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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와 생각 Jun 15. 2022

맘충이가 정말 있나요?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를 위해

정지음 작가님의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직접 싸인본을 받아보았다. 책을 열자 지음이라는 연결된 두 글자는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출판기념 라이브 북토크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이 책을 산 이유가 있었다.

  '관계, 그 잘 지내기 어려움에 대하여'라고 적혀 있는 부제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관계에 대해선 잘 지내지 못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고 내가 관계에 관해 잘 지내고 있다면 이 책의 구매 결정을 단 번에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관계에 쿨한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말랑하여 쥐었다 폈다도 가능하고 가끔 떨어뜨려도 잊어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나는 언제 떨어뜨려 실수할까 몰라 다른 자세로는 바꾸지도 못하고 한 자세로만 공을 들고 서 있는 그런 사람이다.


맘충이편 아니 <프라푸치노를 엎지른 아기> 편을 읽어보았다. 맘충이라는 말은 내 기억에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책 속에서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 '맘충이'란 말은 먼저 어감부터가 이상스럽기도 하고 엄마가 된 이상 그냥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회피할 수만은 없었다.     '난 맘충이가 아니니까'라고 머릿속에서 바깥으로 홱 던져 버리기엔  할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다. 물론 맘충이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프라푸치노를 엎지른 아기>를 읽었을 때 카페에서 엄마 아빠가 시선을 놓친 찰나 두 잔의 음료가 아기의 의도 없는 장난? 에 의해 엎질러지고  젊은 엄마와 아빠는 아무도 맘충이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누구라도 그 공간에 있었다면 명확하게 느꼈을 만한 눈총에 의해 과도하게 주변  동서남북 네 번의 사죄를 였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친절한 직원이 사태를 수습하자마자 바로 아기와 젊은 부부는 그 공간에서 나섰다고 한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 어린이집 하원을 하고 바로 앞의 빵집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여름이라 아이가 좋아하는 주스를 골랐는데 나는 계산을 마치고 그 주스가 아이의 입으로 들어가기까지 유리병을 통제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아이가 유리병에 든 음료를 자기가 들고 간다고 가다가 빵집 바닥에 산산조각이 나도록 깨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실수는 누가 보나 내 것이 분명했고 아이가 유리에 든 음료를 들고 가다간 떨어뜨려 깨트릴 것이 충분히 예상할 만한 결과였음에도 나는 생각이 모자라 자신감이 무리하게 높아있는 아이에게 실수를 허락하고 말았다. 나는 여러 사람의 눈총은 아니었고 가게 주인의 냉철한 평가를 바로 들을 수 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아이의 손에 주스 유리병을 생각 없이 들려준  엄마에 대한 타박의 말이었다. 그리고 유리조각과 주스가 뒹구는 바닥은 아래 점원에 의해 아무런 싫은 내색 없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있었다.

  

아이와 아이 엄마에 대한 평가의 시선은 늘 존재하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별한 것은 아니다. 주변에 나온 아이와 아이 엄마에 대한 친절과 배려도 존재하듯이 평가하고 내 마음대로 개입하려는 시선도 심심치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결이가 태어나서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아기띠를 하거나 유모차를 슬슬 타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햇볕을 쬔다고 아파트 지나가는 통로에 일렬로 앉아 계셨던 할머니들이 있었다. 아기띠를 하고 지나갔던 것뿐인데 아기가 귀엽다는 말이 선행했거나 처음 건네는 인사의 말도 없었지만 '애 양말 안 신겨서 나왔네.'라는 평가는 보자마자 날아왔다. 그것은 걱정을 가장한 훈수와 평가에 가까웠다.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니 넘겼다. 그러나 같은 아기에게 똑같이 양말이 안 신겨져 있고 아빠가 아기띠를 하고 그 자리를 지나갔을 때 할머니들은 엄마에게 일침을 바로 날렸던 것과는 다르게 양말을 안 신겼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는 초여름의 날씨였을까? 갑자기 몰려온 더위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움을 느낀 나머지 투덜거림도 자연스럽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집 앞 마트에 가 보았다. 바깥 날씨와 다르게 마트 안은 시원한 냉장실 상태라고 할까? 아기가 추운데 나왔다고 걱정하는 말들을 들었다. 내 마음에 수용 가능한 어떻게 보면 친절에 가까운 말들이었다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유모차에 태운 아기를 밀며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또 한 명의 걱정인형이 말을 건네주셨다.

 

"유모차 앞에 시원하게 바람 나오는 미니 선풍기 있어. 그거 하나 사서 달아줘."



쿨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똑같은 날씨에 장소의 이동만 있었을 뿐인데 마트 안에서는 아이가 춥겠다는 평가와 마트를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아이가 더우니 미니 선풍기를 달아주라는 두 상반된 평가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느 장단에 춤을??

 걱정과 평가 그리고 훈수가 아주 잘 뒤섞여  오묘한 맛을 내는 그리고 주변에 존재하는 공기 맛을  것이다.

  

그리고 20년도가 되자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로 형성된 아파트 단지 안 가까운 어린이집들에는 대기가 차고 넘쳐서 도보가 가능한 거리이긴 하지만 아이와 함께 매일 등하원 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어린이집을 택했다. 더운 여름날 유모차에 태워 대로변을 쭉 걸어와 작은 횡단보도 두 개와 대로의 횡단보도 하나를 무사히 건너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려고 하던 참에 같은 아파트로 향하시는 나이가 조금 있으신 남자분께서 한 마디 하셨다. 애 유모차 태우지 말고 걸어다니라공. 그리고 조선시대 왕들이 잘 걷지 않아서 단명한 거라고 별로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자세한 설명까지 친절한 마음에 해주신다. 나는 그분의 공기같이 가벼운 훈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런 저항심도 대단한 고마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간단한 대꾸를 드렸다.


"네네~하지만 아이와 걸어서 집에 오면 집에 하루 안에 도착을 못할 수도 있답니다."


3살 아이를 걸어 다니게 해서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엄마로 이미 박제가 되어버린 나의 생각과 대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분은 걸어다닐만한 나이인데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엄마를 향한 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훈수를 두시고 햇빛이 내리쬐는 더운 날씨를 피해 서둘러 자기 갈길을 가셨기 때문이다.  


러나 3살 아이는 스트리트 훈계러처럼 더운 날씨를 고려해 집을 향해 최단거리를 선택하여 곧장 걸어가지 못한다. 엄마가 옆에 있어도 그렇게 하자고 말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전두엽이 발달해 있지 않아서 자극을 쫓아 움직인다.



그런데 왜  고작 3살 된 아이가 아직 고려시대도 모르는데 조선시대 왕들의 단명을 반면교사 삼아 한여름에 유모차에서 내려 800미터가 넘는 하원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맘충이란 단어가 아무런 고민 없이 쉽고 편하게 소비되는 세상은 건강하지 못한 일면이 있다. "알지 못함에서 출발한 혐오"는 그 자리에 그냥 멈춰서 있으면 안 된다. 알지 못함에서 출발한 혐오는 다시 돌아가 그 이유를 한 번이라도 알아보려고 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각자의 삶은 초고속 데이터 속도에 맞춰 단절되고 분절되어 있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산산조각이 난 유리파편을 모두  모아 하나도 틀림없이 짜 맞추는 것과 동일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맘충이를 소비하는 사람들과 스트리트 훈계러는 사실 큰 차이가 있다. 방금 초고속 데이터니 뭐니 단절, 분절 떠들어댔던 것처럼 이 두 집단이라고 하면 실제로 전혀 겹쳐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을 향한 걱정 반 그리고 비교적 진심이 담긴 시선을 갖춘 사람들이 스트리 훈계러들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예전에 마을 공동체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어린 아기와 돌보는 엄마들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향수병처럼 몽글몽글한 그 때의 마음을 꺼내놓는 지도 모르겠다.     



반면 맘충이로 오해받는 사람이 맘충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맘충이란 단어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육알못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람 간 단절율도 분절율도 특히나 상당히 높은 사회에 사는 1인이라면 나 같으면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기 전에 내가 모를 수 있는 빙산의 일각 아래의 빙산을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섣부른 선입견과   편견의 잣대는 들었다가도 조용히 내려놓는 것이 어쩌면 더 현명한 처사인지도 모르겠다.    


맘충이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잣대를 쫙쫙 긋는 사람들에 의해 한 순간에 맘충이로 소통의 여지없이 박제가 된 경우가 많다면 우리는 한 번쯤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오해와 혐오로 가기 전에 소통의 기회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ᆢ어딘가에 있는 희소한 존재를 표현하고 혐오의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맘충이란 단어가 소비되는 것은 대중 언어생활의 운용의 낭비가 아닐까 한다. 공공장소에서 아이 케어를 잘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고 판단이 드는 사람들을 따로 지칭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육아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두가 잘 사는 방향이 아닐까?   


누군가 나의 온전한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공공장소에 있다면 눈총은 조금 거두고 "이런 말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라고 먼저 말을 건네본다면 좋을 것 같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뭐지?? 싸우자는 말인가?

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말은 아니다.


우리를 위한 제안과 단순한 불만표출의 간극을 충분한 표정과 침착하고 부드러운 접근방법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며 메워야 하는 것이 항상 고민이다.


우리는 <익스큐즈  미>에 해당되는 말들과 행동 그리고 부드러운 사람간 완충의 말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를들어서 조선시대에는 어느 날 갑자기 바닷가에 표류한 하멜 말고는 excuse me란 말을 할 필요가 딱히 없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정서를 공유했으며 정해진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한 명제와 순리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모든 것이 다르다. 그리고 하루아침 자고 일어나도 또다시 모든 것이 달라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간 격차와 변화에 적응하는 가장 좋은 접근방법이 excuse me에 해당하는 태도들과 생각들인 것 같다. 풀어 얘기하자면 "너와 나는 다르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인간이야.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부딪친다는 생각이 드네. 우리가 좀 더 유연하게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없을까?" 이 정도의 생각이 우리의 보통 일상 언어생활에 충분히 녹아들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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