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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Oct 19. 2021

방랑의 여정 –키이우에서 방랑 당하다


깨달은 자들의 주문은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영웅적인 삶을 산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무 쉽고 단순해 보여서 사람들은 실소를 터뜨리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 헤어나기 힘든 함정이 있다. 단순한 것이 문제이다. 단순한 것은 그 참모습을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을 실행하기는 더욱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내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정착민의 자세로는 그것의 정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주문은 다음과 같다.


‘너, 자신으로 살라.’


도시는 창백했다. 핏기없는 얼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이내 돌아눕는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보리스필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받은 첫인상은 우울하다는 것이었다.


긴 여정, 중간기착지로 이스탄불을 거치는 긴 여정으로 몸이 피곤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울한 하늘이 맘에 걸렸다. 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숙소인 호텔로 이어지는 도로도 온통 잿빛 일색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것은 이른 새벽이었는데 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를 넘어서고 있었다. 6시간의 시차를 고려하면 정말 긴 여정이었다.  서울과는 달리 어둠이 일찍 몰려 왔다.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자 호텔 주위가 차츰 어두워졌다. 마음도 덩달아 착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 잠기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까닭 모를 슬픔에 잠겼다. 뒤늦게 알았지만 슬픔의 원인은 자아의 결핍이었다. 가슴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타인을 모방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자아의 부재 상태 말이다. 당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얼마 전부터 말이다. 이유는 모른다.

따라서 키이우에서의 시간은 오점으로 얼룩져버렸다. 열정으로 흥분에 들떠야 할 여정이 낡고 초라한 흑백 사진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 든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무력감이 치명적인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자유로울 수 없다.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인 자발적 활동이 소멸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의 사고, 의 감정, 나의 판단과 결정, 나의 행동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모방뿐이다. 모방은 무한히 반복되는 복사이다. 삶이 모방의 연속이라면 일생동안 단 한 권의 같은 책을, 또는 책의 한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감수성도 창조도 자유도 있을 수 없다. 무력감만 증폭될 뿐이다.


무력감은 또한 게으름을 불러 들인다. 게으른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황금도 돌로 보일 것이다. ‘현대를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으로 규정한 조셉 캠벨은 용서할 수 없는 죄로 ‘게으름을 방치’하는 것을 첫 번째로 꼽았다. 게으름은 신화적 의미에서도 원죄라는 말이다.



게으르고 패배한 영혼에게는 우리를 압도하는 장엄한 광경도 시시한 장소일 따름이다. 역사적 장소로도 잘 알려진 곳, 더구나 난생처음 방문한 키이우에서 나는 거의 아무런 감흥을 받을 수 없었다. 사실 키이우의 여정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줄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가득 찰 줄 알았다. 유서 깊은 도시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보면 중세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특이한 시공간 속으로 들어설 줄 알았다.

하지만 난 몇 번의 미팅과 식당을 간 것 외에는 호텔 밖을 나서지 않았다. 호텔 앞 도로 한복판에 말을 탄 장군상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한때 유럽의 강국이었던 ‘키이우 공국’의 유명했던 장군이었을 것이다. 다소 추레해 보이는 동상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상상한 것은 엉뚱하게도 내가 동상을 물청소하는 광경이었다. 지금도 ‘키이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초라한 동상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키이우에서 동상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내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봐도 보잘것없은 여정이었다.


방랑자는 무엇보다 영혼을 돌보는 자이다. 영혼이 활활 불태워지는 것을 아는 자이다. 나는 키예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어 버렸다. 나는 방랑을 한 것이 아니라 방랑을 당한 것이다. 방랑 당한 영혼에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고, 공간은 소멸의 공간이다.


서울로 돌아왔어도 무력감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기억이 없다. 남들의 삶, 즉 복사하고 복사하는 삶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아니면 멍한 상태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키이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청량리역사에 있는 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아침부터 찾은 청량리역사에서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역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곳을 정말 알고 있을까?’


역사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도시가 어둠에 물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둠은 슬며시 찾아왔다. 비는 그때까지 내리고 있었다. 당시 청량리는 내게 황무지였다. 아니 내게는 모든 곳이 황무지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황무지에 홀로 서서 망연자실했다. 몸을 움츠리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삶은 하나이면서 두 개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모든 문제는 항상 내게 있다’라는 그 하나이고, ‘모든 답도 내게 있다’라는 것이 그 둘이다. 이것은 둘이면서 하나의 진리로 꿰뚫어진다. 내가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갈 길은 정해졌다. ‘황무지에 들어간 것도 나’였다면, ‘황무지에서 나오는 것도 나’였다.



가슴을 꽁꽁 여미고 거센 비바람을 피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가슴을 활짝 열어젖혀서 거센 바람이 나를 꿰뚫고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답이었다. 즉 삶을 특정한 틀 속에 가두려 하는 안식처로부터 뛰쳐나가는 것이 답이었다. 모방과 복사의 삶은 가두는 것이고, 위험하지만 단 하나만의 삶은 뛰쳐나가는 것이다.


엑스터시(황홀경)는 의미 있는 말이다. 이는 나가라는(ex) 말이다. 껍데기를 깨고 안식처로부터 벗으라는 말이다. 그게 황홀한 자유인 것이다. 엑스터시가 내가 가야 할 방랑의 길이었다. 언제까지 청량리로 대변되는 황량한 황무지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군산으로 향했다. 10대 때 떠나온 군산은 내게 매우 거칠게 대했다. 군산은 내게는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무력해진 나의 삶을 거친 황무지의 한복판에서 깨부숴야 했다.


전날 밤에는 분명 서울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한 취기에 몸이 달아오른 기억이 난다. 서울역에서 밤늦은 기차를 탔나 보다. 술이 깨고 보니 익산역이었다.


새벽바람이 차다. 입으로 호호 불며 손을 비벼본다. 두어 시간 기다리다 군산행 첫 기차를 탔다.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줌마 몇몇도 탄다. 그들 몸에서 배어 나오는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선창가로 가는 장사하는 아줌마들인가보다.

내가 가야 할 곳도 아줌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 금강의 하굿둑 언저리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벤치가 놓여 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이른 새벽이고 갑작스러운 추위가 사람들을 몰아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잡초만이 의자 주변에 널브러져 있다. 빈 의자에 앉았다. 나는 결국 자판기 커피 한잔을 마시러 밤새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온 것이다. 핸드폰에서는 ‘부베의 연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안락한 삶 대신 감옥 간 부베를 선택한 여주인공을 떠올리면서 커피를 마셨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말한 것도 기억해냈다.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


군산으로의 돌발적인 여정은 무력해진 나의 마음을 일깨우는 데 충분했다. 남들이 보기에 ‘미친 짓’, 또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치기’로 치부할망정 내게는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말했다.


“불필요한 것은 꼭 필요하다.”


삶은 근본적으로 혼돈이다. 삶은 어디에도 끝나지 않을 것이며, 길이 끝나는 지점은 없다. 방랑의 길은 멈춤이 없고, 계속될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걷는 방랑은 절실한 영혼들의 몫이다. 진정한 방랑자에게는 기억해둘 일화가 있다. 임제 선사의 마지막 말이다.


임제는 제자를 가르칠 때 질타하는 고함인 ‘할’로 유명하다. ‘할’은 그만의 제자 교육방식이다.

생의 마지막 날, 임제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훗날 사람들이 정법안장에 대해 묻는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수제자인 삼성이 바로 ‘할!’ 했다.

임제가 말했다.


“나의 정법안방이 이 눈먼 당나귀에게서 멸해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에서 정법안장은 깨달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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