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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ug 02. 2020

제가 왜 참아야 하죠?(1) 아버지의 이름으로

딸 같아서 그랬다

페미니즘 관련 공부가 일천해서 그쪽 이론에도 무지하고, 잘 모르니 투철하지도 않다. 다만 여전히 성차별과 성희롱이 만연한 곳에서 나고 자란 여성으로 수많은 성범죄에 공분하고 피해자들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는 정도다. 성격과 여건 상 직접 거리로 나가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는 않지만 성범죄 사건에 대한 기사에 관심 기울이고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N번 방 처벌에 관한 국민 청원에 서명하고 여성 단체의 활동에 감사와 지지, 약간의 후원 등의 간접 동참으로 연대 의식을 미미하게 표출할 뿐이다.

여성 문제를 다룬 글을 보는 것도 지지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약소하게나마 읽은 여성학자, 페미니스트의 글은 주로 논문과 에세이의 중간 형태로 저자의 개인적 경험보다는 여러 기사와 통계를 많이 제시한 이론적인 글이었다.


박신영의 <제가 왜 참아야 하죠?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는 참교육>은 페미니즘 지식 저자의 직접적 경험이 연계된 글이다. 저자가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한 후 같은 피해를 겪은 동료 여직원들과 합동 고소로 2년여의 지난한 재판 끝에 승소해서 가해자를 실형 살게 한 기록들이다. 뉴스 기사상의 성범죄를 복기하고 공분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범죄 피해자가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을 본인의 경험담으로 기술한 책이라 실용성도 겸비했다.

물론 나도 이 책을 읽는(을) 당신들도 이 책을 활용할 일이 생기면 안 되지만 피해자들을 좀 더 이해하고 도울 수도 있는 책이다. 남자들도 같이 읽으면 좋을 같아서 여성 문제에 관심 있고 말이 통할 만한 남성 동지 몇에게 선물로 보내주었다. 이 책을 받은 남성 동지 한 분은 '좋은 사람 쪽으로 변할 수 있는 책이다. 고맙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책에 이 말과 상통하는 문장이 나와 반가웠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인간에게 잠재적 가해자다. 기본적으로 이 사회 문화의 ‘나쁜 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로 나쁜 물을 빼지 않고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를 하고 다니게 된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돼야 할 것이다. 관습화 돼 나도 몰랐던 내 속의 나쁜 물을 빼기 위한 도구. 내가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계와 성찰.

원래 책의 감상만 얹어 포스팅 하나로 끝내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살아오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성추행, 성희롱을 겪은 기억들이 우수수 지나가게 된다. 그런 기억들을 이 책과 얘기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아 시간과 마음이 되는대로 내 경험과 책 이야기를 곁들어 몇 편 계속 이어보려 한다.


        <제가 왜 참아야 하죠? 박신영. 바틀비.>



택시 안에서


7월 어느 날, 엄마가 종합 병원에서 정기 검진받는 날이라 평소 잘 타지 않는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이도 있지만 나는 딱 싫어한다. 택시 기사 대부분은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고 그런 아재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정치적인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든 불쾌한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연약한 여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빨갱이들 음모로 감옥살이해서 불쌍하다’ 거나 'ㅇㅇ나라의 16살 아가씨를 돈 XX 주고 결혼했는데 처녀가 아니더라. 먼 나라의 딸 같은 어린 아가씨를 돈 주고 결혼한 이유가 뭐겠냐? 속은 게 화 나서 국제결혼 알선 업체에 다른 아가씨 바꿔 달라고 따지는 중이다. 내가 안 억울하겠냐?'라는 따위의 얘기들이다.


그런 개저씨들의 개소리에 대한 내 반응은 “그렇게 여성을 많이 생각하심 박근혜 걱정보다는 집에 있는 부인과 딸에게 더 잘해주세요. 나는 그런 대통령 밑의 국민이 더 불쌍하고 내 어머니나 내가 더 불쌍합니다.”라거나 “아저씨 결혼담, 잠자리 얘기를 고객인 내가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고객 성희롱으로 회사에 항의하겠습니다.”로 옥신각신하며 언성 높이는 것이다. 그러다 중간에 내리는 일도 많았다.

나는 딱 질색인데 자식과의 대화에 목마른 부작용인지 엄마는 기사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병원 가던 그날도 기사가 건네는 말을 필요 이상으로 잘 받아준다 싶더니 아재들의 주제넘은 훈계가 얼씨구나 시작되었다.


“ 며느리 아니고 딸이죠?”

(엄니) “어떻게 알아요?”

“ 어른 병원에 모시고 가는 여성 중 며느리는 별로 없고 대부분 딸이에요. “ (아재 눈엔 아들이나 사위 없는 건 당연하고 며느리 없는 것만 보이지? 허긴 병원만 그런가? 쇼핑, 외식, 여행 동행자 대부분도 딸이지. 같이 맞벌이 하는 부부의 학부모 연락은 엄마에게, 형제가 다 같이 직장 다녀도 부모 병원행은 딸이나 며느리가 주로 조퇴, 휴가를 받아 같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그것도 비혼 자식에게 전가되는 양상이다.)

“아직 미혼이죠?” (나는 묵비권 행사로 폰에 머리 박았는데 엄니는 얼쑤~ 장단 맞춘다.)

“어떻게 알았어요?” (반 백 살 딸이 아직 아가씨 소리 듣는 게 반갑고 다행이다 싶은 반가움과 한심스러움, 억장 무너짐 등등 여러 감정이 섞인 톤이다.)

“딱 보면 알죠. 결혼 안 한 사람은 틀려요.”(뭐가 틀리는데?)

“ 아가씨가 아담하니 남자들이 좋아할 상인데 왜 결혼을 안 할까?”능력이 있나 봐요. 능력이 좋으니 결혼을 안 하겠지요.” (땡~ 능력도 없는 게 결혼 안 하고 있고요, 남자들도 별로 안 좋아합디다만 아재가 뭔데 내 신체 품평과 결혼 걱정을 합니까? 나 혼자라면 벌써 시베리아 벌판 만들어 입 닫게 했을 건데 엄니 땜 억지로 참고 있음. )

“남 하는 건 다 해봐야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남는 장사죠. 아무리 능력 있어도 아프면 외롭고 힘들고…..” (내 인생 장사 아재한테 상담받고 싶지 않거든요!)


는 자신이 못하는 잔소리 남이 대신해주니 속이라도 편한지 택시에 있는 30여분 동안 기사의 헛소리를 다 받아주었다. 같이 택시 탈 일이 있을 때면 타기 전부터 기사들과 말 섞을 생각하지 말라고 단속을 시켜도 안 된다. 얘기하느라 신호 놓치고 거북이 운전해서 평소보다 택시비가 몇 천 원 더 나와서 화가 두 배 됐다. 그날은 병원 오기 며칠 모녀 지간 냉전 끝물이라 두 손을 불끈 쥐고 참았다. 코로나 마스크로 입이 막힌 덕도 컸다. 업무 시간에 업무 외적인 주제넘은 간섭을 ‘어른의 친근하고 따뜻한 걱정’으로 착각한다. 제발 따뜻하지 말고 차라리 차갑게 거리를 유지하자.

인터넷의 국제결혼 알선 광고( 관광 업체가 인터넷에 공개 광고한 것이지만 특정 국가 비하의 소지가 있어 모자이크 처리는 내가 임의로 함)


지난번엔 엄마가 있건 말건 기사와 한판 했다. 택시 내 라디오 뉴스에서 평소 가족 회식도 자주 하던 미성년자인 친구 딸을 아르바이트 자리 소개해 준다고 데려가서 성폭행한 후 살해한 사건이 나왔다. 아 글씨, 이 기사 아재가 “아, 그러게 왜 따라가? 지도 뭘 바라거나 용돈이나 좀 얻고 뒤로 만나려고 그런 거 아닌가? 요즘 애들이 참 무서워요. 안 그래요?”라며 운전 중에 고개까지 뒤로 돌리고 우리 동의를 구하는 허튼짓을 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택시 기사들과의 대화를 싫어한다.)


“ 왜! 친구 딸 강간하고 죽인 놈 욕을 안 하고 죽은 여학생 행실로 비난하세요? 아저씨 딸이라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 지금 그 강간 살해범 두둔하고 잘했다는 겁니까? 이런 생각 하는 기사님 택시, 혼자라면 무서워서 어디 타겠어요?”


엄마는 옆구리를 찌르고 기사는 " 아따 아가씨 무섭네~"라고 머쓱해하며 입을 쑥- 닫았다. 그렇게 싸한 분위기가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내린 후 엄니에게 “그러게 택시 타서 기사들과 말 섞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버럭 했다.

여자들은 이렇게 택시만 타도 성차별적 발언과 성희롱에 노출된다. 며느리들 시어른 간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간접적 비난, 대통령을 공직자가 아닌 ‘여자’로 보는 인식( 진보 남성들이 박근혜의 업무 능력과 무관한 성 비하로 조롱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금전 거래로 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부끄러움은커녕 딸 같은 어린 여성의 처녀성 운운하는 늙은 아재의 뻔뻔하고 느끼한 개소리, 친구의 어린 딸을 강간 살해한 범죄자를 두둔하는 막말을 내릴 때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다. 나 같이 항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귀찮음과 각종 성범죄 사건이 눈앞에 지나가는 두려움으로 못 들은 척하고 빨리 내리기만 바랄 것이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살해당할 만했네!”라고 피해자를 탓하지 않지만, 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를 탓한다. 피해자 탓을 하는 이유는 피해 여성보다 가해 남성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딸 같아서"


남자들은 자기네들의 각종 성범죄에 ‘딸’을 참 잘 들먹인다. 딸로는 부족해서 ‘손녀’까지 등장시킨다. 늙은 기업 회장이 갓 입사한 신입 여직원 성폭행하고 ‘딸 같아서’, 전 국회의장이 골프장 캐디 성추행하고서 ‘손녀 같아서’, 시아버지가 며느리 성폭행하고도 ‘딸 같아서’ 교수가 제자 성추행하고도 '딸 같아서’ 목사가 딸 친구를 성폭행하고도 ‘딸 같아서’ 사회적 약자 계층의 신도를 상습 성폭행할 때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딸 같아서'의 예시를 다 꼽을 수도 없을 정도이다. 진짜 딸을 성폭행한 뉴스도 심심찮게 나온다.

남자도 성추행당하는 일이 있(겠) 지만 여성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거고 ‘아들 같아서’ 성폭행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읽다 만 성경 속에도 딸 강간, 딸과 부인을 가문과 신앙의 제물로 성 상납하고 아버지, 시아버지가 딸, 며느리에게 근친상간을 명령하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성경이 아버지 남자들에게 정당한 명분을 준 것인지 <왜 제가 참아야 하죠?>에서도 남자 가장의 권리엔 딸에 대한 (성적) 소유권까지 인정한 내용이 고대법에 등장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고대법에선 아버지가 딸을 강간하는 경우에는 다른 여성을 강간했을 때보다 가벼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생계 책임자인 가부장의 권리로 여자 가족을 사람이 아닌 '사유 재산'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지금도 직계 성폭행에 관한 처벌이 약한 이유라며 저자 페이스북 친구의 재판 방청 경험담으로 이를 확인시킨다.


저자의 페이스북 친구가 집안 재판 건으로 법원에 갔는데 재판 시간이 많이 남아 다른 판결 방청을 했다. 친구 아들을 강간한 아버지 판결이었는데 법관이 ‘왜 그랬냐?’고 하니 피고인이 얼떨결에 ‘딸인 줄 알고 그랬다는 답변을 하더란다. 생각지도 못 한 피고인 말에 방청석은 물론 검사, 변호사, 판사석까지 침묵이 흘렀고 “피고인은 딸에게도 아들 친구에게 한 행위를 한 적이 있느냐?”라는 판사의 질문에 피고인이 시인하더란다. 아들 친구는 15세였고 피고인 딸은 13세 미만으로 추정됐는데 법관은 피고인에 대한 추가 여죄 수사와 기소 명령으로 그날 재판을 종결시켰다고 한다.(104쪽을 정리해서 재인용함)


내가 들은 직계 성폭행 사건만도 적지 않은데 그중 하나를 옮겨 본다. 언젠가 외근 나간 동네의 식당에서 들은 얘기다. 점심시간이라 인근 직장의 근무자들로 식당이 북적거렸는데 간호사 서 너 명이 내가 앉은자리 옆 테이블에 앉았다. 밥 먹으며 하는 얘기가 바로 들렸는데 친구가 일하는 종합 병원에 온 한 환자의 얘기였다. 정리해서 옮겨본다.


친구네 병원 응급실에 성폭행당한 여고생이 왔다. 같이 온 보호자는 부모가 아닌 성폭력 상담소 직원이었고 환자는 고3인 친오빠로부터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해왔다. 피해자가 중학생 때 시작된 성폭행은 고등학생이 돼서도 지속됐고 괴로워하던 여학생은 이 사실을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 반응이 어이없는 게 "의대 공부하는 오빠가 스트레스가 많아서 풀 데가 없어 실수한 거니 네가 참아라. 밖에 말해 봐야 집안 망신이고 아버지 알면 난리 나니 오빠 시험 칠 때까지만 참아라. 내가 오빠 타이르고 수능 본 뒤 따로 분가시키겠다"라고 딸을 달랬다. 자립할 능력이 안 되는 딸은 어쩔 수 없이 참았는데 그 뒤로도 오빠의 폭행이 또 있자 성폭행 상담기관을 찾았고 직원과 함께 병원에 온 것이다.


내가 먼저 나오게 돼서 그 뒤에 오빠나 엄마가 처벌을 받았는지, 미성년자인 그 여학생은 기관이나 정부로부터 어떤 치료와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그 오빠는 훗날 환자와 간호사를 성폭행하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저 경우처럼 경제적 자립이 안 되는 딸을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뉴스가 많았다. 이 책 속의 인용에 의하면 한국성폭력 상담소에서 지난 25년 동안 매년 성폭력 상담 통계를 낸 결과 '아버지, 형제에 의한 직계 친족 성폭력이 16%'라고 한다. 신고를 못 해서 통계에 안 잡힌 수치까지 더하면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나는 ‘가족’이 들어간 구호 대부분을 별로 안 좋아한다. ‘고객을 내 가족같이’ ‘동료와 직원을 내 가족같이’ ‘회사를 내 집같이’라는 구호 아래 얼마나 많은 갑질을 미화시키고 은폐하냐 말이다. 성폭력 대부분도 그런 가부장적 위계 형태로 발생한다. 나이가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직급이 높은 남자 상사가 하급 여직원에게 성추행, 성폭행을 한다. 아버지가 '내가 돈을 벌어 너희를 먹여 살리니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너흰 따르고 참아야 해'가 '내 월급을 받는 너희는' '내 고과로 승진해야 하는 너희는'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딸 같아서 그랬다’라는 변명은 딸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던 역사문화적 DNA를 보여주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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