전된 문장력과 함께 그의 사상적 발전도 같이 보인다. 가난의 단순한 나열과 타령으로 그쳤던 그의 편지는 가난에 대한 해석과 통찰을 보인다. 고독한 골방 은둔자의 수다와 넋두리는 체계와 사상을 갖춘 ‘글’이 돼간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망을 듣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비어져 나온 발가락과 다 해진 발꿈치는, 예를 들자면 당신에게 처녀성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커다란 부끄러움이라는 말이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옷을 벗으려 들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은 누가 자기의 누추한 집을 들여다보거나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정말 나쁜 일은 부자의 옆에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이 부자의 옆에는 없단 말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글 중에선 분량도 짧은 편이고(요즘의 중편, 경장편 분량) 특유의 장광설 만연체도 적다. 이야기 구조도 단순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게 하는 작품이다. 밑바닥 삶과 루저에 대한 연민과 탐구가 많았던 그의 주인공들 대게는 비호감 캐릭터다. 이 글의 주인공 역시 모든 비호감 요소의 총합인데 책장을 덮을 때는 이 비호감자를 깊은 연민과 이해로 응시하게 된다. 고통의 유대감, 고통의 연대에 참여하게 한다.

책 속 마까르의 입을 빌려 현실의 충실하고 세밀한 묘사만 하다 끝나는 문학은 필요 없다는 문학론을 비치던 그는 '성장하는 한 인간'을 창조한다. 불쌍한 주인공에게 어떤 '보상'이라도 줘야 한다고 외치던 마까르에게 '읽고 쓰는' 인간으로 보상한다. 그의 인생과 고통은 달라지지 않아도 그는 고통을 말하는 사람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계속....)


※ 책의 인용문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번역. 열린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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