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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3-1

『가난한 사람들』 3-1 N 포(抛) 계급의 연애담

by 보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 3-1 첫 번째 얘기


하숙집을 못 벗어난, N 포 계급의 연애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으로 20대의 그에게 ‘천재작가’ ‘새로운 고골’이라는 극찬을 듣게 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을 여러 권 읽었고 어떤 책은 두 번씩 읽기도 했는데 이 책은 최근에야 처음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김운경 작가의 <유나의 거리>란 드라마가 생각났다. 서울의 쇠락한 어느 동네에 여관을 개조한 듯한 방 많은 다세대 주택이 드라마의 배경이다. 그곳은 밑바닥 삶의 집합소다. 소매치기, 경찰 고시생, 일용직 건설 잡부, 한때 날리던 주먹이었던 치매 노인 등 도시 하층민의 삶과 사랑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었다. 나는 울다가 웃으며 재밌게 봤는데 ‘가난한 사람들의 우울한 얘기’라며 보고 싶지 않다고 한 이들이 많았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처럼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배경도 19세기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에 자리한 다세대 하숙집이다. 그곳에 사는 중년의 말단 서기 공무원과 고아인 20대 젊은 여성이 주고받는 약 5개월 간의 연애편지로 된 서간체 소설이다. 극빈한 남녀의 연애편지엔 달콤한 말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 하나 없다. 그들이 나누는 말속엔 자신들의 생활고에서부터 하숙집 사람들의 가난, 거리에서 만난 가난 등 온통 가난 타령이다.

'N포 세대'란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취업난과 조기 실직, 비정규직 양산으로 인한 불안한 직업, 하늘 꼭대기에 있는 집값, 고물가(高物價) 등의 사회,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많은 것을 포기한 세대를 가리킨 말이다. 처음엔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였다가 '5포세대(3포세대+내 집 마련, 인간관계)', '7포세대(5포세대+꿈, 희망)'까지 왔는데 포기해야 할 것이 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세대라는 신조어다. <가난한 사람들>은 1846년, 19세기 N포세대의 연애담이다. 연애


두 사람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만난 것은 고작 한 두 번 밖에 없다. 문 열고 마당만 가로지르면 만날 수 있는 한 공간에 살면서 주야장천 편지만 주고받는다. 그 편지마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달하니 서로 대면한 게 10분 넘은 적이 없지 싶다. 원나잇이 대수냐?라는 지금도 귀 많고 입 많은 하숙집에서 눈 맞은 남녀가 방을 넘나들면 여자가 추문에 휩싸이기 쉽다. 소설 속 배경이 19세기니 더 그랬을 거다. 주인공 마까르는 자신의 방문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추문이라도 만들까 봐 건넛방 노크도 제대로 한 번 못해본다. 그러다 결국 연인이 다른 놈한테 시집가는 걸 손 놓고 지켜보는 한심한 신세다. 이들의 사랑은 편지만 주고받다 끝나버린다.


어릴 때 이 책을 봤다면 주위 의식과 배려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소심남’ ‘답답한 놈’으로만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마까르의 나이와 비슷한 연배가 돼서 이 시대의 눈으로 바라보니 다른 면이 보인다. 그들이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았던 것은 데이트할 ‘돈’이 없어서다.
마까르는 가불을 하고 옷을 판 돈으로 계산 없이 적선하고 바르바라에게 줄 작은 선물 사기 바쁘다. 바르바라는 그 선물들이 어떤 돈인지 알기에 기쁘기보다는 아프다. 둘은 서로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상대의 생활비에 보태라며 현금을 건넨다. 밖에서 차 마시고 밥 먹고 극장가는 대신 약 사 먹고 담배 피우고 밀린 방값에 보태라고 돈을 보낸다. 몸과 눈으로 만나는 대신 마음과 글로만 만난다. 남녀의 사랑보다 연민에 가깝다. 20대에 이 책을 봤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마음들이다.

이 둘은 요샛말로 5포, 7포세대다. 집, 연애, 결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처지다. 남자가 사는 방은 말이 방이지 하숙집 공동 부엌에 칸막이 하나 치고 만든 조립식 쪽방이나 다름없다. 현관문 열자마자 변기가 보이거나 싱크대 옆에 변기가 붙어있다는 열악한 한국의 원룸보다 나을 게 없다.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 원룸 주거자가 쪽방 독거노인이 되는 것처럼 그도 그렇게 더 가난하게 늙어갈 것이다. 여자라고 형편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십 대에 고아가 된 19세기의 여자가 뭘 할 수 있었겠나. 건강은 가난한 자의 재산인데 몸까지 병약해 바느질도 장시간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들은 기억하기 싫은 과거, 과거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은 현재,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더 불안한 미래를 편지로 넋두리한다.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과거는 돌이켜 보는 것조차 무서워요, 잠깐만 회상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월급 받아서 하숙비 주고 외투 사고 신발 사면 차(茶) 살 돈도 없어요. 내가 뭐 그리 까다롭게 굴겠어요? 더 이상 무슨 복잡한 마음을 갖겠어요? 지금보다 잘 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나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더 가난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은 세습되고 그는 대물림 흙수저다. 책 속엔 줄 수 있는 게 마음밖에 없는 사랑이 얼마나 무력하고 비굴한지 두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절절히 보여준다. 마음밖에 없는 사랑은 연인이고 부모고 모짝 소용없다.

“어쩌면 입 하나를 덜게 되어 사는 게 조금은 수월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핏줄을 이어받은 어린아이가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아이의 존재가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림-바실리 페로프. 러시아

하숙집 식객 중 흥부네 같은 가족이 있다. 자녀 중 한 명이 죽었는데 주인공 마까르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이의 죽음은 슬픔이면서 ‘입’이 하나 줄어 다행일 수도 있는 가난의 냉혹함에 통절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의 표정이 조숙하고 우울한 걸 애통해하며 이런 말도 한다.
“저는 어린애가 생각에 잠기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책 속의 귀족, 백작 같은 일부 단어만 빼면 지금 읽어도 오늘의 얘기로 구절구절 박히는 문장들이다.



편지-N포 계급의 소통, 대화 창구


“당신은 남의 집 구석방이나 차지하고 앉아서, 고독하고 궁핍하게, 아무 기쁨도 없이,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사람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사셨을까요!”
둘이 주고받은 편지 중 바르바라가 마까르의 처지를 안타깝게 표현한 말이다.

가난한 연인이 만나는 친구 하나 없이 폐쇄적인 방순이 집돌이로 하숙집을 못 벗어나는 것은 돈이 없어서다. 우정이고 사랑이고 돈 없이 유지되긴 힘들다. 주인공은 부엌 한쪽을 칸막이 질러 만든 열악한 방의 월세마저도 밀렸다. 기호 식품인 차나 담배는 이미 사치품이다. 옷과 신발은 다 낡아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해도 새로 살 엄두도 못 낸다. 품위 유지비는커녕 인간 최소의 품위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거지 같은 몰골로 차 한 잔 값도 없이 무슨 우정과 사랑을 나누겠나.

세상과 절연한 그들에게 편지는 사람과의 유일한 교류, 대화 창구다. 그들이 나눈 편지, 특히 마까르가 쓴 편지는 일반적인 연애편지와는 좀 다르다. 보고 싶다, 만나자는 사랑의 고백보다는 ‘대화의 갈증’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치 독방의 감옥에서 막힌 벽만 대하던 수인(囚人)이 면회 온 사람 붙들고 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쌓였던 얘기를 막 쏟아내는 그런 분위기다.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 사람이니까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그런 상태다. 편지는 종이와 펜만 있으면 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롭고 값싼 데이트 수단이지만 이들은 그 종이 살 돈마저 없을 때도 있다.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바르바라가 가난에 져서 인색한 부호와의 결혼을 선택하고 떠났을 때 마까르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녀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보다 '대화의 단절'이었다.


“이제 나는 누구에게 편지를 씁니까? …<이제 그 사람은 누구에게 편지를 쓰냐?>하고 생각 좀 해주시라고요.... 저는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편지를 통해 모두 당신께 알려 드렸습니다.... 안돼요. 제게 편지를 한 통만 더 쓰세요... 거기 가시면 거기서도 편지를 써보내 주세요.... 이 편지가 마지막이라니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당신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얘길 쓰려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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