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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Oct 06. 2021

방랑의 여정 – 타슈켄트에서 추석을 보내다

나는 질병에 걸렸다. 불안이라는 질병이다. 질병은 어원상 팔꿈치를 편히 놓일 자리가 어긋났다는 말이다. 나는 팔꿈치를 놓을 자리를 찾아다녔다. 한두 해 정도면 충분하리라 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마 평생 찾으러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명절에 내가 낯선 곳으로 잠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추석은 부질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친지들을 만나고 덕담을 나눠야 한다는 명절날의 시간은 내겐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명절날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진다. 친지들은 또 하나의 군중이다. 나는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군중은 결국 타인이고, 불안은 타인이 아닌 오직 개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명절이면 홀로 낯선 곳으로 사라진다.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그리고 더 낯선 곳으로 사라져 간다. 명절날 낯선 곳으로 방랑하는 것은 내게는 하나의 성지순례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보자. 성지순례라니. 과분한 말이다. 나는 추방자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 추방이라 했던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된 ‘오디푸스’가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추방자가 된 것처럼 나는 자발적 추방자가 된다.


‘돌의 도시’라는 이름과는 달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는 공원이 많다. 타슈켄트 시내의 ‘브로드웨이’라는 젊은이의 거리를 거닐다가 인근의 공원을 찾았다. 티시 이히노호사의 노래를 들으며 걷는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운색어린 목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그녀의 노랫말이 요동쳐 사방에서 들려온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Donde voy)?’ 

한참을 걸었더니 온몸에 피곤이 배어버렸다. 그저 푹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을 찾았다. 추석 전날 오전 내내 내가 한 일은 기껏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저 멍한 상태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벤치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하늘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구김살이 하나 없는 하늘이 나를 자극적으로 유혹한다, 


‘팜므파탈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스르르 눈을 감아본다. 눈을 감았어도 푸른 하늘이 순식간에 다가온다. 하늘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간다. 어느 순간 나는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사라지는 꿈을 종종 꾼다. 어디로 사라질지 난 모른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내가 방랑을 떠나는 것도 이 꿈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왕은 나라에서 유명한 화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화가를 불러,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그림을 한 달 안에 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달이 지나서 왕은 화가의 방을 찾았다. 화폭에는 아무것도 그려진 게 없었다. 왕은 화를 냈다. 그러나 화가는 붓도 들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화폭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또다시 한 달이 지났다. 방문을 열자 그림이 보였다. 깊고 높은 산들이 겹쳐서 그려져 있고, 산속으로 오솔길이 나 있는 그림이었다. 방금이라도 산속에 들어간 느낌이 들 정도를 기세가 등등한 그림이었다. 왕은 감탄했다, 왕이 그림에 관해 설명해 달라고 하자, 화가는 왕을 힐끗 한번 바라보고는 성큼성큼 그림 속의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그림 속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추석 전날 저녁에는 침간산으로 향했다. 타슈켄트 시내에서 침간산까지는 불과 1시간 반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차르박’ 호수 뒤편에 우뚝 솟은 3천여 미터의 거대한 봉우리가 바로 침간산이다. ‘푸르다’는 이름과는 달리 침간산은 매우 거친 구석이 있다. 내가 침간산을 찾은 것은 물론 이곳을 트레킹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추석 전날 이라는 것과 낯선 곳에서 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 병이 도진 탓이다.


침간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달이 떴다. 고국의 땅에서도 같은 추석 보름달이 보일 것이다. 같은 달인 데도 이국땅에서 보는 달은 다소 처량해 보였다.


‘고려인들은 추석 보름달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구소련 스탈린치하 시절에 삶의 터전인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추방돼온 우리의 선조들 얘기다. 그들은 무엇보다 두려움 속에서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추석날이 주는 의미가 역으로 작용, 더욱더 불안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전통, 특히 추석에 함께 어울리면 우리는 보호받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그렇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이들에게는 안전 대신 불안, 안락 대신 불안, 편함 대신 불안이 엄습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된 것일까? 나 역시 차창 너머로 보이는 보름달을 보면서 까닭 모를 불안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지난해 추석날의 삽화이다.


올해 추석에는 나는 서귀포 대평리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평리 바닷가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바닷가 카페에서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넋 놓고 무심하게 스스로 나를 바라보았다.


추석 즈음에 서울을 급히 떠나온 것도 역시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불안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불안은 집요하게 나를 따라붙는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하얀 곰 효과’처럼 불안은 나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말았다. 무의식은 나의 삶을 고정 시킬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무의식의 주인장으로 자리매김한 불안은 내면의 에너지를 마구마구 흘려보낼 것이다. 불안에 지치고 피곤해진 내 모습이 그려진다.

이럴 때는 낯선 곳으로 홀로 떠나야만 한다. 낯선 곳에서 내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해진다. 홀로 있음은 거울을 보듯 자신의 마음 자체를 분명하게 보게 한다. 홀로 있는 것은 주변에 방심하지 않고, 삶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 있는 것이다. 예민한 자는 홀로 설 수 있으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소위 ‘영웅의 길’이다.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자신의 길을 걷는 자가 신화 속의 영웅이다. 신화는 시공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다. 게으르고 태만한 자는 홀로 있을 수 없다. 그런 자의 삶은 타인에 의존하는 외로움 속으로 전락해버린다. 의존은 노예의 길로 인도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 시대 ‘신화의 힘’을 역설한 조셉 캠벨의 경고를 음미해야 할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은 죄악인 태만을 내버려 두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 꼭 기억할 것은 불안이라는 나의 질병은 치료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치료는 끝을 암시한다. 치료되었다는 것은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게 필요한 것은 불안의 치료가 아니라 돌봄이다. 불안에 지속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불안은 고집스레 지속될 것이고 결단코 나의 삶이 지속되는 한 사라지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낱 터무니없는 일이다. 나약한 인간의 존재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불안과 함께 사는 길을 택해야 한다. 나는 낯선 공간을 홀로 떠도는 방랑자의 길이 될지라도 나는 불안을 다독거려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노래 부르고 있다. 내게는 불안한 인간을 다루는 중국의 고전 ‘주역’에서 황혼 무렵 한 늙은이가 길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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