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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필경사 바틀비

건물 안에선 건물을 볼 수 없다

by 보는 사람


단편 분량에 글자 수가 적고 행간이 넓은 데다 삽화까지 들어가 있어 앉은 자리에서 금방 읽었다. 책은 얇았으나 내용은 가볍지 않았고 빨리 읽혔으나 빨리 안 잊히는 책이었다.

우화, 반어, 환상성, 실존의 고독, 자본(직업) 사회 속의 소외, 불통, 변호사(법률가)라는 직업군, 우울한 블랙 코미디 같은 분위기들이 '카프카' 소설들을 생각나게도 했다. 다 읽고 책 뒤표지를 보니 '보르헤스'도 이 책을 읽고 프란츠 카프카를 연상했다는 몇 줄 감상평이 찍혀 있다. 출생년도를 찾아 보니 카프카가 하먼 멜빌보다 훨씬 뒤에 태어났다.


문, 벽


카프카는 인간 소외감, 단절과 불통의 도구로 '문'혹은 '벽', '성'을 많이 사용했었다.


나는 도착했다. 누가 나를 맞아 줄 것인가? 누가 부엌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낯익은 느낌이 드는가?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드는가? 나는 모르겠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나 그것은 따로따로 한 조각씩 차갑게 서 있다..... 내가 그것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것들에게 무엇인가. 나는 감히 부엌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단지 멀찌감치 서 엿듣고 있을 뿐이다.... 문 앞에서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점점 더 낯설어지는 밤이다.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기라도 한다면 어떠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 역시도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사람과 같지 않을까. <귀향>

아침에 문이 잠겨 있을 때는 모두가 그에게로 들어오려고 하더니, 그가 문 하나를 열어놓고 있는 지금이나 낮에 문들이 열려 있을 때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바깥쪽에 열쇠까지 꽂아놓고 있었다. <변신>​

그림/하비에르 사빌라 <문학동네, 필경사 바틀비>


하먼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에서 이야기의 주 배경을 아예 '월 스트리트-벽의 거리'로 정하고 글의 화자는 주인공 바틀비와 '벽' 속에서 만나 '벽' 속에서 헤어진다. 월가를 가득 메운 건물과 건물 사이의 벽, 같은 사무실 안의 계급을 가르는 벽. 그런 사무실 안의 창 밖은 생명이나 풍경 하나 없이 오로지 벽만 보인다. '벽의 거리'에서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며 기이한 선언을 반복하던 바틀비는 또 다른 벽이 있는 교도소로 치워지고 그곳은 잔디마저 '감금'된 것으로 표현된다. 바틀비는 죽는 순간까지 벽 (안)에서 나오지 못했으며 그의 유일한 소일거리마저 '면벽공상'이다.


'벽'의 공간, 장소적 경계와 차단은 심리적 대화의 차단으로 이어진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상대(저쪽)의 말은 잘 안 들리고 불통과 단절은 상상, 소외, 편견, 단정으로 귀착된다. 작중 화자는 사람들 사이의 우발적 폭력 사건, 바틀비의 기이한 우울 같은 것들이 '인간미, 대화'의 장소로 상징되는 가정집이나 광장의 생활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미가 느껴지고 가정집이 연상되는 것들의 축복을 전혀 받지 않은 건물의 2층 후미진 사무실에 홀로 있는 상황ㅡ이었을 것이다..... 과민한 자포자기 상태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68)

​그런데 같은 공간에 마주 보고 있다고 많은, 깊은 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집이나 광장이라고 더 따뜻하고 개방적인 대화가 생성되는 것일까?

얼마전 오랜 지기들과 만나 대화 하던중 문득, 혹은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으로 모인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이야기에만 목마르고 급급하다는 것이었다. 상대방 이야기가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자기 얘기를 드밀기 일쑤였고 말하는 입과 마음, 듣는 귀와 마음이 불균형하게 떠돌았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대화 형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거나 묵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표나 쉼표 사이의 짧은 정적이 두려운 걸까, 할 얘기가 넘치는 걸까. 이야기 경쟁에 같이 참여한 날은 돌아올때 가슴이 헛헛했고, 듣는데 집중하며 주위를 응시하고 온 날은 귀가 멍멍했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예전에 어떤 정신과 의사가 덜 불행해지는 방법의 하나로 '하기 싫은 목록'을 작성해서 상위 순위부터 하나씩 '하지 않기'를 하면 덜 불행하고 조금 행복해진다고 한 적이 있다. 세간에서 '하고 싶은 것'의 성취와 꿈,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보다 더 많이 할 때였는데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선택과 실천'이라 눈여겨봤던 같다.

행복해지는 방법보다는 덜 불행해지는 방법이라는 화법이 현실적으로 와 닿았지만 내가 하기 싫은 목록 1위는 현실과 너무 멀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그 '하기 싫은 것'의 리스트 1순위는 '밥벌이'다.

오래돼서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그 의사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욕망은 희망이나 꿈과는 다른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타인의 삶과 비교해서 생긴 내게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관계된 것이 많고 그것은 현실적 내 능력, 처지 등으로 좌절되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의 산물인 욕망의 실현보다는 현실 가능한 한도에서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덜 불행해지는 현실적,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꿈과 희망을 쉽게 부르짖지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대답보다 '하기 싫은 것'에 대한 대답이 대체로 더 쉽고 빠를 것이다. 우리는 꿈이나 희망의 부재보다는 내외적 억압과 통제 때문에 쉽게 불행하고 피로해지는 게 아닐까?

필경사 바틀비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단순히 '하기 싫다'거나 '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경쟁과 평가주의 도시 삶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율적 선택도,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거부의 선택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바틀비는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무관심, 무응답인 채 하지 않겠다는 것(거부)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거부에 대한) 자발적 선택권'을 강조한다.

바틀비는 동료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먹는 것도 퇴근 하는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일에 '굶주린 듯' 벽으로 둘러쳐진 자리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하던(p27) 그는 입사 삼일 째 되는 날 느닷없이 상관과 동료의 모든 업무 지시와 협조를 거부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고?"
"안 하는 편을 택한다고요."

일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는 바틀비는 일을 하지 않으려면 퇴거, 퇴사를 하라는 것마저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고 선언한다.
인간적 이해와 동정심을 가지려는 화자의 대화나 도움도 거부하고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주인공 바틀비의 이상한 행동들에는 왜?라는 개연성이나 사연도 없고 앞, 뒤 맥락도 없이 이런 '기이한 상황이 어느날 갑자기 벌어졌다'는 식이다. 원인을 생략한 급작스러운 결과와 상황 전개, 비상식적이고 이해 불가한 주인공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의 발생은 카프카의 '변신','단식광대'등을 연상시켰다.



동정심과 혐오감


자발적 소외와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 필경사 바틀비의 기이한 언행이 요샛말로 '웃픈' 블랙코미디라면 화자인 변호사의 성격이나 심리는 흔한 우리들 모습이다. 그는 평생을 '내게 강 같은 평화' 로운 삶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줄곧 평탄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깊은 확신을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배심원 앞에서 변론을 하거나 대중의 갈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이 결코 없는, 야망이 없는 변호사들 축에 속한다. 그리고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한다..... 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 (9,10)​

지금까지는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슬픔밖에 겪어보지 못했다. (47)​


바틀비를 문학적, 철학적 범주가 아닌 보편적, 의학적 범주에서 '정상인'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우리 주위엔 바틀비보다 더 비정상적 사람도 많지 않은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을 현실에 소환한다고 할 때 오히려 비현실적인 건 바틀비가 아니고 화자인 변호사다. 바틀비의 비상식적이고 기이한 행동에 사무실 대표, 변호사라는 신분으로 합당한 여러 재제를 가해도 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을 상황임에도 화자는 번번이 속수무책이다.


사람이 전례가 없고 몹시 부당한 방식의 위협을 받으면 그 자신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34)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38)

이제 그는 내게 목걸이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하기 괴로운 맷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59)​

그는 글 속 내내 동정심과 인내심 많고 직원들에게도 합리적인 처우와 온화한 말투를 하는 좋은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자신의 세계가 침범 받지 않는 한도 안에서다.

나는 아주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오로지 이론상으로만 그랬다. (82쪽)

그림/하비에르 사빌라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사무실 내에 자신과 직원들을 가르는 '벽'을 만들고 그 문은 자기가 '열고 싶을 때'만 열 수 있으며, 자신이 부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빠르고 편하게 부르기 위해 창밖도 온통 벽 밖에 안 보이는 사무실의 가장 벽 구석으로 바틀비를 배치한 것도 '사람 좋은' 그다.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슬픔밖에 겪어보지 못한 그의 동정심이나 이해심 역시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바틀비를 사무실 벽에서 교도소 벽으로 철거, 유폐 시키는 순간에도 표면적으론 그 상황에서 빠져 있지만 심리적으론 이미 동참한 상태나 다름없고, 단지 그 양심에 가책 받는 그 '기분 나쁜' 순간에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작은 가책을 피하고 마지막 결정을 타인이 하도록 내버려 뒀을 뿐이다.


이 책 50 쪽에 보면 '동정심'에 대한 화자 생각이 나오는데 대체적 인간 심리의 일면, 이중적 사회관, 어쩔 수 없는 타인의 고독이 잘 나온다


내가 최초로 느꼈던 감정은 순전한 우울과 진심 어린 동정심이었다. 그러나 바틀비의 쓸쓸함이 내 상상 속에서 점점 커져갈수록, 그만큼 바로 그 우울은 두려움으로, 그 동정심은 혐오감으로 녹아들었다. 비참함에 대한 생각이나 비참한 광경은 어느 선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동시에 끔찍한 진실이다...... 그것은 과도한 구조적 악을 고칠 희망이 없다는 데 기인한다. 동정심이 효과적인 구제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상식은 영혼에게 동정심을 떨치라고 명한다..... 고통받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이었으며 나는 그의 영혼에 닿을 수 없었다.



자발적 소외, 소극적 저항


책 첫 부분에 나오는 월스트리트의 풍경 묘사를 읽으며 그 문장과 꼭 일치하는 서술은 아니지만 정희진의 건축 풍경론이 생각났다.


전체는 존재하지도 않지만.... 조감도는 전경을 볼 수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체를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이 찍은 젓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외부에서만 보인다. 사회 밖, 틀 밖, 궤도 밖에 서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필경사 바틀비는 늘 '건물 안에서만 건물을 봤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고 선언한 바틀비는 자기 나름 '체계와의 자발적 불화(김영민)'를 집요하게 하지만 건물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은 '소극적 저항'이었다. 김영민은 '고독하되 고립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바틀비는 자발적 고독과 사회적 고립의 양 벽 안에서 '오래된 의자들처럼 무해하고 조용(71)'하게 죽어 갔다.


​사람들로 붐비다가 쓸쓸해진 광경을 홀로 지켜보는 바틀비ㅡ 그는 카르타고의 폐허 가운데 침울한 생각에 잠긴, 결백하고 변화한 모습의 마리우스였다.(47)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인 듯했다.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었다.(60)

​폐허가 된 사원에 남은 마지막 기둥인 양, 그만 없으면 버려질 방의 한복판에 그는 벙어리처럼 그대로 홀로 서 있었다.(62)

칸막이가 거대한 이절지처럼 접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헐벗은 방의 움직이지 않은 거주자였다(75)​

​"너무 많이 갇혀 있다니, 아니, 자네는 늘 스스로 갇혀 살지 않았나!"(80)


수신자를 찾지 못한 편지


책에선 바틀비의 기이한 저항, 성격의 이유나 배경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사후 알려진, 필경사 이전의 직업이 대충의 유추를 하게 한다. 그의 생전 직업은 '사서(死書) 우편물' 전담 직원이었다. '죽은 편지(Dead Letter) 전달자'- 편지의 주인들이 망자가 되거나 이사를 가서 반송조차 되지 않는 편지들을 소각하는 게 바틀비의 업무다. 태어나지 못한, 전달되지 못한 수많은 사연들을 묻던 바틀비는 행정 기관의 변경으로 어느날 갑자기 해고된 그 역시 수신 불능의 편지들처럼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사서(死書)라! 사자(死者)처럼 들리지 않은가!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절망하며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나오기도 한다.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95)

김영민은 모든 편지엔 어떤 형식이로든 '고백'을 담고 있는데 고백의 기능이 없는 편지는 이미 편지도 아니라고 했다.

숱한 사연들은 편지 봉투와 글자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떠돌다가 전달되지 못한 고백들로 남아 바틀비에게 배달된다.

엉뚱한 선물이 배송되거나 소중한 선물이 반송되는 게 세속이듯이, 혹은 그 모든 선물은 결코 수신자를 찾지 못하거나 아무나 그 선물의 수신자를 자처하는 구조가 세속이듯이, 그렇게, 그의 의도는 세속의 간극에 막혀 외출하지 못한다. <김영민.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농담 중에서>

타인의 송사문을 지루하고 반복적으로 필사하는 필경사, 반송도 안 되는 편지를 소각하는 死書라는 두 직업은 다 '자기 이야기'가 없는 일이다. 남의 사연, 남의 이야기를로 밥을 버는 직업이다. 생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거부하며 남의 이야기만 듣고 썼던 바틀비는 죽고 나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간신히 남겼다. 노동과 소통 모두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다가 감금된 잔디 위에서 두 눈을 뜨고 죽는 마지막 장면은 대기업 정문이나 국회 앞에서 거대 권력에 저항하던, 아무도 보지 않는 '1인 침묵 단식 시위' 의 쓸쓸함, 무력함과 겹쳤다.

이 애수 짙은 블랙코메디는 (흑백) 영화에 참 잘 어울리겠다 싶어 혹시나 찾아 보니 프랑스 (모리스 로네 Maurice Rone감독 1976), 영국 (앤소니 프리드먼 감독 Anthony Friedman 1972), 미국 (조너선 파커 감독, Jonathan Parker 2001)에서 만들었다는데 검색 정보가 하나도 안 나오는 거 보니 한국엔 개봉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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