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링크의 지난 포스팅은 그간 이래저래 들린 서원 방문 현장기와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것에 내 생각을 더해 쓴 것이다.오늘 쓸 이야기는 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란 책 속 내용을 부분 발췌, 인용했다. (60~70쪽)
학교 때 배운 역사 교과서나 TV 드라마와 영화, 그 밖의 역사서 대부분이 왕들과 그들을 둘러싼 인물과 사건, 연대기 중심이었다면 이 책은 문화와 사회사 중심이다. '서원'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서원에 대해서 듣고 알게 된 대부분은 서원의 시초, 출현과 철폐 배경, 철폐령에서도 제외된 서원에 관한 것들이다. 이와 관련한 주세붕, 이황, 흥선대원군 등등 당 시대의 권력자나 소수 엘리트 계급 몇이 언급되지만 실상 '서원의 생활과 문화'에 대해서 알려주는 역사 얘기는 잘 없었다.어느 서원 누가 세웠고 왜 세웠고 왜 없어졌는지는 많이 듣고 열심히 외웠지만 정작 서원 내의 생활과 문화는 어떤 것인가? 는 들어보기 힘들었다.서원의 공부나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속의 위계나 시대적 특혜 같은 것은 있었나? 같은 실질적 생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거의 없다.요즘 말로 고치면 어느 고등학교, 대학교를 누가 세웠는지는 많이 듣고 외웠지만 정작 그 학교의 교육과정은 하나도 모르는 격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는 이처럼 소수 권력자와 명사들 중심의 인물사, 주요 사건사, 연대사 위주로 기술된 기존 역사서에서는 보기 힘든 그 시대의 문화, 사회, 생활상 중심으로 기술했다.
1권을 읽고 재밌어서 2권도 읽었는데 이 출판사에서 나온「...... 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 싶다.
앞 포스팅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조선의 성균관이 지금의 서울대 같은 국립대라면 향교는 경북대, 부산대 등등의 지방 공립대일 것이고 서원은 지방의 명문 사립대에 해당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넓게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나 그 범위나 학제를 좀 세부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성균관이 국립대학, 향교가 공립 중고등학교(경기고/경북고/부산고 같은), 서원은 지방 (명문) 사립고 (민족사관학교나 거창고 같은)에 해당되는 같다. 결국은 성균관을 가기 위한 엘리트 중고교 과정이 향교나 서원이라는 거다.쉽고 거칠게 말하면 경기고, 민사고 같은 명문 사립고를 가는 대부분의 이유는 서울 국립대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란 거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이런 명문 중고를 가려면 대부분은 일단 정규 초등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서당이 그런 초등 교육 기관이다.
□ 서당
조선의 공교육은 중(고)등 교육기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밑의 초등 교육 기관인 서당은 다 사설이다.서원, 향교는 거의 양반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으나 서당은 평민 자제도 다닐 수 있는 그 시대에선 비교적 평등 교육의 산실이었다. 서원이 귀족에 의한, 귀족을 위한 학교였다면 서당은 지방 양반과 지역민의 합작으로 만든 교육 기구이며 그 기본 단위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지역 유지와 동네 사람들이 뜻을 맞춰 주거 구역 단위(아파트 몇 세대 이상은 1 학교, 2개의 근린주거구역 단위에 1개의 비율로.... 등)로 학교를 만드는 것이다. 나랏 제사나 지방 법규, 사회적 규범의 제약 등의 설립 조건이 있는 향교나 서원과 달리 서당은 장소나 시기에 따른 다양한 유형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서당의 유형
서당의 유형은 사숙과 독서당, 동계 서독으로 나눌 수 있다.
1. 사숙과 독서당
문벌가, 권세가들이 자제 교육을 위해 개인 훈장을 초빙해서 교육 비담을 자가 부담하는 것이다.오늘날의 홈스쿨링 개인 가정교사 비슷하겠다.
김득신 <겨울채비> 본문 32쪽 ( 그림 오른쪽이 독선생 모시고 공부하는 그림)
2. 동계(洞契) 서당
양반과 유력 자산가가 학계, 학전을 자체 조직, 경영하는 문중 서당으로 마을에 서당을 짓고 자신들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것이다.오늘날 돈이나 뜻있는 자가 사립교를 지어 자신들의 자제와 친척들을 모교 선생으로 우선 채용하는 것과 비슷해 뵈지만 선생 채용(훈장 초빙)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먼저 오늘날은 선생을 하려면 교육대나 사범대를 나와서 교사 자격증을 따야 되는 객관적 요건이 있어야 되는데 당시의 훈장 자격은 좀 달랐다.직업적 '유랑 지식인'이나 마을의 촌로 중 유식한 이를 초빙, 선택했다는 것이다.얼핏 김삿갓이 떠오르는 '유랑 지식인'이라는 어감이 참 자유롭고 멋스러운데 요즘과 다른 학문의 기준이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목이다.
요즘은 취업이 하도 귀하고 어렵다 보니 퇴직 연금 빵빵하고 강제 해직 없는 평생 꿀 자리 선생이 일등 며느리감이고 교육대 나온 이들이 사립 중, 고교 선생으로 가려면 수 천만 원의 취업료를 내야 한다는 말 들은 지도 한참 되었는데 조선의 훈장 급여 라야 고작 양식으로 쓸 쌀, 땔감, 의복에 불과했다니 오늘날 '현대판 노예' 대우와 별 다름없다.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존경심 말고는 없는 실질적 대우가 저 모양이니 오늘날처럼 '돈 주고' 선생질하려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겠다. 당시의 훈장 수업료가 몹시 열악했던 것은 학부형이 내는 수업료가 없었다 1은 점도 작용했을 터인데 초등 과정만 보면 현대의 무상 공교육보다 교육복지가 앞섰다. 국민학교 육성회비 세대로서 그것도 내기 힘에 부쳤던 나로선 참 부럽다! 내 어릴 때도 한 기억이 있는 '책거리(책 마수거리라고도 했다)' 행사의 시초는 '숙식제공' 외에는 아무런 수고비를 주지 않았던 조선시대 훈장의 특별 상여금!이었던 셈이다.
어느 기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밥은 먹으니 눈물이 밥이다'라는 체험한 자만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을 읽었는데 지금보다 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엔 선생들의 가정방문과 스승의 날도 내겐 빚 같았다. 그 빚엔 월간지, 계간지, 단행본 2이란 별칭도 있었다. '스승의 날' 기념식도 없다는 각박한 뉴스를 보면서 좀 안타까운데 오늘날 학교, 스승과 제자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는 학교, 선생, 학부형 공동의 책임이 클 것이다. 내 이런 이야기는 모든 선생을 일반화한 것은 아니고 어느 시대, 어느 때나 좋은 선생은(도) 있었다.
3. 문중 연립 서당
동계(문중) 서당의 업그레이드 버전 되겠다.동계 서당이 한 문중 단위의 학교라면 문중 연립 서당은 각 마을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교육시키는 특별 서당인 것이다. 요샛말로 특목고나 영재반쯤 되겠다.이런 고급 서당은 서원과 상호 연관됐고 학생들이 숙식하며 공부할 수 있는 방도 있으니 당연 고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경비는 문중별로 추렴, 공동 관리했단다.
김홍도-서당도(18세기)
□서당 교육 오늘날의 초등 교육기관에 해당한다.
1. 교육자 구성- 훈장. 접장, 학도
⊙ 훈장- 자격과 학식 정도의 차이가 심함. 문중의 위세나 자본 유무에 따라 훈장 학식의 유무가 큰 차이를 내지 않았을까?
⊙ 접장- 오늘날의 조교. 보조 교사 학생 중 나이와 지식 많은 자 중에서 선출해서 '接'의 장으로 세운 데서 유래.
⊙ 학도- 7,8세 입학. 15, 16세에 수료 후 대부분 향교 입학.
2. 교육 내용- 강독, 제술, 습자
⊙ 강독- 복습의 과정으로 소리 높여 일고 질의응답하는 것 ⊙ 배강(背講): 암송 낭독 ⊙ 면강(面講): 책을 보고 낭독
학동의 능력에 따라 '완전 학습'을 지향. 글의 뜻을 깨치는 방법에 주력했고 '계절에 따른' 교과 내용 변화, 연령에 따른 놀이 학습을 시행했다. 서당의 교육 과정을 대략 살펴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서적인 면의 '계절에 따른 교과 내용'과 기술적인 '완전 학습'이다.
'계절에 따른 교과 내용' 교육이란 말은 일전에 버스 속에서 들었던 '72시간을 하루같이 써야 된다'던 어느 중학생의 말과 무척이나 대비되는 교육이다.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고 사흘을 하루같이 써야 되는 기계적 학생으로 살아가는 요즘엔 참으로 '화선지에서나 보던 수묵화' 같은 얘기일 것이다.'계절에 따른' 그런 정서 교육들이 글 쓰는 사람이 화가도 되고 건축가도 되게 하는 '예술의 생활화, 일상화'가 된 원동력 아니었을까?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때까지 땅과 쌀과 노비와 연금이 나오는 세습제 양반들의 신분적 여유가 그런 멀리 보는 교육을 가능케 한 배경이기도 할 것이다. 유명한 서원 어디라고 가보면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다 배산임수의 위치에 주택, 상가와 떨어진 고급 고시촌, 사학이다. 먹고 살 걱정 없이 풍광 좋은 곳에서 비슷한 부류의, 비슷한 고민만 하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인 곳에서 공부가 안 되고 안 하기가 더 어려울 거 같다.
또,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여럿이서 합동 강독을 하고 질의 대담식 공부를 하며 책 전체의 뜻을 완전히 이해해야 다음 책으로 넘어가고 어릴 때 배운 그것을 평생에 걸쳐 다시 보고 읽으며 그 뜻을 되새기는 '완전학습'은 많은 것을 더 빨리, 더 많이 배워야 '겨우' 살아남는 요즘엔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런 꿈같은 배움을 한 번 가져 봤으면 좋겠다.
어느 교양 예능 프로에서 뇌과학자 정재승 박사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손을 많이 쓰던 시대의 예술 활동과 기계(컴퓨터)를 많이 쓰는 시대의 예술 활동을 비교한 결과 기계를 쓴다고 창작 능력이 떨어진다는 '과학적' 입증은 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예를 들면 붓이나 연필로 글을 쓰던 작가, 손으로 악보를 그리던 음악가와 컴퓨터로 악보를 그리는 음악가 사이의 예술 창작력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말이다.기계의 발달로 전화번호 외는 능력과 노래 가사를 못 외우게 된 대신 검색이나 다른 것을 사용하는 기능이 생긴 것이니 인간 뇌나 창작 영역이 '퇴보'한 것이 아니라 기계 사용이나 '검색'등의 '대체능력'이 생긴 것이라는 말이었다.
일부만 동의되는 말이었다. 능력이 대체된 것일 뿐이라는 그 기능이 과연 퇴보가 아닌 대체일까?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고장 나면 깜깜이 막막이가 되는 내 현실을 대체해 주는 것은 내 기억이 아니라 결국 기계 아닌가? 나는 내 기억에 의존하고 그 기억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바이러스 점검이나 예방 등의 기계 보수, 유지에 더 신경 쓰는 것은 아닌가? 폰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꼭 필요한 약속만 하고 그 약속은 잘 안 깼는데 요즘은 약속을 너무 쉽게 하고 너무 쉽게 깨지는 않는가?
아날로그 한 창작 도구를 쓴다고 디지털 도구를 쓰는 사람보다 창작 혼이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은 공감해도 그 도출 결과는 너무 기계적 산술적으로만 보는 같았다.주로 '작업량'으로 비교한 것 같은데 예술적 완성도나 집중력 면에서 오늘날의 문학, 음악, 미술, 건축이 수백 년, 수 천년 전과 비교할 만한 것이 몇 있을까? 예술에 대한 평가가 취향, 세대에 따라 다른 판별이 나오고 주관성도 강하며 역사 평가처럼 예술적 가치 또한 먼 훗날이 돼야 더 정확한 판단이 나올 것이다.
나는 손이나 입을 사용하는 신체 감각 기관의 사용이 인간의 예술 능력이나 뇌에 좋은 자각을 준다고 생각한다.눈으로만 책을 읽어도 문장이나 책 한 권을 통째로 외는 수재, 천재적 인간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고 대부분은 손으로 쓰거나 입으로 읽으며 외울 때 효과가 좋다. 왜 옛날 선생들이 빈 종이 연습장에 '빡빡 숙제'같은 이상한! 숙제를 냈겠는가? 왜 노래 가사는 속으로 읽을 때보다 부를 때 더 빨리 외워지겠는가?
언제나 시대와 도구, 조건을 뛰어넘는 천재적 예술가들은 있지만 극소수 천재들이 아닌 보편적 예술가나 예술가적 소양의 발달은 졸업하고 나면 잊어버릴 기계적,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계절에 따른 학습'이나 한 권을 완전히 이해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그런 '완전 학습'아닐까?
구한말 서당도(1900년대)
신분제 중세 봉건 시대에 그나마 신분적 차별 없이 교육받을 수 있고 고급 엘리트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진 서당 교육은 19세기 들어 정체, 퇴보한다. 과거제의 부정과 매관매직의 부패, 일제 침략과 근대화 교육 정책의 변화에 따라....
(계속.....)
1. 수업료는 없었지만 하과(夏課)라는 계절 수업의 시작 때는 집집마다 별도 수업료를 냈다고 한다. 2. 지금은 초중교 학교 내에서의 촌지가 거의 사라진 같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땐 그런 일이 제법 많다는 후문이 많았다. 해서 이런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학교 방문 시 학부형들이 뇌물성 촌지를 드릴 때 봉투만 드리긴 이목이 있으니 책에 끼워서 드리는데.... 월간지-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거나 드리겠습니다. 계간지- 계절에 한 번씩! 단행본- 언제 다시 올지, 들릴지 모름! 그래서 월간지를 끼워 주는 학부형이 가장 반응이 좋았다는 전설 같은 찌라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