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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Nov 09. 2022

방랑의 여정- 마녀와 어머니

반복은 고문이다.


술에 취한 나는 한밤중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내게 고문을 당했다. 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문밖에 없었다.


소문을 들었다. 소문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중앙아시아에는 마녀가 산다. 그런데 아무도 그 마녀의 거처를 모른다.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대 도시 인근 산속에 산다는 얘기도 들렸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동굴 속에서 산다는 소문도 있었다.


마녀가 주목받는 것은 에너지와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정 때문이었다. 마녀와 잠깐이라도 접촉한 자는 한동안 끝을 모르는 열정에 감염된다는 소문이었다.


지난 가을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코로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시국에 머나먼 나라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그런 소문은 다 헛소리이고, 그 헛소리에 빠진 나를 보고 미친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코 비행기를 탔다. 그것은 오직 갈증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갈증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갈증에 도통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다가 간신히 눈을 감았다가도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깨어나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막을 헤매는 자가 물을 갈구하는 것처럼 나의 영혼은 갈증을 일거에 일소할 그 무엇을 애타게 찾았다. 목마름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갈증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비롯됐다. 일상의 반복은 치유 불가능한 병이다. 그것은 철저히 나를 왜소화시킨다. 꼼짝달싹 못 하게 내 생각과 행동을 옥죄고, 점점 나의 삶의 영역은 쪼그라진다. 나는 더 이상 왜소화된 나를 볼 수가 없다. 내 모습은 너무 끔찍해서 징그러운 괴물 같기만 했다.


꿈에서 나는 난쟁이로 등장한다. 행동거지에는 주눅이 잔뜩 들어있는 모습의 난쟁이 모습이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남에게 하지 못하고, 활기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기괴한 모습의 난쟁이다.


술 취한 난쟁이는 항상 말한다.


“죽고 싶다.”


그런 와중에 나는 스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열정을 감염시킨다는 마녀의 소문을 들었다. 떠도는 소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산속의 동굴에 산다는군요. 부하라 인근의 산속에 혼자 산다고 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부하라는 인간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도시지요.”


어떤 사람은 조금 다른 얘기를 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지금은 물이 말라가고 있는 아랄해로 가는 길에는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어요. 사막 곳곳에는 수십, 수백 개의 동굴이 있답니다. 오래전부터 기도와 명상을 하는 신비가 들이 수련을 위해 파놓은 동굴이지요. 마녀는 그중의 하나의 동굴에서 거처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 마녀는 신비가 들의 마력을 이어받은 게 확실해요. 그녀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 하답니다. 가끔 한밤중에 사막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불기둥이 보인답니다. 그게 바로 마녀가 기도할 때 뿜어내는 에너지 체랍니다.”


타슈켄트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소문이었다.


‘마녀는 달빛이 하나도 비추지 않는 음산한 날에 타슈켄트에 있는 공원에 나타나며,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진다’라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그 마녀를 봤다고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마녀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타슈켄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그에게서 마녀에 대한 두 가지 단서를 들었다.


“마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공원에 나타납니다. 그날은 꼭 비가 오는 날이죠. 어둠이 몰려올 때쯤에 갑자기 비가 내리면 마녀가 나타날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도 얘기해주었다. 마녀와 가까이 있는 사람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녀의 별칭이 ‘시바의 화신’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모가 뛰어난 그녀에 대해 사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녀는 곧바로 어마어마한 분노를 터트리지요. 주변을 초토화시켜버리지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 모두 숨소리조차 낼 수 없답니다.”


마녀를 만나게 되면 마녀 곁에서 오래 머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마녀를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에 감염되니 그것으로 족할 것이라는 경험자로서의 충고도 해줬다.


나는 소문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시바의 화신’이라. 힌두교도들이 가장 숭배하는 ‘파괴의 신’이 중앙아시아에서 회자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파괴의 신 시바는 ‘창조의 신’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파괴가 존재해야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상과 맞물려 있는 신이다. 파괴할 수 있는 자는 창조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시바는 모순과 불행 죄악 등으로 가득 찬 세상에 분노했다. 그래서 엉성한 세상의 모든 것에 분노해서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신화 속의 신들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시바 신의 상징에는 줄곧 한 가지 코드가 담겨있다. 그것은 분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를 꾹 참고 갈무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분노를 숨기는 것은 내면의 힘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우리는 왜소화되고 자신감을 잃게 된다, 분노의 가면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격이다,   


마녀에 대한 소문을 들을수록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로잡힘이다. 사로잡혔다는 마녀의 힘을 절실히 필요했다는 말이다. 마녀가 마력으로 나를 저 너머로 던져버리기를 기대했다. 저 너머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감성의 영역도 아니다. 이성이나 감성 등 그런 의식의 차원이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인 무의식의 차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 같은 강력한 힘의 도움이 필요했다.


숙소인 타슈켄트 롯데시티호텔 주변에는 공원이 여럿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 지하철역을 끼고 있는 ‘타슈켄트 v 공원’을 주목했다. 안나 게르만의 ‘가을의 노래’를 줄곧 들으면서 공원을 걸었다. 마침 이 가수는 우즈베키스탄의 우르겐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울하면서 서정적인 음색이 비에 젖은 가을의 공원과 잘 들어맞았다.



그 공원은 고목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숲속의 요정이 여기저기 숨어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소지가 충분한 숲으로 이루어진 공원이다. 내가 마녀라면 바로 이 공원을 산책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곳에서 마녀를 봤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타슈켄트에 머무는 10여 일 동안 세 번이나 비가 내렸다. 비가 드문 이 도시로서는 이례적인 날씨였다. 비가 오는 그날 밤에는 나는 어김없이 우산도 없이 공원을 돌아다녔다. 자정이 넘어 공원 내 술집인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공원을 서성거렸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 호텔로 들어온 그 날 밤에는 나는 밤새 끙끙 앓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는 말짱한 몸으로 회복되었다. 언제 앓아누웠는지 모를 정도로 생생한 몸으로 되살아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마녀가 숲속에 있다’라는 증거라고 스스로 의문스러운 해석을 내렸다.

고백건대, 비가 오든 오지 않든 간에 매일 공원을 돌아다녔지만, 사실 마녀를 직접 만나는 것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열정을 감염시키는 마녀가 있다는 소문이 나를 흥분시킨 것에 만족했다. 그만큼 나는 열정에 굶주리고 있었다. 그 어딘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삶이 행복한 자들처럼 나는 마녀에 푹 빠졌다.


다시 말하건대 내가 마녀에 빠진 결정적인 이유는 반복되는 일상 때문이다, 반복하는 일상은 나의 왜소함 때문이다. 반복이 왜소함을 부르고, 왜소함이 반복을 부르는 것이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쳐가고 있었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결코 반복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마녀의 열정을 빌려 나의 진정한 삶을 찾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그날도 온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공원을 돌아보았다.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공원을 벗어나 길 건너편의 카페에 들렀다. 추운 날씨라서 한 잔의 뜨거운 커피가 생각났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니 밤 9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짐을 챙기고 카페를 나섰다.

그때였다. 한 여자가 카페로 들어왔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녀에게 나는 묵례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그녀도 옅은 웃음을 띠고 나의 묵례에 가볍게 응수했다.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갈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삼손의 괴력이 봉두난발의 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도대체 나는 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보면서 삼손의 온몸을 뒤덮는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것일까? 용모가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녀가 마녀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내 곁을 지날 때 나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내 영혼과 온몸이 격렬하게 반응을 했다. 잠깐 스쳐 지나갔는데도 에너지 파동을 강하게 느낀 것이다.


사실 나는 전날 밤에 그녀와 접촉을 했다. 비몽사몽 간에 전화를 받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인간의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굉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이다. 거의 비행기 이륙하는 수준의 커다란 파동이었다.


“미스터 정!….”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실린 목소리였다. 나는 잠이 확 깼다. 내가 들은 것이 실제인지, 잠결인지,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내 영혼을 울리리라는 것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의식 차원의 저 너머에 있는 무의식 차원으로 나를 인도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귀국 후 한동안 멍한 상태로 보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의식은 정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해졌다. 모든 게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 목소리는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는 에너지 체를 서서히 흔들어 깨웠다. 에너지 체가 살아나면서 나의 감각도 예민하게 살아났다. 예민해진 감각은 나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그 무엇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분노이다. 일상의 나를 파괴하고픈 분노이다. 분노는 사바신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가을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마녀의 얘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다. 그전에 나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삽화와의 화해이다. 삽화 안에 너무 많이 묻어 놓으면 삶은 왜소화된다. 열정과 에너지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는 두 가지 삽화가 항상 거울처럼 걸려 있다. 삽화에는 어머니와 어린 내가 등장한다.하나는 병실에서의 삽화이다.


병실에 들어서자, 누워있던 어머니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내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얼굴로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볼 뿐이다. 응석을 부릴 나이의 어린 나였지만 나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침묵의 분위기 속에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이틀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해 가장 추울 때 돌아가셨다. 동네 어른들은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의 시체를 묻을 얼어붙은 땅을 파느라 무척 고생했다고 했다고 했다.


또 하나는 겨울날의 삽화이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 밤 어머니는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 손을 쥐고는 있었지만, 한마디 말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볼 따름이다.


하얀 밤 검은 옷, 무표정한 어머니의 얼굴과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삽화의 구성이다, 기괴한 그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삽화를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었다. 무의식 차원에 그 삽화를 묻어두었다. 나는 두려웠다.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도 무서웠다. 한마디 말이 없는 어머니가 나를 질식 시킬 것만 같았다. 내가 마음 깊은 곳에 두 개의 삽화를 꼭꼭 숨겨두었던 이유이다. 마음 깊은 곳은 나의 무의식의 영역이다, 나는 그동안 무의식의 영역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타슈켄트에서 돌아온 후 나의 무의식 속에 봉인해둔 삽화를 해제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그것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라고 불렀다. 우리가 직시하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영역이 그림자이다. 칼 융이 말한 그림자는 내게는 두 개의 삽화이다. 칼 융은 그림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그림자를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림자와의 화해야말로 그 사람을 온전히 존재케 한다는 설명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엇박자가 돼서는 안 된다. 억누르려고 하는 데서 에너지가 쓸데없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 말은 전적으로 옳다.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로 나는 항상 힘들어했다. 충동을 막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내 삶에서 항상 에너지 부족을 느낀 것은 무의식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미스터 정!’ 타슈켄트에서 온 지 거의 한 달이 다되어가지만 지금도 어마어마한 진동이 내게 전달된다, 마녀의 진동을 받은 나는 용기를 내어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길을 걷던 어머니가 멈추고 나를 보며 방그레 웃는다. 크리스마스 캐럴도 들려온다. 어머니가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아이야.”


병석에서 어머니도 내게 손짓했다.  

“아이야, 가까이 오렴.”




세상에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새롭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것 역시 명백히 거짓이다. 세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내가 둔감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반복되는 것은 없다. 사람의 마음만 반복된다, 변형은 여기에서 일어난다.


변형은 의식의 차원에서만 이루일 수 없다. 의식의 차원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변형은 변형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변화일 뿐이다. 변형에는 무의식이 중요하다. 내면 깊숙이 무의식 차원에서 숨어 있는 열정을 뿜어내는 사람들만이 변형할 수 있다.


나는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짐을 다시 챙겼다. 이번에는 동남아시아였다. 방랑은 나를 만나는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은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길이다. 앞으로 끝없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나는 나를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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