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탄 나체의 고디바 여인
'의미심장한 저격글 논란'
'도가 지나친 패션센스'
'OOO 연예인의 청순글래머 면모 과시'
인터넷 창을 켜면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침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내용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하고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궁금증을 자극한다. 특히 연예면은 정도가 더 심해진다.
다분히 해당 연예인이 욕을 먹게끔 유도하는 헤드라인들이 있다. 극 중 스토리를 바탕으로 연예인의 실명을 붙여, "OOO, 결국 버티다 못하고 사망"과 같은 기사를 보면 실소가 터져 나온다.
이 외에도 궁금증의 연기를 피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각종 성희롱이 가득한 제목, 타인의 아픔을 이용해 단순 가십거리로 전락시키거나, 그들의 개인 SNS를 샅샅이 뒤져 또 그것을 기사로 재생산해내는 기사 제목들까지.
그리고 결국 어떤 이는 악플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따라온다. 타인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이들의 심보와 부끄러운 인생이 첫 번째 원흉이지만, 악플러들이 활동할 수 있게끔 장소를 마련하고 그들을 부채질하는 기사 또한 그 책임에서 떳떳할 수는 없다.
기자들이 찍어내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는 마우스를 멈칫한다. '조금은 다르겠지' 하고 클릭해도 어김없이 타인을 이용하여 기사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의도가 뻔뻔히 드러난다. 그런 지면에는 화가 난 이모티콘을 누르며 뛰쳐나와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결국 해당 기사를 쓴 사람은 나의 그런 반응을 바란 것일 테다. 뜨거운 감자를 구워 굶주린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광고를 더 많이 노출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썩은 쓰레기 같은 글에 반응도 할 수 없는데 그저 조회수만 묵묵히 올려주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참을 인(忍)'을 이럴 때에 쓰기로 했다.
나 하나라도 그런 자극적인 판도라의 상자에 무관심하고 싶다. 온통 야단법석을 떠는 한가운데서 나만은 그저 '그게 뭐 어때서?' 하고 코웃음을 치며 지나가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넘어가 소란을 피운 사람만 멋쩍게 만들고 싶다. 관종에겐 그저 무관심이 약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최악의 무기를 투척하고 싶다.
동조하지 않고 일조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자극적인 기사들에 나의 궁금증을 채우지 않는다.
내가 궁금해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으로 해당 기사 조회수를 줄이고 싶다. 그렇게 더 많은 이들이 무관심하여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찾아 퍼 나르는 일개미들처럼 몰라도 되는 과도한 개인정보를 퍼 나르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행위를 멈추기 위하여 궁금해하지 않는 신념을 행한다.
1,043년 영국, 고디바 여인은 나체로 말 위에 올라선다. 영주였던 그녀의 남편은 자꾸만 더 높은 세금을 징수하였고, 이에 많은 농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고디바는 남편에게 세금을 내리길 간청한다. 남편은 고디바에게 나체로 말 위에 앉아 마을 한바퀴를 돌면 네 말을 따르리라 맹세한다. 그 여인이 마을 한바퀴를 도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 집안 문을 꽁꽁 잠근다. 궁금함과 호기심을 참고 그녀의 희생을 기리는 행동이었다.
궁금함을 뛰어넘는 이성은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디바의 나체를 몰래 지켜본 이가 바로 톰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peeping(엿보는) tom'은 관음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이 사회에도 역시나 톰과 같은 이들이 있다. 친구가 공유를 해줘서, 그냥 궁금해서, 떠있는 제목에 이끌려서 한 사람의 인생을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소비되고 마는 존재들이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을테다.
그 모든 것은 내가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파장을 내 선에서 끝낼 순 없는 것일까. 그렇게 하나하나의 결단이 모여 모두 다함께 보지 않을 신념이 있다면 결국 언젠가 그 흔들거림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