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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3-3 템즈강의 시체

가난한 시체는 깨끗하다.

by 보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 열린 책들



『가난한 사람들』3-3 가장 누추한 곳에 신이 있기를!



실연사는 극빈사보다 덜 아픈 죽음인가?


런던의 경찰들은 템즈 강에서 건져 올린 자살자의 시체를 보면, 사랑의 실패 때문에 투신한 사람들과 부채 때문에 투신한 사람들을 어김없이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다리의 교각에 매달려 살려고 발버둥을 치느라 손가락들이 거의 하나같이 찢겨 있는 반면, 빚 따위에 시달려 죽은 사람들은 몸부림을 치거나 뒤늦은 후회 같은 것 없이 시멘트 덩어리가 가라앉듯 물속으로 가라앉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20대 초에 읽으며 많은 밑줄을 그었던 자살의 명저, A.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살의 배경과 유형, 자살자의 정신세계 등 자살의 여러 사례를 문학(인)과 주로 연계시켜 쓴 책이다. 시인 최승자가 번역했는데 그의 불행에 이 책이 어떤 심연을 드리운 건 아닌가 상상해 본다.

인용한 저 문장 앞에는 사랑 때문에 자살에 ‘성공’ 한 것은 ‘운이 나빠서’란 말도 있다. 적어도 실연보다는 극빈이 사람에게서 생의 의지를 더 완전하게 박탈시키며 그 증거가 사후의 깨끗한 몸이란 얘기다. 죽음, 더군다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그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실연사는 극빈사에 비하면 ‘배부른 죽음’이라는 우회 같기도 하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과 한 해를 여는 1월 사이에 극빈을 이기지 못한 자살이 연달아 발생했다. 2019년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 대구의 한 주택에서 4인 가족의 주검이 발견됐다. 우편함에는 빚과 가스 요금 등의 독촉 고지서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장기 결석한 학생의 담임선생이 집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4인 가족의 차가운 시신은 가스 끊긴 냉방에서 오래도록 방치됐을 거다. 또 그로부터 불과 십여 일 뒤 새해가 된 2020년 1월 5일엔 경기도 김포에서 3인 모자 가족이 목숨을 끊었다. 생활고를 비관한 유서가 발견됐다.


예시한 저 기간인 2919년에서 2020년,1년 사이에 벌어진 일가족 자살은 70여 명이나 되는데 극단적 선택의 원인 대부분은 생활고로 알려졌다. 엄격하고 비현실적인 부양의무자 기준에 막혀 생계지원은 물론 긴급구호 자금조차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차한 '가난 증명서' 대신 죽음을 택한 사람도 있다. 가난 증명서는 전 남편의 경제적 무능을 증명하고 수시로 통장 뒷조사를 허락한다는 금융 거래 확인 동의서다. 또 가난한 자식이 부모를 내팽개쳤으며 오래전 연락 두절돼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는 등본 상 자식일 뿐이라는 불효자 증명서이기도 하다.


빈곤 사회연대의 활동


현행의 모든 금융, 복지 제도는 법적 다인 가족과 4대 보험 가입 근무자 위주로 돼 있다. 주거, 의료 지원은 물론 실업자 지원, 재취업 교육, 대출 등 모든 제도가 거의 그렇다. 이는 4대 보험 가입이 안 되고 근무 기간이 짧은 불안정한 비정규직과 소득이 불안정하고 폐업이 잦은 영세 자영업자 가족, 가족과 절연한 빈곤층, 중장년층 독거가구가 증가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구시대적 복지제도다. 가난한 가족은 다른 가족도 다 가난하거나 사이 안 좋을 경우도 많아 가족 간의 도움을 못 받거나 ‘금융제공 동의서’ 등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많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에겐 한층 더 어려운 요건이다.


<빈곤 사회연대>는 코로나 사태 전에는 이런 비현실적인 복지 제도를 규탄하며 ‘나, 다니엘 블레이크 법 폐지’ 구호로 거의 매일 거리 곳곳에서 시위를 했다. 황교안이 몽골 텐트 안 매트 위에서 배부른 투정을 하던 바로 그 옆에서 장애인과 홈리스가 고공에서, 땅에서 시위를 했다. 배부른 고위층의 단식 쇼는 매일 보도했지만 진짜 배고픈 사람의 단식 투쟁은 묵살당했다. 연말과 새해의 저 비참한 죽음들도 상위 몇 프로끼리의 밥그릇 싸움에 묻혀 곧 잊힐 것이다.

나는 <빈곤 사회연대>에 간헐적인 후원을 몇 번 하다가 최근 한 정당의 후원금을 끊고 이 기관의 정기 후원자가 되었다. 이 단체는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를 주축으로 한 빈민, 장애인 운동을 주로 한다.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고통?


언젠가 ‘추천 영화’ 얘기가 나온 자리에서 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아무도 모른다>를 말했다. 이런 영화야말로 학교 단체 관람용 영화라고 했다. 영화로 사회 공부도 하고 가난이 개인의 무능과 혐오적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도, 시스템의 문제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연민하고 연대하는 시민으로 자라게 해야 한다, 사회복지사를 비롯한 관련 공무원과 행정기관도 교육 과정의 하나로 의무 관람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의 한 청자는 저런 ‘우울한 얘기’는 광고만 봐도 시청 욕구가 떨어진다고 했다. 자신은 영화고 소설이고 고통이 전면에 가득한 것은 보기 싫다고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처럼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소소한 고통, 회상 속의 한 장면으로 보는 게 좋다고 했다.


고통을 웃으며 볼 수 있는가. 소소한 고통이란 무엇인가. 추억 속의 고통이란 결국 고통을 극복한 성공한 자의 후일담 아닌가. 그간 밝고 사람 좋은 그에게서 그와 나의 꼭 집을 수 없는 불편한 틈을 종종 느꼈다. 이날 그 말 몇 마디로 그 불편함의 실체를 좀 선명하게 느꼈다. 경제적 간극만이 아닌 어떤 시선과 태도의 괴리감이었다. 때론 직접적인 무시와 차별보다 순진한 불통에 더 절망한다. 적의도 품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절망감.

그림-바실리 페로프. 러시아


불행은 전염병인가?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불행의 전염성을 이렇게 말했다. 여주인공 바르바라가 편지 애인 마까르가 가불하고 빚 지고 체납한 방세로 자신에게 쓴 것을 안 뒤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이 나에게도 전염될까 봐 고통을 외면한다. 만약 고통이 전염병이라면 덮고 외면하는 것으로 끝인가? 전염의 배경과 퇴치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전염이 두려워 행복하고 편한 얘기만 듣는다고 행복해질까? 나는 오히려 그건 거짓 행복, 거품 같은 위로 같았다. 보고 나면 더 헛헛했다.


인생에서 가난이나 고통 한 번 안 겪어 본 선량한 사람들도 고통은 ‘구경’하는 것만도 싫다고 한다. 늘 가난해서 불행이 전염되기 쉬운 나는 왜 불행한 이야기에 눈과 귀가 자꾸 열릴까? 희극보다는 비극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우울 성향, 못난 것들끼리의 동병상련적 이해와 슬픔 때문일까? 불행한 자들끼리 가까이 있으면 그 불행이 전염될 수도 있겠지만 고통의 연대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폐지로 연명하는 쪽방촌 노인, 노숙자, 난전 김밥 장수들이 밥값과 병원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익명의 기부를 하는 그런 것도 고통의 연대가 아닐까. 구경하는 관객이 아니라 앞으로 내게 일어날 수도 있는, 내 일로 이입이 돼서 불행에 눈이 자꾸 가는지도 모른다.



인심과 연민은 비례하지 않는다


몇 년 전, 한 달에 십만 원씩 넣던 적금이 있었다. 20만 원 한도 내, 1년 만기인 서민형 소액 적금이었다. 인터넷으로 비슷한 금액대의 적금 종류 몇 개를 보다가 취지가 좋아서 들었다. 적금의 금리 일부가 만기 시 복지재단에 자동 이체되는 것으로 해당 은행과 보건복지부에서 ‘소액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만든 <기부형 금융상품>이다. 이 상품 소개에 나온 가입자 분포가 인상적이라 기록해 두었었다.

상품 가입자의 연령, 성별 통계를 보면 전 연령대에서 남성보다 여성 가입률이 월등하게 높고, 상대적으로 생활이 안정된 중 장년층보다 2, 30대의 가입률이 훨씬 높았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층이 오히려 가입률이 더 높다는 결과가 흥미로웠다. 나 역시 저 통계 수치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었다.


이자 기부형 적금의 성별, 연령대별 가입 분포


뉴스를 보다 사회적 약자, 시대적 이슈에 작은 성금을 종종 한다. 혼자 조용히 할 때도 있지만 지인, 친구들에게 정보를 공유하여 후원 독려와 참여를 권유하기도 한다. 혼자 할 때보다 여럿이 할 때 더 큰 보람과 의미를 느낀다. 이때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 약자들’의 참여도가 훨씬 높은 걸 여러 차례 발견했다. 내 수입의 몇 배를 버는 부자 친구들은 평소 인심이 좋아 주위 사람들에게 밥도 잘 사고 술도 잘 샀다. 그런데 내가 이러저러한 이슈나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고 커피 두 잔 값 정도의 소액 정기후원을 권하면 거의 다 뒤로 빠졌다. 반면 별말 없이 동참한 친구들은 대한민국 평균소득 이하의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형편의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부자 친구들의 저조한 참여를 보면서 ‘인심’이 ‘연민’과 비례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좋은 개인과 좋은 시민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내 부자 친구들은 아는 사람에겐 인심 좋은 개인이지만 타인,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좋은 시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후원 독려에 잘 참여한 가난한 친구 모두가 사회, 정치적 관심이 더 높고 시민 의식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뉴스도 잘 안 보고 먹고사는 누추한 피로를 드라마나 코미디로 풀면서 하루를 보낸다. 내가 두 부류의 차이를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경제적 약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더 쉽게 반응하는 것은 ‘연민’ 때문이었다. 사랑보다 깊은 연민. 동병상련적 연민이 가난한 주머니를 쉽게 열게 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남을 위해 돈을 쓰는 심리, 부자들의 빈자에 대한 시선 한 토막이 <가난한 사람들>에 나온다.



가난은 언제나 끈질긴 겁니다.


소설의 주인공 마까르는 방세 밀린지도 오래고 헤지고 구멍 난 옷과 신발도 바꿀 수 없는 극빈의 생활에 처해 있다. 그런 주제에 가난한 연인과 이웃을 보면 도저히 못 참아서 주머니에 마지막 남은 동전마저 다 내준다. 더 버틸 수 없는 상태가 돼서 생활비를 빌리러 다니던 그는 더러운 거리에서 구걸하는 어린 거지와 마주친다. 추위에 떨며 눈물로 얼룩진 꼬마 거지를 보고도 동전 한 푼 주지 못하고 돌아선 뒤 자기의 가난이 두 배로 느껴졌다고 통탄하는 장면이다.

“거지 아이가 <하느님을 위해서 한 푼 줍쇼>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안 주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괴롭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주실 게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어요……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하느님을 위해서>가 존재하거든요…… 부자들은 거지들이 자신의 박복한 팔자를 큰 소리로 호소하는 것을 싫어해서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끈질긴 인간들 같으니라니!>라며 불평합니다. 가난은 언제나 끈질긴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내는 신음 소리 때문에 잠이라도 설친다는 겁니까, 뭡니까!”


앞서 내 지인은 '소소하고' '웃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그런 고통, 고통을 따뜻하게 그린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가난은 '끈질긴 것'이다. 결코 소소할 수 없다. 따뜻하지 않고 차갑디 차가운 것이다.


그림-바실리 페로프. 러시아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구경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예요.


작년 겨울에 기초수급 가정의 학생에게 개인 후원을 하던 사람이 인터넷에 후원 후회의 글을 올린 걸 우연히 봤다. 후원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십만 원의 돈을 한 학생에게 후원해왔다고 한다. 돈 대신 학생이 원하는 물품으로 주기도 했단다. 그해 겨울엔 00 금액 한도 내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냐고 하니 학생이 ‘롱 패딩’을 말하더란다. 한 몇 년간 ‘국민교복’이었잖나. 거리엔 걸어 다니는 김밥(검정 롱 패딩)과 떡가래(흰 롱 패딩) 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한 집의 학생도 친구들과 같은 옷을 한 번 입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원자는 그 학생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기가 찬다느니, 나도 롱 패딩 없다느니 하는 게시글을 올렸다. 그 밑엔 그 글에 동조하고 기초수급자 가정을 비방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가난뱅이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국가 보조금과 문화카드를 받아 영화 보고 미술 학원 가더라. 우리보다 낫다..... 류의 '사촌 논' 댓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비 명세까지 평판받아야 되나. 문화카드란 게 원래 문화생활하라고 만들어 준 것 아닌가. 롱 패딩 건만 해도 후원자가 학생에게 원하는 걸 물어서 나온 답이잖나. 도스토옙스키는 자선(가)의 이런 모순, 위선에 대한 태도도 꼬집는다.

“....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에멜라를 무슨 자선 단체엔가 등록시켰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 한 푼 한 푼에 대해서 에멜라가 어떻게 쓰는지 공식적인 검열 같은 것을 하더래요. 그들은 자기가 돈을 거저 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구경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예요. 요즘은 선행이라는 것도 이상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더군요.....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소설 속 주인공은 일정한 유형이 있다. 가난한 수재형 미남, 여자에게 못되게 구는데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지닌 나쁜 남자형, 병약하고 무능한데 모성애를 자극하는 예술가들이다.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 괴테의 베르테르, <인간실격>의 요조 등등이 그렇잖은가. 반면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남자 주인공은 거의 다 비호감형 인물들이다. 못생기고 병약한 가난뱅이, 자기 학대에 절은 주정뱅이들, 과대망상과 원한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동정심에 눈먼 자들.... 그들이 좋아하는 여자들도 거의가 가난한 집 딸, 매춘부고 좀 괜찮은 집 여자다 싶음 히스테릭한 신경증 환자다.


나는 언젠가 이런 못난 주인공의 실패담에 천착하는 도스토옙스키를 ‘불쾌미의 대가’라고 혼자 이름 짓기도 했다. 그가 비호감 루저, 실패한 인간, 절망을 자꾸 전시하는 것은 불행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고통의 연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구호를 마음속에, 글 속에 담아서.


‘가장 누추한 곳에 신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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