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도 상상, 속죄도 상상
이미 두 사람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고, 자신도 모르는 새 가해자가 되어버린 소녀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서술처럼,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란 없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 - 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관과 과학적 근거가 있는 계급 이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자기 확신을 방패 삼아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나는 나다.
이미 예전에 깨달았던 바지만,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추함은 끝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의문문에는 끈적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느낌표는 자기 말을 잘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의존하는 수단이 아니던가.
육체의 불편과 고단함 덕분에 브리오니의 정신적 시야는 가려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