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외국어로 찍은, 스토리보드 없는 브이로그
'즉흥'을 접두사로 내세운 공연에 대체로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는, 미리 설계되고 계획된 구조 안에서 예정해 놓은 허용치를 넘어서서 즉흥이 곧 작품 자체인 공연에 마음이 선뜻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주저는, 무릇 예술이란 재능과 긴 수련의 토대 위에 심사숙고된 선택과 소거의 결과물이라는 전통적 관념과, 이 조건과 과정이 결여된 위대한 예술을 마주한 실증적 경험이 없는 데서 비롯한다. 따라서 편견으로 가득한 내게 '즉흥'이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실연자의 면책고지에 그친다.
박창수와 치노슈이치의 프리뮤직은 "우연성, 불확정성과 재즈의 즉흥성이 결합한 장르"로 작곡의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음악을 표방한다. 악보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둘 중 누가 어느 피아노로 연주할지, 어떻게 시작하고 언제 끝낼지, 즉 공연에 대한 일체의 사전조율 없이 당일 현장의 영감에 몸과 손가락을 맡기는,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라는 시도다.
두 연주자는 서로 마주하는 두 대의 피아노 앞에 앉아 각자 그리고 함께 연주한다. 연주한다기보다는 건반 위에 실시간으로 음악을 조형해 간다. 긴장과 해소, 질문과 응답, 격정과 안식이라는 익숙한 구조적, 화성적 흐름은 원경으로 물러나고, 협화음과 불협화음, 조성과 무조성(無調性), 상대로부터 응답되거나 외면되는 완강한 연타들이, 그리고 건반 바깥에서 발원하는 청각적 사건들이 90분간 IBK홀을 가득 채웠다. 연주자와 청중 간의 소통이라는 선언된 취지에 불구하고, 과문한 내게는 마치 두 개의 자폐적 세계가 헐겁게 서로 팔을 겯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고쳐쓰기와 미스터치가 없는, 불확실성과 무오류성이 묘하게 공존하는 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나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51년생으로 70대인 치노슈이치는 공연이 후반에 다다르면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90분간 입구를 찾아 헤맨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프리뮤직은 어떤 기존 음악장르와도 이질적인 한편, 실시간으로 속절없이 전개되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그곳은 고쳐쓰기가 허용되지 않으며, 흔들리며 다가오는 미래는 우연과 본능적 반응에 따라 확정되길 거듭하고, 타인은 운이 좋은 날 간신히 피상적으로만 이해되거나 교감되며, 무수한 개별의 삶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단선궤도다. 그러고 보면 느슨한 아웃라인조차 없는 이런 극단적인 즉흥은 어쩌면 삶의 원초적인 면모를 가장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이 공연을 관람한 후 내가 이 장르의 애호가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낮아 보인다. 낯선 외국어로 찍은, 스토리보드 없는 브이로그에 비해 극영화는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음악의 토대가 되고 바흐로 대표되는 17세기 Baroque 음악이 100년 후 재조명될 때까지 '괴이하고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고 치부되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인류의 집단적 감성만큼 변덕과 비밀로 가득한 것도 없으니 이 또한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