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엄마

3장 4.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까

by 엄도경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각자 갈 길을 갑시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고 그대들은 살러 가고.

어느 길이 더 좋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 거요.』 <소크라테스>




결정적인 순간에 엄마와 내가 갈라선 이유는 공교롭게도 같은 이유 ‘10⁻¹³, 막’ 때문이었어요.

엄마는 늙어갈수록 황량한 사막에 내다 버려지는 느낌이 너무 막막했대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처음 겪는 감정이라, 혼자서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쭈빗쭈빗 준순하다가 곧바로 되돌아간 거예요.

‘익숙함’으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로 막막한 우주에 내던져진다면

그곳에서 한심한 나를 내려보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가슴을 내리칠 것만 같았거든요. 그래서 준순하지 않고 ‘낯섦’으로 넘어간 거지요.



사막, 광야, 동굴은 모두 자가 격리의 공간

어디에 있든지 자발적으로 깊숙이 내면으로 파고들어 침묵의 소리, 아해가 원하는 게 무언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아해가 원하는 내가 되는 게 이번 생(生)의 지상과제 같아서…,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 것은 천 대의 유전자, 그러니까 나의 집단 무의식부터 가닥을 잡는 게 순서라 생각했지요.


혼자 있는 것은 홀로 ‘혼자’를 견뎌내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낯설던지!

무료하고 지루한 건 잠시,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더군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밤에 사막에 불어닥친 칼바람

텐트를 집어삼킬 듯이 춤추는 미친 모래의 광란 속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

내일이면 나는 흔적도 없이 모래 산속에 갇히겠지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얄팍한 정신은 무력감에 빠지고 그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얼마나 알량한지 돕기는커녕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든 것도 대책 없는 내 마음이었습니다.

외로움이 밀려들면 습관처럼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해 잡담으로 숨어들었을 겁니다. 수다로 나를 떨기,

알코올 중독자처럼 가장 나를 잊기 쉬운 방법으로 직행했을 테니 뭘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노년기도 어차피 혼자 있는 기간이었어요.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고, 새롭게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요양원에 간대도 그나마 있는 친구와도 작별한 채 빈자리를 찾아 낡은 몸을 맡기다가,

낯설기의 최상급인 우주로 가야 하는 수순이잖아요.

그럴 바엔 차라리 갱년기부터 슬슬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쉰 살에 ‘나 홀로 여행’을 감행했던 적이 있어요.

미국 대륙횡단을 해보려니 주변에서도 만류하지만 나도 겁이 나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가는 곳이라서 일주일을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 고민했었지요.

한 달 코스를 정해 하이 호스텔에서 숙박하면서 기차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서부에서 동부로, 북쪽으로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점을 찍고, 남쪽으로 뉴올리언스에 들른 후 다시 서쪽으로.

기차에서 잠을 자는 방식에 도보로만 온종일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했는데, 마지막에 보니까 거울 속에 웬 할머니가 있더라고요. 얼마나 고됐으면.

꽃피는 봄, 겨울의 눈 쌓인 새하얀 벌판,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세 계절을 한꺼번에 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기억에 남는 장면은 토론토의 한 쇼핑센터,

너무 추워 다리를 쉬고 있는데 곁에 앉은 동족 여자분의 한 마디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그, 여행은 친구랑 다녀야 재미가 있는 거지…….”

“……? …….” (지금 나하고 여행 중인데)




‘혼자’를 견뎌내는 ‘일’은

나의 주(主) 감정, 주로 어떤 감정 상태에 잘 놓이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의식상태를 살피고 계기를 잡아 기회로 만드는 시간.

하지만 어디서부터 기준점을 잡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고대부터 이름 붙여진 숫자를 끌어왔지요.

삶이 숫자놀음, 꼭 공놀이 같아서 그랬어요.


아주 작은 수로 표현되는 마음과 연금술, 몸(원자 반응로)을 선으로 쭉 연결했습니다.

어젯밤에는 내일 계약을 맺자고 하도 굳세게 약속해서 철석같이 믿었더니 자고 나니 손바닥 뒤집기.

도무지 속셈을 모르겠다고 흔히들 말하잖아요.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양쪽 모두의 몸에 빼곡하게 쌓이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세세하게, 어느 수준까지 내 감정을 살피고 있을까요?

마음은 얼마나 깊을까요? 거기에 내가 닿은 적이 있기는 할까요?

준순분의일.PNG

이익과 손해,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막-모호-준순’이란 일련의 흔들림이

10⁻⁹, 나노 수준에서 분자의 화학반응으로

10⁻⁵ 세포를 변형시키니……

얼마큼 쌓이고 쌓여야 겉으로 드러나서 병원에 가지요?


사회 문제는 너무 복잡한 데다가 또 노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므로 괄호 안에다 집어넣기로 하고,

불만, 불행, 불화, 부조리, 부패 때문에 밖에서 얻어온 홧불은 도대체 어떻게 꺼야 할지,

모두가 온화한 노후를 꿈꿀 텐데 말이죠.

노년기에는 노후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하잖아요. 자신을 보살피는 일을.

겨우내 아프지 않게 또 치매에 걸리지 않게 세포를 도와야지요.

그러려면 늘 따뜻하고 인자한 감정에 놓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으니까, 겨울이 숲 속에서 대청소를 하는 것처럼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아이는 덕분에 잘 살러 가게.

원소를 순수하게 간직하는 것은 몸의 최전선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엄마와 나의 차이는 단지 막 하나를 넘느냐 마느냐, 그거였거든요.

깊은 동굴에서 자기 성찰을 하는 도중에 빛에너지가 들어왔고, 어떤 계기에 점프할 때마다 달라진 파장으로 빛 줄기가 응답해서, 뜻밖의 동화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호흡을 따로 해본 일도, 특별한 자세를 취한 적도, 주문을 외우거나 에너지를 모으려고 힘을 준 적도, 아무것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저절로 머리로 들어왔다가 시작이듯이, 선 긋기를 하려니까 공부하는 게 다인데

그게 ‘혼자’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라고 철학과 과학을 한데 품고 있는 우주 질서에 탄복하다가, 우주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아이처럼 뛰놀게 된 거예요.

앉아있거나, 눕거나, 서 있거나 그저 고요만 하면, 밀물처럼 에너지가 들어오려 해서 일부러 다른 짓을 합니다.

이 글은 아이에게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없는 내용이어서 미리 쓰는 유언입니다. 동시에 지켜보고 있는 몇 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이고요.

그리고 ‘참 나’를 찾고 싶은 분이 어딘가엔 분명히 계시리란 믿음이 있거든요.

모래, 바람, 추위, 해, 나무, 구더기…… 세상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었다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는 같은 사람들,

얼마나 인연이 깊었으면 사람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냐고 서로를 끌어안아

인간임을!

내 안의 양자 상자 ‘아해’가 부탁하는 거 같아요.

너무 존귀한 존재들이라.








(낯선 방식의 소통으로 새로운 감정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겨울 안에 마치려니 시간에 쫓기고 드래프트를 올리니 얼마나 죄송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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