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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년'과 '지질한 놈'이 <편의점>에서 만났다

<편의점 인간>

by 보는 사람

일본의 글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인문서, 에세이, 소설 등 장르는 달라도 공통점들이 있다. 곱씹는 깊은 맛은 부족해도 술술 읽히는 경쾌하고 담백한 문체,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외양 속의 날카로움. 시니컬과 블랙 유머가 공통적 요소이기도 한데, 소설 <편의점 인간>도 그랬다.

‘프리터 freeter’

이 책에서 처음 들은 말인데 책 속 설명에 의하면 이렇다.

ㅡ일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나 시간제 근무로 살아가는 사람. 프리랜서와 아르바이터를 합친 일본식 조어


한국과 일본은 같은 유교권 사회로 관습과 정서가 비슷한 면이 많아서 일본인의 글 속에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내가 저런 프리터로 살게 된 지가 몇 년 됐다. 책 속엔 '전문직도 아니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곳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늙어가는 미혼자'에 대한 세상의 시선, 인식이 곳곳에 묘사된다. 아, 나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이 저렇겠구나, 저런 것이로구나. 사람들 시선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편이지만 사람들이 저런 생각과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책에서까지 재확인한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지난 2주 동안 열네 번이나 "왜 결혼하지 않아?"라는 질문을 받았다. "왜 아르바이트를 해?"라는 질문은 열두 번 받았다.
"인생 종 친 거지. 그 녀석은 안 돼. 사회의 짐이야. 인간은 말야, 일이나 가정을 통해 사회에 소속하는 게 의무야"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은 또 강간당합니다..... 내 불알조차 무리의 소유예요. 당신 자궁도 무리의 소유예요."


이 책의 주인공 게이코는 편의점 알바다. 불경기로 인한 실업, 바늘구멍 취업난 같은 외부적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학력 비정규직자로 사는 자의 애환기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의 희로애락에 대한 공감이 불가능하고 완벽한 '매뉴얼'이 있는 편의점에서만 사회적 활동이 가능한 사회 부적응자라서 오랜 세월 편의점에서 일할 뿐이다. 주인공은 대학 졸업 후 36살이 되도록 편의점 알바로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직업 활동만 한다. 게이코의 삶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낙오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스스로 경쟁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정해 놓은 '정상'의 삶에 공감 불능이라는 점이 '보통의 삶'에 대한 조용한 저항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며 자기가 정해 놓은 '벽(매뉴얼)' 속에서 어떤 시대상에 저항하는 모습은 <필경사 바틀비>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일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누구에게도 어떤 위해도 끼치지 않지만 단지 '다수'가 느끼는 '공감'이 없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 관한 언술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생각나게도 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정상성은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별다르지 않다. 대학을 가고 번듯한 곳에 취직을 해서 번듯한 집을 마련하고 번듯한 가정을 꾸려 번듯한 자식을 낳는 것이다. 결국 '보통' '정상'의 삶이란 얼마나 '번듯하냐?'이니 보통으로 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경쟁에 져서, 정해진 선 안에 못 들어가서 '번듯해지지 못한' 사람들은 루저 취급되고 자발적 탈 경쟁, 탈 제도의 삶을 사는 이들은 '이방인' '부적응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쉽게 매도된다. 정형화된 일정 코스 안에서 살지 않는 소수자들은 사회에 유해하지 않지만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삶으로 평가받는다.


매뉴얼은 벌써 오래전에 있었다....'보통 사람'의 정형은 조몬(석기) 시대부터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해왔다고 나는 나는 생각했다.
"이것 봐요.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프라이버시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 얼마든지 흙발로 밀고 들어와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거나 사냥하러 가서 돈을 벌어 오거나, 둘 중 하나의 형태로 무리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이단자예요. 그래서 무리에 속한 놈들은 언제나 간섭하죠...... 사는 방식의 다양이니 뭐니 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지껄이고 있지만, 결국 조몬시대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살기가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을 규탄받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인생 종 친 거지. 그 녀석은 안 돼. 사회의 짐이야. 인간은 말야, 일이나 가정을 통해 사회에 소속하는 게 의무야"


'다수의 삶'이 '정상성'이라면 한국은 앞으로 1, 20년 안에 그 정상성의 모델이 달라질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나왔던 여러 통계 기관의 '연간 합계 출산율은 0명대에 그친다‘라던 예측이 현실화됐고 OECD 가입국 중에서도 출산율 최하위권이다. 결혼율 역시 '1981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저치'라고 한다. 실업률, 취업률, 비정규직 증가율, 무주택 증가율도 그 수치가 낮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올해 전 세계의 여러 분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코로나'도 결혼과 출산율의 저수치를 가속화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 다수적‘ 삶의 양식이 '정상성'이라면, 앞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으며 시급 알바로 사는 게 '보통 사람'의 표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권 의식의 상향으로 강제적 병역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긍정도 이전보다 증가한 것 같다. 나도 시류에 맞춰 '양심적 결혼 거부, 양심적 출산 거부' 중이다.

책 속에서 '정상인' '보통 사람'은 타인을 '재판'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보통 사람은 보통이 아닌 인간을 재판하는 게 취미예요."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다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구한테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버려요.
사회에 나가지 않으면 취직해라, 취직하면 돈을 더 많이 벌어라, 돈을 벌면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아라. 줄곧 세상 사람들한테 재판을 받습니다.
무리에 도움되지 않는 인간은 삭제되어 갑니다. 사냥하지 않는 남자,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 현대사회니 개인주의니 하면서 무리에 소속되려 하지 않는 인간은 간섭 받고 강요당하고, 최종적으로는 무리에서 추방당해요."
" 이 세상은 현대사회의 조몬(석기)시대예요."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보고 겪는 일이다. 미혼자에겐 4대 보험 되는 데 취직해라, 결혼해라, 집을 사라, 결혼하면 집을 넓혀라, 아이를 낳아야지, 아이를 놓으면 그래도 아들은 있어야지. 한 명은 외롭잖아, 둘은 낳아야지....

이 책에는 두 유형의 부적응자가 나온다.

먼저 게이코ㅡ

감동이나 화를 잘 못 느끼는 감정, 공감 불능자다. 사람들이나 사회에 큰 불만 없는 자발적 비정상인, 부적응자의 삶을 선택하며 산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급 알바로 쭉 산 것은 게으르고 자신의 삶에 무책임해서가 아니다. 단지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는 편의점처럼 완벽한 '매뉴얼'의 작업 형태가 없는 곳에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학교 입학하고서부터 서른여섯 살이 될 때까지 18년을 오직 '같은' 편의점에서 일한 게이코는 그 어떤 매너리즘과 지루함에도 빠지지 않고, 늘 '신입의 열성'과 '고참의 능숙함'으로 재미와 책임감을 갖고 일한다.

다양한 사람이 같은 제복을 입고 '점원'이라는 균일한 생물로 다시 만들어져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끝나자 모두 제복을 벗고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꼭 다른 생물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써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 수는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는 채였다.... 내 몸 대부분이 이 편의점 식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잡화 선반이나 커피머신과 마찬가지로 이 가게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컨디션을 관리하여 가게에 출근할 때 건강한 몸으로 가는 것도 시급에 포함된다고 두 번째 점장한테 배웠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내 몸을 움직이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내 몸은 편의점의 것이었다.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 잠을 자고, 컨디션을 조절하고, 영양분을 섭취한다. 그것도 내 업무에 포함되어 있다.



직업에 대한 묘사, 직업인의 심리가 세심하고 정확해서 '아, 이런 것은 단순 조사가 아닌, 그곳에서 일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인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완독 후 작가 이력을 보니 책 속 주인공처럼 대학 때부터 이 책이 나온 18년의 세월을 편의점 알바로만 일했다! 무심하면서 서늘한 문체는 황정은의 몇몇 작품을 떠올리게도 했는데, 황정은보다 무라타 사야카가 좀 덜 무겁고 좀 덜 우울하다. 단순 노무와 서비스업에 대한 세밀한 묘사, 직장 동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 갑과 을에 대한 거리감을 둔 건조한 음성은 황정은의 <도게자>를 특히 더 떠올리게 했다.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으면 그런 곳에서 일한다고 멸시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그게 몹시 흥미로워서 그렇게 깔보는 사람이 얼굴 보는 걸 비교적 좋아한다. 아, 저게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하는 일인데도 그 직업을 차별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차별하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한 부류는 차별에 대한 충동이나 욕망을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지만, 또 한 부류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차별 용어를 연발할 뿐이다.
육체노동자는 몸이 망가지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성실해도, 분발하여 열심히 노력해도, 몸이 나이를 먹으면 나도 이 편의점에서 쓸모없는 부품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은 '쓸 만한' 도구다. 안도와 불안, 양쪽을 내장에 품고....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책 속에는 주인공이 꿈속에서도 편의점 계산기를 두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한때는 그런 업무 연장의 꿈을 자주 꿨다. 자신에게 맞든 안 맞든, 한 직장에서 열과 성을 바쳐 그곳의 부품으로 살아본 이라면 꿈속에서 낮의 일을 계속하거나 일에 치이는 꿈을 한 번도 꾸지 않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게이코가 좀 '이상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자기만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어떤 저항성이 느껴지는 있는 인물이라면 또 다른 부적응자 시라하는 언급하기도 싫은 놈이다. 시대와 타인에 대한 원망을 일삼으면서도 자기가 부정하는 시대의 상을 쫓는 놈인데, 그 생각과 방법이 아주 허황하고 무책임하며 게으르다. 배금주의, 물질 만능주의를 저주하면서 로또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식이고, 계급 차별에 이를 갈면서 돈 많은 여자의 기둥서방을 희망한다. '석기(조몬)' 시대 역사서까지 뒤적거려서 기껏 찾은 게 자기 연민과 변명 거리밖에 없는 허약하고 지질한 놈이다. 게이코는 공감 불능이지만 자기 상처를 남에게 안 옮기고 스스로가 택한 삶에 충실하지만, 시라하는 끊임없이 소가 여물 먹듯 제 상처만 되씹는다. 게이코가 단박에 한 마디로 파악한 대로 '피해자 의식은 강한데 자신이 가해일지도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고'로 세월을 허송한다.


'이상한 년'과 '지질한 놈'이 편의점에서 만나 '보통 사람'들의 편견과 폭력을 얘기하는 글, <편의점 인간>

독특하지만 담백하고 날카롭지만 유머스러하다. 이동 중에도 읽기 좋은 분량과 내용이고 분명 재미있는 소설인데 두 번, 세 번 읽고 싶은가? 자문해 보면 잘 모르겠다. 흡입력 있지만 깊이는 없는 일본 현대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 같은데 한국 현대 소설에서도 많이 보인다. 다시 읽을 시간도 없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 만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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