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몇 년 전 조선일보의 마루야마 겐지 인터뷰를 읽고서였다.
마루야마 겐지는 1967년, 스물넷이란 당시 최연소의 나이로 일본 최고 문학상 중 하나라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뒤 홀연 세상과 문단 다 절연하고 귀촌해 산 지 50년 째란다. 그는 사람이든 조직이든 어떤 대상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선 '죽을 때까지 계속 밀고 나가야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과 독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문학에 대한 태도, 작가 정신도 그런 독한 자립정신과 고독 속에서 '국가가 채찍 치면 저항하고, 사탕 주면 거부'해야 하며, 인간 본질을 묻고 세계와 대결하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인의 취미, 사담이나 읊는 사소설 같은 건 지 벽장 속에서나 읽으라며 혹평했다. 예를 들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이렇게 말했다.
"일본 문학의 3대 나르시시스트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1909~1948), 미시마 유키오(1925~1970),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68)다. 평범에 미달하는 남자가 미녀에게 둘러싸여 늘 사랑을 받더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작가의 콤플렉스지.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고."
일본 문학, 작가를 많이 모르는 나는 모두가 아는 나쓰메 소세키와 무라타 사야타 정도만 관심 있게 읽은 정도고 무라카미 하루키야 몇 권 읽었지만, 유명세만큼 큰 감흥을 못 느꼈다. 미시마 유키오의 책은 어릴 때 읽기는 했는데 신경숙 표절 파동 때 '아, 그 책?'하고 말 정도로 흐릿했다. 꼬장꼬장한 성정이 인터뷰 기사 밖으로까지 고대로 전해지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정작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안 봐도 그 책의 성격이나 문체가 전해질 정도로 논조가 선명했다.
많은 사람이 일본 문학뿐 아니라 근현대 (동양)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자국의 문학 거장들을 단칼에 '3대 자뻑가'들로 꼽는 것에 흥미가 갔다. 대선배들에 대한 거침없는 독설에서 일전의 장정일이 대선배들에게 한 독설도 생각났다. 화법을 보면 다자이 오사무가 여성적인 나르시 시트라면 마루야마 겐지는 마초 나르시시트다.
그 무렵 마침 친구에게 새해 선물로 민음사 판의 <인간실격>을 선물 받았다. 다 읽고 나니 에곤 실레의 자화상만큼 이 책과 잘 어울리는 것도 없겠다 싶고, 원작의 매력인지 번역 덕인지 글도 술술 잘 읽혔다. 아,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이제 나는 '늙었구나!'라는 것을 자주 느꼈다. 읽는 내내 이 지질하고 궁상스러운 부잣집 백수 도련님, 고급 룸펜의 이야기를 한숨을 쉬며 혀를 차며 읽었다. 내가 이 책을 20대, 아니 30대에 읽었어도 이 패배주의와 무능의 허무에 혹했지 싶다. 그러나 그간 세상의 많은 풍상과 풍상의 진상을 겪고 보며 마흔 넘어서 본 이 책이 내게 감동을 주기는 힘들었다. 또 어려서부터도 미문, 탐미주의 같은 문학의 형식보다는 작가의 관점, 태도 같은 문학 정신에 더 끌리던 내게 배운 값 못 하는 이 고급 백수의 주정, 철들지 않은 넋두리는 그런 면에서 '실격'이었다.
글 내내 '외롭다'고 징징거리고 누가 그 외로움을 알아채 주길 원하는 연기 인생의 고백으로 일관한다. 요즘 말로 '관종'이다. 그 외로움에는 최승자의 독한 고독도 착란도 없다. 요조의 징징거림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글 속에서 자신을 주로 '혐오남'으로 묘사한 것과 달리 다자이 오사무는 모든 여자의 사랑을 받는 '우수 가득한 미남'으로 묘사한 것부터 큰 차이가 난다. 나르시시스트가 자기애에 빠져 물에 빠져 죽은 수중 거울 남의 어원 아니라 할까 봐 글 속 주인공 요조도 물에 빠져 죽는다. 끝내 독하지도, 제대로 미치지도 못한 채 징징대다 죽어버린 도련님, 마마보이의 일대기다.
일본 문학, 글을 많이 읽진 못한 짧은 독서의 한정된 감상이겠지만 일본 소설, 에세이, 영화에서 느끼는 공통의 유사성이 있다. 비정상적인 탐미와 일상의 담백하고 세심한 스케치로 양극화된다는 느낌이다. 전자는 괴기스럽고 후자는 소소한 유머와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감정적 공감은 쉽게 되는데 깊은 공명을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근간 10년 이내의 한국 에세이 베스트셀러의 일기식 문체와 컨셉도 일본의 영향 같다.
'저항과 자립의 독기'를 말하는 마야루마 겐지의 문학관, 작가관으로 보면 이 소설은 좋은 문학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로서의 문학이 아닌 일기문, 산문 글로 대하면 문학성 높은 자기 고백의 진정성에서 후한 점수를 쳐 줄 수 있겠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세상에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 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저런 대사들은 자기 고백의 진정성을 압축한 문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찰과 탐문 없는 고백은 허무했다. 소설(문학)이 바른 소리나 읊는 도덕은 아니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질문을 통해서 어떤 성찰과 탐문을 얻을 수 없다면 누구 말마따나 자기 벽장 속에서나 읽는 일기,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넋두리와 무엇이 다를까 싶다.
저 작품이 나온 시기의 일본과 한국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잔영을 많이 느끼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글도 그랬다. <인간 실격>은 <죄와 벌>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직소>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자주 어른거렸다. 도스토옙스키처럼 고독도 고통도 가난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게 다르다. '일하지 않는 방구석 철학자'인 요조는 나쓰메 소세키의 글을, 부인에게 기식하면서 집안의 성폭력도 방관하는 알콜, 마약 중독자의 못난 기둥서방은 ‘금홍이’를 외치던 폐병쟁이 이상도 겹쳤다.
여기서도 다시 확인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왜 위대하다고 칭송되는 남자 문학가들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가?이다. 다음 문장은 남자 작가 소설에서 너무 상투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저는 백치 아니면 다시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창녀에게서 마리아를 보고, 창녀에게서(만) 희생적 모성도 회수한다.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요부를 바라는 발언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자 (작가)들의 글에서 그리스도/부처님/아버지 같은 창부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성인식에 문제점 많은 발언과 태도가 곳곳에 보이지만 시대적 한계로 이해한다. 여성에 대한 묘사 중 유일하게 고개 끄덕이며 본 문장이 하나 있다.
여자는 남자보다 익살에 경계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뻑을 포장한 자기혐오와 개선 없는 반성으로 가득한 고급 백수의 일생을 듣고 나니 영화 빠삐용의 대사가 생각났다.
"너의 죄는 네 인생을 낭비한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주인공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소설 속 요조의 삶은 '무저항' 일생이었고 그게 그의 죄(였)다. 니체식으로 얘기하면 '노예'다.
1948년에 출간됐다는 이 책 속에는 어린 날의 나를 회고하게 하는 문장도 하나 있었다.
“끝내 애교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쳐버렸습니다. 교가라는 것도 한 번도 외우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흔을 훌쩍 넘겨서 본 이 책은 한숨이 자주 나왔지만 스물, 혹은 서른의 나였다면 이상의 산문과 최승자를 좋아했던 마음으로 애작가, 애독서 리스트에 올랐을 매력적인 문장도 많았다. 그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젊은이에게 열광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청춘의 책'이다. 청춘은 (빨리) 지나간다.
이 책 속에서 가장 오글거렸던 문장 하나와 아름다웠던 문장 하나를 옮기며 마친다.
"여자한테서 온 연애편지로 피운 불로 물을 데워서 목욕한 남자가 있다는군요."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에 넘어가는 여자가 있을까? 그 목욕물이나 지 손으로 치웠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