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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란 셀프 면죄의 도구인가-이언 맥큐언 <속죄>

오해도 상상, 속죄도 상상

by 보는 사람


이언 맥큐언의 <속죄>는 시 에세이집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의 작가 김경민 님과 도서 물물교환으로 읽게 된 소설이다. 글의 밀도와 긴장도가 높고 스토리 구조도 탄탄하면서 다면적인 철학적 메시지까지 내포돼 있어 아주 오랜만에 좋은 ‘정통 소설’을 읽었다는 감상이 들었다.


다 읽고 책 표지를 보니 이 책이 2001년도에 영국에서 출간됐고 한국엔 2003년에 나왔다. 요즘도 이런 500쪽 이상의 장편 소설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내가 어쩌다 소설을 애써 찾아 읽지는 않게 돼 요즘의 소설 동향에는 과문하지만, 단편을 모은 소설 선집이나 중편 정도 분량이 많은 것 같다. 표지에 장편소설이라고 인쇄된 소설들도 작아진 판형, 넓은 행간 등의 편집으로 예전 책과 비교하면 중편 정도 분량인 것 같다. 독자들이 이젠 한 가지 주제로 300쪽 이상의 소설을 읽기 힘들게 된 것인지 작가들이 호흡 긴 주제가 힘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언 맥큐언의 <속죄>는 일단 520여 쪽의 분량으로 오랜만에 이런 두께감 있는 소설을 대해서 처음엔 ‘언제 이거 다 읽지?’ 싶은 생각부터 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손에 쥐자 책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 계속 다음 챕터를 보고 싶어서 지루할 틈은 없었다.


<속죄>를 '2020년에 읽은 좋은 도서' 중 하나로 강력 추천한 김경민 님이 책만은 못 하지만 영화도 괜찮으니 같이 비교해 가면서 보면 더 좋을 것이라 하여 책을 다 읽은 후 영화도 봤다. <어톤먼트>란 타이틀로 나온 영화는 '나쁘지 않다' 정도였다. 원래 내가 편협한 취향으로 영상미 뽀샤시한 클래식한 스타일의 우아한 영화는 뭔가 모범생 보는 감상이 드는 데다 책을 본 뒤에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책이 괜찮았을 때 책을 넘어서는 영화가 있었던가? 싶은데,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영상, 이미지의 시대라고 해도 문자가 주는 상상력의 힘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내 눈앞에 다 보이지 않고 보여주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글자 사이의 행간을 상상케 하는 힘이 문자 예술의 묘미일 것이다. 영화는 500쪽이 넘는, 다면적 주제에 글의 밀도와 분량도 빡빡한 소설 내용을 두 시간에 다 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원작의 내용과 주제가 방대한 경우 영화는 시간 제약과 영상 언어의 특성으로 어느 한 부분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으므로.


영화 <어톤먼트>의 포스터
이미 두 사람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고, 자신도 모르는 새 가해자가 되어버린 소녀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며 평생을 보내야 한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서술처럼,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란 없다.


500쪽이 넘는 긴 이 책의 줄거리를 소설 속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압축하면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란 없다.'라는 것이다. 오해가 불러일으킨 상상, 상상이 만든 확신, 자기가 본 것이 오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고집과 어린 소녀의 소영웅주의가 합쳐져 두 사람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이야기다. 불운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이 소설의 제목이 불멸의 연인 류가 아니고 속죄인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연인의 로맨스보다는 오해로 무너진 두 인생에 대한 가해자의 죄의식과 속죄가 이 글의 더 큰 주제이기 때문이리라.


책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13살의 브리오니가 막 연애를 시작한 두 연인을 지독한 파멸로 몰아넣는 이야기다. 모든 파국은 어떤 상황에 대한 브리오니의 오해와 상상에서 비롯된 허위라는 것을 소설 초반에 바로 드러낸다. 영국 귀족가의 막내 브리오니,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 그 집 가정부의 아들인 개천 용 수재 로비 이 세 사람의 시선과 심리를 오가며 오해가 진실로 확정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는 브리오니의 증언으로 감옥에 가게 된 로비가 감형 조건으로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 전쟁의 참상을, 3부는 언니 세실리아와 같은 간호사가 되어 속죄 의식을 치르려는 브리오니, 그녀가 병실에서 만난 발가벗겨진 육체의 비참함과 죽음, 에필로그는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후에 밝혀지는 브리오니가 숨겼던 진실과 반전이다.


형식에서 좀 눈에 띄는 부분은 소설 전체의 반 정도 분량에 속하는 1부가 총 10 챕터로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2부, 3부는 별도 챕터 없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1부에서 브리오니가 보고 생각한 모든 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보여주면서 세 인물의 심리와 입장을 선명하게 대조하고 2, 3부는 한순간의 오해가 파생한 깊고 긴 파멸을 피해자인 로비와 가해자인 브리오니의 상황에만 집중한 구성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잠깐 벗어나 홍상수 영화를 돌이켜 보면 그의 영화들의 공통 소재 중 하나는 ‘어긋난 기억’, 기억의 다름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도 시간이 지난 후 자기 입맛에 맞게 조금씩 다 다르게 편집된다. 비슷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같은 목적('오늘 밤 저 여자와 자야겠다')으로 희희낙락하며 붙어 있던 기억도 저마다 다 다른데, 두 사람과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본' 제삼자의 눈이 기억하는 오해와 왜곡은 더 클 수밖에. 착시, 상상, 오해의 3종 세트로 만든 확신의 파국이 <속죄>의 줄거리다.

2003년에 나온 이 소설을 남근 우위의 한남들이 지금 본다면 오해의 폭력과 속죄(의식)라는 주제보다는 다른 각도에 더 몰입해서 "거 봐라" 할 수도 있겠다.

영화 <어톤먼트>의 한 장면. 모든 파국이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에필로그의 반전은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내 진실을 덮고 가는 것도 아니고 드러내는 것도 아닌 결말은 가해자의 자기 위안과 자가 면죄, 혹은 글 속에서만 진실을 부르짖는 글쟁이(소설가)의 변호 같았다.

이 소설의 완결편인 3부에서 브리오니는 당신들이 지금까지 읽었던 세실리아와 로비의 결말과 자신의 속죄는 사실과 다르다는 고백을 한다. 또 실지와 다른 이 결말의 이유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과 절망에 맞선 '투쟁'이었다고 한다. 번역이 그렇게 된 것인지 원문의 단어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피해자들에게 행복한 상황을 잠시 만들어 준 것을 '친절'이라고 표현한 단어부터가 거슬렸다. 마치 인간을 제 맘대로 갖고 노는 조물주의 생색 같았다. 이언 매큐언도 나 같은 독자의 불만을 예상했는지 에필로그에서 소설가는 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속죄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라는 변명, 혹은 셀프 면죄부를 준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 - 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소설을 '글'로 소설가를 '작가, 저자'로 대체하면 장르를 불문하고 쓰는 것의 의미, 작가의 존재 이유, 글 쓰는 행위가 속죄 의식이 될 수 있는지, 삶과 다른 글의 진실성에 대한 공통된 질문이나 회의일 수도 있겠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글쓰기 행위에 대해 '소설에 없는 것은 삶에도 없었다.'라고 선언했지만 그 반대였다. 그녀 삶에는 없었던 것을 소설에서 다 만들어냈지 않았는가. 현실에선 진정한 속죄를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소설에선 그렇게 했고 현실과 다른 결말도 소설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니 긴 세월 죄의식에 시달리고 속죄 의식으로 글을 썼다는 브리오니의 속죄는 가짜다.

속죄의 도구인 소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어쨌든 제법 성공한 소설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용서받을 대상은 이미 없고 진정한 속죄 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단지 속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가해자의 위안만 남으면 그만인가? 열세 살의 행동이 오해와 상상이었다면 성인이 된 후의 브리오니는 왜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 침묵했는가? 그녀의 오해가 상상(창작)이었듯이 속죄마저도 상상(창작) 속에서만 행해졌다. 마이크 대신 펜을 들고 ‘나는 노력했다’라는 자기 위안, 변명만 떠든 건 아닌가. 이런 변명은 책 속에도 나온다.

그는 자신의 정치관과 과학적 근거가 있는 계급 이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자기 확신을 방패 삼아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나는 나다.

훼방당한 비극적 사랑이라는 외피를 쓴 이 소설은 '오해의 폭력'과 '속죄'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들어가서 '쓰기' '작가'라는 예술적 존재 이유에 대한 고찰로 마친다. 죄의 속죄에서 쓰기의 속죄 의식. 오해도 상상(창작)이고 속죄도 상상이다. 상상, 창작의 폭력과 위선. 피해자인 로비와 세실리아가 브리오니의 이런 속죄 의식과 긴 변명을 봤다면 모 장관처럼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장편 소설 쓰고 있네!"

<속죄>. 이언 맥큐언. 문학동네.


이 책 속엔 소설의 진짜 매력은 아름다움의 묘사가 아니라 추함의 묘사라는 말이 나온다. 그 추함을 묘사하는데 감정 과잉의 의문문이나 느낌표를 쓰지 말라고 한다. 잘못을 외부, 타인에게 돌리지 말고 나에게서 찾아 담백하게 인정하고 책임져라(마침표)는 말로 들린다. 속죄란 것은 의문문(변명)이나 느낌표(응석)가 아니라 마침표(행위)다.

이미 예전에 깨달았던 바지만,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추함은 끝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의문문에는 끈적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느낌표는 자기 말을 잘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의존하는 수단이 아니던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저 말은 행복의 모습은 단순하지만 고통의 모습은 복잡 다양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런 추함의 다양함을 묘사하는 게 소설의 가장 큰 매력 아닐까. 나처럼 고통과 추함의 예술에 매력을 더 느끼는 이라면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라는 소설 속 말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속죄>는 쉽게 보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마음, 의식의 흐름이라는 내면 못지않게 물질적 요소(계급, 육체적 고통)가 인간 존엄성을 파멸시키는 외면적 과정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브리오니가 자기의 속죄 의식으로 택한 직업이 간호사와 소설가다. 간호사가 인간의 다친 몸을 보살피는 물질적 치유자라면 소설가는 마음, 영혼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치유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다른 것은 간호사는 남의 몸을 치유하는데 변명할 여지가 없는 반면 소설가는 자기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에 미화와 변명이 개입하기 쉽다는 거다. 사람은 마음만으로도 몸 맘으로도 살 수 없다. 몸과 마음이 제때 잘 붙어 있어야 행복하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정신적 거리와 반비례한 먼 육체적 거리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인용할 문장은 이 소설의 다면적 주제에선 곁가지쯤 되지만, 정신력이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피로를 겪어본 나로선 너무 잘 이해되는 말이었다.


육체의 불편과 고단함 덕분에 브리오니의 정신적 시야는 가려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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