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7. 슈뢰딩거 상자 속의 '아해'
“상자 속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섣불리 단정 짓지 마세요. 고양이가 살았을지 죽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단 말이에요.”
판도라가 용케도 뚜껑을 닫아
살아남은 ‘희망’, 아해에 새겨진 ‘내장 코드’.
황량한 사막(砂漠)에서 길 잃은 나그네가 해 따라 별 따라 발길을 되잡아 가는 것처럼,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혀서 막막(漠漠)한 순간에는
내 몸의 깊숙한 울림을 따라가면 얼마든지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어요.
그러므로 아해를 잘 지켜내는 게 주된 일이었지요.
내 생각이나 결정에만 반응하는 아해, 슈뢰딩거 상자에는 아직 꽃 피우지 못한 별 부스러기가 잔뜩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어
심연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세상이 나를 한주먹 거리도 안 된다면서 하수구에 처박더라도, 번번이 사람에 치이고 또 사랑에 배신을 당한대도
분한 마음을 삭이면서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야 했던 거예요.
돌아길 곳은 에베레스트산보다도 훨씬 높은 우주인데, 골이 얕아도 너무 얕아서 좀체 생각을 바꾸지 않으니까,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려고 크레바스로 추락하는 거거든요.
바닥에 떨어지면서 무지를 깨달아 고뇌하고, 고뇌하다 깊어지고, 깊어지면서 하늘을 보고 빛을 그리라고……, 그때 몸의 심부(心府) 온도가 차갑게 내려간다면 별 눈을 뜰 수 없어서 그랬던 거죠.
내일을 별로 여는 별지기가 내 일이니까.
‘내가 지키려 했던 건 목숨이었을까. 삶이었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목숨을 지키려고 성과를 좇고, 삶을 지키려고 성공을 이뤄냈는데 끝이 없으니까 공허함이 따랐어요.
인생에는 경제 논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무언가가 따로 있는데도
주객이 뒤바뀐 채 나의 부재(不在)로 나를 살았으니 무슨 말로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첫사랑과 헤어진 아픔을 술로 달래던 친구가 그 사람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데 그때 배운 술은 곁에 있다면서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듯,
어린 자식들 배 곯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한솥밥 식구(食口)는 어데 갔는지 돈벌레만 우글거린다면,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는 얘기니까요.
판도라 상자와 슈뢰딩거 상자.
세상에는 유독 공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조심해야 했어요.
판도라 상자는 하나둘 셀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어서 이해하기 쉽지만, 슈뢰딩거 상자는 맨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외면당했거든요.
숫자의 나열로 증명되는 성공에 열광하는 게 훨씬 쉽잖아요.
재미 삼아 영을 하나씩 붙여가던 셈꾼은 문득 자기 자리를 넘보지 못하는 자릿수를 발견했어요. 아무도 내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평균만 높이면 저절로 게임이 풀린다는 것도 안 거지요.
불안할수록 내달리는 심리에다 시선을 툭
한 번 쳐다봤는데 저마다 분주해져
손 하나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데다가, 더러운 손이 저희끼리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서 치고받다가 살 놈 죽을 놈 자동 정리가 되니 다들 바보 같이 보였어요.
두 손을 놓고 수수방관한 것뿐인데 세상이 불안, 불화, 부정, 부패, 부조리, 불만으로 가득 차고, 평균의 함정에 빠지는 사람들도 늘어났거든요.
꼭대기에 앉아서 군림하니까 세상을 다 얻은 줄로 알았겠지만 피해 갈 리 없는 병마가 저승사자 같이 덮치니 평소 가난한 사람보다 더 억울한 척 비명에 떠났어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무전여행을 하려니 겁이 더 났겠지요?
어쩌면 여기서 나는 영원히 이해받지 못할지 모릅니다.
남을 밀치지 않고는 평균값조차 유지할 수 없는 세상에 아이를 남겨놓고, 게다가 아이의 가슴속에 불을 지펴놓지 못한 채
저 홀로 ‘우물의 고요’가 되었으니 두 세계에 발을 걸친 괴로움은 외로움이란 보상으로 처리되겠지요.
그래도 그게 나의 길이고,
진심으로 절박하게 월동준비를 하려는 사람에게 혹여 힘이 된다면 이런 나라도 필요성이 있을 것 같아, 그냥 걷는 거예요.
아이가 어느 날 삶의 무상함을 알아 서글플 때 아기 때 따듯하게 안아 준 엄마 생각에 위로를 받고, 세상 부럽지 않은 길을 걷기를 기도하면서 걸어요.
정말 좋은 점도 있었어요.
세상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어 절대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영역을 보게 된 건 최고의 행운이지요.
분자의 연금술이 펼쳐지는 내 안의 다른 세계를 보게 되었으니까요.
실패만 거듭하다 삶에 염증(厭症)을 느끼던 순간이었는데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직접 봤으니
이번에는 삶, 목숨 그리고 나의 관계를 재배치해야겠다는 각성(覺醒)이 일었습니다.
머리를 뚫고 들어오는 빛 에너지는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전기 에너지로 바뀌어 세포에 흘러들었어요.
발끝 손끝까지 온몸에 전류가 흘렀지요.
하지만 노화가 멈추었다고 죽지 않는 황당한 꿈을 꾸거나 아이처럼 젊어지는 걸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사람의 명(命)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순수한 믿음이
늙어갈수록 치매와 욕창같이 염증(炎症)에 시달리다 가는 게 사람의 가치인가에 절망하다, 이게 다냐고 질문을 던져서 만난 '희망'.
그렇다고 어떤 프레임에 걸맞은 결과를 바라면서 추적한 것도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절대적 근원은 있을 거로 생각했고 그래서 자연을 탐색하였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특별히 어떤 종교도 없듯이 집단에서 멀어져 물리적으로 휩쓸릴 기회도 없는 데다, 단전이나 요가 같은 단련의 과정은 아예 없었으니까요.
분명한 건 나를 탐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명상의 주파수와 비슷해 아해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아해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고
나는 내 삶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아해와 함께 찾아내
상상력의 나래를 타고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삶이 이렇게 재미난 걸 모르고 떠난 엄마가 고맙고 가엽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