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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와 생각 Jun 13. 2022

처음부터 완벽한 타인-내 아이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를 위해

뚝배기 속에서 아직도 뽀얀 설렁탕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주차공간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들른 골목식당 대풍옥 설렁탕이란 곳의 사장님은 가게 이름의 느낌처럼 푸근한 인심을 보태서 음식을 내어 주셨다. 설렁탕 국물이 조금 식자마자 나는 그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2시가 다 되어 먹는 점심은 그런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40대에서 80대로 점프하여 눈꺼풀이 늘어져있었는데  뚝배기 속의 뜨끈한 설렁탕 국물을 쭉 들이켜니 주저앉아 있던 기운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아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결이는 한결이 일뿐이다. 나는 나고..'

  간 4년여 동안 내 심장의 정중앙에 꽂혀있던  아이를 뽑아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심장 정중앙에 꽂혀 있었던 아이의 존재는 나의 모든 시간, 생각, 노력, 계획, 인간관계까지도 고정된 틀 안에 머물게 했었다. 표본이 되어버린 채집된 나비는 정교하게 건조가 되어 아름다운 날개를 핀으로 고정하게 된다. 고정이 된다는 것은 그런 느낌일까? 그러나 내 심장의 정중앙에 핀을 꽂아 어느 한 곳에 고정을 시키려 한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의구심을  시도할 필요도 없이 아이를 낳았으니   키웠 내가 낳은 아이니 진심과 사랑을 다해 돌보았다. 그것이 그렇게 틀린 것만도 아닌 너무 당연해서 이 세상 누구의 눈앞에 갖다 주어도 틀린 그림을 찾아낼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이라는 심장 정중앙의 존재를 스스로 뽑는다고 해도 남들 보기에 별다르게 특별한 경험은 결코 아니었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후로 엄청난 신세계가 찾아오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오늘 마신 뜨끈한 설렁탕 국물이 내 뱃속에 들어와 갑자기 시간을 뛰어넘는 치유의 느낌과 든든한 포만감을 안겨주던 것처럼 내 아이도 보기만 해도 예쁘고 보기만 해도 정서적 포만감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당연한 주양육자 생활을 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아이를 마음의 정중앙에 넣어 놓고 뺄 줄을 몰랐다.  그래야만 할 것 같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ᆢ이상하리만큼 강력하지만 그런 강제적인 의무를 지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게 이상하리만큼 확실하다.

오늘 갑자기 아이 심장에서 뽑아버린 것도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설렁탕을 한 그릇 사 먹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아이가 내 심장 정중앙에 있든 그 밖의 다른 곳에 위치하든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일뿐인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몰려드는 육아에 관한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판단을 한 것뿐이고 아이 발달단계에 더 적합한 엄마와 아이의 적정거리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뿐이다.


 

나는 그동안 심장 정중앙에 아이를 꽂아놓고 내 아이가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 성향이라는 둥, 아무리 불러도 바로 네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둥, 나와는 mbti성향이 너무 다른 유형이라는 둥 어리석은 되돌이표를 매일같이 돌리며 살았다. 내 아이는 나와는 다른 완벽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였지만 사실은 나는 알고 있지 않았던 것에 더 가까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어리석은 마음의 도돌이표를 돌리고 또 돌리지 않았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 어린이집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으니 어린이집 갈 준비도 조금씩 할 법한데 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힘들어했고 코로나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 2년을 넘는 시간 동안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손 씻으러 가자고 매일매일 잔소리하는 상황이 몸에 걸맞지도 않았다. 아이는 아이이고 나는 나인데 매일 아침 눈을 떠 어색한 엄마라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는 아이마저도 내 심장의 정중앙에 꽂은 채로 하루하루 어쩌면 투덜거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는 '나 알아서 할 거야.'란 말을 엄마가 생각하기에 너무나 이른 나이에 그리고 자주 표현했다. 안전도 위생도 영양도 미디어 노출도 그 어떤 것도 결국엔 지켜보는 엄마가 없으면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것도 아이가 말한 '나 알아서 한다'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건가?? 그 말은 아이를 자신도 모르게 심장 정중앙에 꽂고 있는 엄마를 순간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색한 순간은 잠시만 느껴야만 했고  남들이 보기에도 적절한 엄마의 행동과 말들을 찾아 헤매며 아이를 마음 정중앙에 그대로 꽂은 채로 매일매일 짜증과 한숨으로 외줄 타기 하며 보내곤 했다.

 

그리고 마침 배고픈 차에 설렁탕 한 그릇을 후루룩 들이키듯 심장에 꽂은 줄도 몰랐던 아이를 빼내는 날도 어느 날 갑자기 왔다. 그렇다고  이전의 나를 어리석었다고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나 알아서 할게.'라아이의 말은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완벽한 타인'인 아이가 그 사실을 잠시 잊은 또 다른 '완벽한 타인' 엄마에게 건넨 당연하고 완벽한 의사소통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엄마 나는 이 사실을 아는데 엄마는 이것을 자꾸 까먹잖아!' 정도의 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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