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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by 보는 사람


노동 중심 사회에서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은 '여가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는 연구는, 사회적 질서 바깥의 시간이 어떤 종류의 공백을 의미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사회적 의미에서건 도덕적 의미에서건 자유시간도 가질 수 없다. (....) 실업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종종 움직이지 않는, 텅 빈 시간의 경험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 한 실업자가 내게 분명하게 지적했듯이 말이다. "노동 밖으로 나오면, 자유시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여가를 누릴 방법은 없어져요. 그저 흘러가 버리는 많은 시간이 있을 뿐이죠. 그게 존재하는 전부예요."
ㅡ<<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속,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 전희경. 봄날의 책들


코로나 시국을 맞아 저 문장에 나온 '공백'과 '노동 밖의 자유 기간'이 준 '그저 흘러가 버리는 많은 시간'을 체험했다. 그런 '텅 빈 시간' 속의 한쪽에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읽었다.

나 같은 오랜 불면자에게 새벽 세 시는 어제의 밤은 저만치 건너갔지만 내일의 아침은 아직 먼 상태, 눕기도 일어나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극심한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겐 남은 새벽이 고통이 가중되는 시간일 것이다.


김영옥, 메이, 이정은, 전희경 네 명이 함께한 이 책은 저자 모두가 과거에 많이 아팠거나 현재도 아픈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병의 '토로'에서 출발해서 '토론'으로 나아가는 이 책은 "토로만큼 중요한 것은 토론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병자들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한 '병자 클럽'에서 나온 글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아픈 사람이 되는데 그때 누구에게 돌봄 받을 것인지, 아픈 몸과 사람,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에 대해 얘기한다.

나도 마흔 넘기면서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기 시작했고, 아픈 데를 묻는 것보다 안 아픈 데를 묻는 게 더 빠른 엄마와 같이 살면서 이리저리 느끼고 체험한 바가 많아 이 책에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다.


'개호 독신', 고령의 환자 부모 간병이 비혼 자식에게 귀착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말인데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던 옛말이 지금은 "비혼 딸이 노후대책"이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혼자만의 삶도 곤궁할 때가 많아 노모에게 든든한 노후대책이 못 되고 있지만 나를 비롯한 미, 비혼의 친구들 경험과 이야기에서 저 말이 주는 무게와 현실을 잘 안다.

며칠 전에 만난 친구도 나처럼 아직 미혼인데 자신을 제외한 3남매 모두가 결혼했다. 은행 지점장인 큰오빠, 공기업 다니는 남동생, 출가외인이라는 언니를 뒤로하고 자신이 엄마를 모시고 산다. 휴무 때마다 나이와 비례해 병명도 늘어가는 엄마의 각종 병원행과 간병도 주로 친구가 도맡아 하고 있다. 다 같이 직장 생활을 하는 데도 엄마나 형제들에게 어느 순간부터 간병은 자신의 몫이 됐다고 한다.


이 책은 병든 노후를 가족의 도덕적 의무나 국가의 제도 어느 한쪽의 책임론으로 전가하지 않고 그 사이의 시민적 역할과 연대를 모색한다. '가족도 타인이고 가족도 시민'이라는 명제로 돌봄 받을 '권리'에 대해 강조한다. 돌봄의 권리란 '권리를 챙기려면 의무를 다 해라' 할 때의 의무와 돌봄 받는 자의 죄책감을 배제한 순수한 권리라고 말한다. 가족 간병을 넘어선 시민 연대의 간병은 '돌보는 실력'과 '돌봄 받는 권리'에 같이 익숙해져야 하며 그것은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이며 누구에게 돌봄 받을 것인가에 대한 양방의 고민과 질문으로 이어진다.

병과 간병을 '시민'의 개념으로 자주 말하는데 가족 대안의 공동체적 간병을 말하던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 연상됐다. 마침 이 책의 저자들도 그 책을 몇 번 언급했는데 깊은 공감 속에서 읽었던 우에노 치즈코의 책에서 내가 가졌던 의문을 이 책에서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그 책에서 공동체적 간병론을 말하면서 자신과 지인, 취재원을 통해 긍정적 모델이 될 연대 간병 케이스를 예시한다. 당시 그 책을 읽었을 때 시민적 연대 간병의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책 속의 케이스가 평소 인간관계의 폭이 넓고 사회적 활동이 많은 엘리트 여성으로 한정돼 있어 예시 모델의 한계에 의문을 가졌었다. 교육, 경제, 환경 등 여러 요인으로 젊은 날의 스펙이나 대인관계가 협소한 중하층 계급의 간병 연대는 누가, 어디서 하나?라는 질문이었다. 그런 연대는 공동체 연대라기보다는 개인의 인맥과 사교성에 기댄 것 아닌가? 우에노 치즈코의 직설적 문체와 날카로운 사유를 좋아하지만 역시 엘리트 페미니즘, 진보의 한계인가?라는 아쉬움에 대해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전희경이 답한다.


"대안 가족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대안"<박혜경/가족을 넘어선 페미니즘.
한국 여성민우회·지성사>를 인용하면서 '대안가족'과 같은 단어는 가족을 반드시 참조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한다. '친한 사람을 돌본다'라는 생각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돌봄은 상당한 정도로 개인의 인간관계 역량에 달려 있게 된다. (물론 우리는 밉살맞은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꼰대'에게도 돌봄은 필요하다.).... 서로 돌보며 사는 사회에 대한 논의들에서는 '우정과 환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는 이 역시 '시민'의 개념을 개정/재구성하고 탈가족화 된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정은 여전히 지나치게 개인의 사회성에 기대고 있고, 환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남용되거나 고갈되거나 착취되기 쉽다는 점에서 돌봄을 공적으로 다루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
위와 같은 책.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전희경


책에서 가족 간병의 대안으로 제시한 '시민 연대 간병'의 모색은 많은데 그 예시, 사례가 없음이 아쉬웠지만 한국 간병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현실일 것이다. 글을 읽으며 저자들이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책과 자료를 구하고 읽은 것인지 짐작됐는데 나도 이 책에 언급된, 언급되지 않은 몇몇 책이 떠올랐다. 전반적인 주장과 내용의 유사성에선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삶》이, 부분적인 면에선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가 생각났다.

이 책을 읽을 때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같이 읽고 있었다. 글 속에 소재의 유사성이 있다는 걸 알고 읽은 것은 아니고 그저 밀린 책 중에서 장르가 다른 책을 같이 읽은 것인데 우연하게 겹쳤다. 두 책을 거칠게 정리하면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란 사회과학 도서의 주제와 특정 소재의 폭을 넓혀서 쓴 소설이 《딸에 대하여》이고, 《딸에 대하여》의 여러 소재 중 한 소재를 뚝 떼어 전문화한 것이《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라는 율라비스의 말을 인용한 페이지에선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속에 나오는 '필연적'이고 '개연적인 빚'이 연상됐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다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자는 대목이다.


(나는 빚)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생각해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 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백의 그림자>. 민음사. 황정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선 '건강한 몸'에 대한 주문과 강박이 유독 심한 한국 사회의 병증과 배경을 지목한다. 이 책은 코로나 사태 이전에 쓰인 것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드러난 병, 아픈 몸에 대한 한국의 편견과 차별적 현실이 바로 복기됐다. 콜센터 같은 서비스, 비정규 근무 직종에서 코로나의 집단 발병이 많았던 배경에는 '아픈 몸'을 숨겨야 되는 한국 사회의 그늘이 드러난 것이다. 재난 휴가가 공식으로 인정되지 않고 재택근무가 불가능하며 병가가 생계 위협이나 퇴직으로 연결되기 쉬워 '아픈 걸 들키면 안 되는' 직종에서 집단 발병이 많지 않았나.

아프면 바로 퇴출당해야 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책 속에선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건강해져야 한다는 사회는 누구나 아플 수 있는 사회보다 피로합니다. 아픈 게 티 나면 안 되는, 모두가 건강하다는 전제가 당연한 한국의 노동 실태를 보며 인터뷰에 등장하는 외국인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해요.
"왜 한국 사람은 아프면 일을 그만둡니까?"
같은 책.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 전희경이 '한국 여성 민우회' 글을 인용


책의 후기를 쓰면서 보니 네 명의 공저자 중 유독 전희경의 글을 인용 많이 했다. 그의 글이 네 명의 저자 중 내게 가장 잘 들어왔다는 결과치 같다. 출판사가 이 저자의 글을 맨 앞자리에 배치하고 글 분량도 많이 준 것도 나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런 책이 좋다. 제 마음만 얘기하는 글은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의 전시 같고 불행의 배경은 무시한 채 행복하라, 희망을 품으라는 행복 전도의 훈수 글은 위선 같다. 이런 글은 내 고통을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거울방 속의 자기 연민 대신 타인, 타자의 고통으로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은 무엇보다 인간의 취약함을 사유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불가능하다),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같은 책.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전희경

내가 이런 책을 읽는다고 이 책의 저자들처럼 '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쉽게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 두려움과 고통의 배경을 이해할 순 있다. 내가 이대로 늙고 병들어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가련한 신세가 될 것이라는 자기 연민에서 허우적대는 대신 타인, 타자가 모여 서로 좀 더 의지할 수 있는 세상에 관한 이런 글, 이런 글을 쓰는 사람, 이런 활동을 하는 기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후원할 수 있고 투표와 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는 있잖은가.

내가 꼽는 좋은 책의 기준 중 하나는 어떤 책을 읽으며 그 책이 말하는 사상, 언급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많은 참고 도서들은 ‘읽고 싶었다.’

이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을 다른 책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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