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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Sep 13. 2021

방랑의 여정- 철 지난 바닷가에서 춤을 추다

지난여름 내내 마음을 지배한 것은 춤이었다. 코로나로 옴짝할 수 없던 일상 때문에 우리는 더욱이 춤을 그리워했다. ’거리 두기‘가 어느 정도 해제되면 춤을 추러 가자고 여러 번 엄지 도장 찍었건만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억압할수록 반대로 내면에서는 춤에 대한 갈증이 타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은 어느새 목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내가 수준 높은 예술적인 무용수 또는 대단한 거리의 춤꾼인가 착각할 수 있겠다. 그것은 분명 착각이다.


나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방랑자이고, 춤은 아름다운 삶으로 통하는 통로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치수와 비례가 아름다움의 특질이라는 플라톤의 말이 맞다면 나의 춤은 아름다운 삶으로 연결하는 통로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형식에 너무 집착하면 진실 또는 아름다움이 눈앞에 보여도 놓치고 만다. 이번 여름 내내 춤을 그리워하면서 떠올린 말이 있다. 이사도라 던칸의 말이다.


“내 춤에는 한계가 없어요.”


9월에 들어설 무렵 철 지난 바닷가를 찾았다. 한여름의 뜨거운 영광과는 달리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바닷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철이 지나 초라해진 바닷가에서 무엇인가 할 것이 있을 것만 같았다. 다소 우울하고 왜소한 욕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욕망의 강도는 강렬했다.


출발은 검은 모래사장으로 알려진 제주 삼양 바닷가였다. 새벽녘 붉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바다를 보던 중 ’욱‘하는 감정이 갑자기 치밀어 올랐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걷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퍅한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바닷가 좁은 길을 선택해 걸었다. 마을과 마을을 넘어갈 때는 골목길을 걸었다. 사람들을 마주하기 꺼렸기 때문이다. ‘함덕 바닷가’ ‘김녕 바닷가’를 지날 때는 잠시 인파에 섞이기도 했지만 나는 사람들을 줄곧 피해 길을 걷고 걸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곳은 월정리 바닷가. 월정리를 굳이 목적지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내친김에 종달리 해변까지 걸으려 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이곳에서 발을 멈췄다.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렇게 느꼈다. 사실 육체적으로 지친 것도 멈춰선 까닭이었다.



철 지난 바닷가는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았다. 노소를 불문한 연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커피와 맥주 그리고 환한 미소로 클로즈업되는 그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여름의 열정이 묻어 있는 마지막 삽화가 여기저기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원하는 삽화가 아니었다. 화려한 삽화에 익숙해져 가는 나를 경계한다. 주위에 익숙해지면 둔감해지고, 둔감해지면 아름다움을 놓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초라한 삽화를 원한다. 흑백의 삽화는 항상 나의 마음을 민감하게 깨어있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민감하다는 것은 적어도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민감한 상태에서 삶을 바라보면 세상은 생생하면서 명료하게 보이고 어떤 거대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철 지난 바닷가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월정리 동쪽에 방파제가 보였다.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쌍의 연인과 서너 명의 낚시꾼들이 있었다. 나는 이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을 찾았다.


그동안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해가 바다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바닷가 빈 의자에 앉아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사위는 점점 어두워갔다. 달이 수줍게 구름 사이로 얼굴을 디밀었다. 날씨가 그리 좋지는 않았는지 달빛의 강도는 약했다. 간신히 근처의 윤곽을 확인할 정도로 약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신을 벗고 나는 맨발로 모래사장에 들어섰다. 달빛이 흐릿하게 보이는 시커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는 백사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리듬에 맞춰 맨발로 백사장을 휘저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리듬을 들은 것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제 어찌 되었든 아무래도 좋다. 남이 뭐라 해도 좋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춤을 춘다. 주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춤추는 동안에는.


춤을 춘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나의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몸이 무거워졌다. 격렬하게 춤을 춘 탓인지 몸이 탈진한 것이다. 나는 모래사장에 뻗어버렸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오랜만에 만족감을 느꼈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눈을 감았어도 춤을 추는 여인이 선명하게 보인다. 하늘거리는 옷을 걸치고 바닷가 모래사장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여인의 모습이다. ‘맨발의 이사도라’이다. 자유로운 영혼인 그녀에게서 내가 본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다. 춤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예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자유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사랑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그녀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토즈를 벗어던진 이사라도가 춤을 출 때 자아는 사라지고, 춤추는 형식과 테크닉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녀가 선택한 유일한 것은 자연의 리듬이다. 바닷가라면 물결의 리듬 등 자연의 리듬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작자 미상이지만 ’알프레드 디 수자‘가 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이다. 이사도라 던칸의 춤과 그대로 겹쳐 보인다.


춤을 추는 동안 자아를 던져버리는 것은 ’절정 체험’을 불러일으킨다. 자아가 사라진 빈자리에 강력한 에너지가 흘러들어와 황홀감 경이로움 경외감 등을 불러일으키는 절정 체험 말이다. 절정 체험을 처음으로 소개한 심리학자 매슬로는 ’신비적‘ 체험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했다. 이사도라 던칸의 아름다움은 바로 신비스러운 절정 체험이다.


눈을 떴다. 칠흑 같은 하늘에서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별이 몇 개 보였다. 가까이 물결치는 소리, 그리고 멀리 개 짖는 소리와 차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사도라의 절정 체험을 항상 생각하지만, 내 경우는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웠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도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방랑의 여정이 아직도 멀다는 말이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바닷가를 찾았다. 철 지난 바닷가는 들려주는 얘기가 많다.한적하고 초라한 바닷가일수록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바다가 들려주고 나는 듣기만 한다. 파도가 들려주는 얘기를 듣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된다. 저녁에는 나는 설렌다. 저녁놀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자아가 사라진 곳에 황홀함이 채워진다. 황홀함은 아름다움의 특질 중 하나이다. 나는 그렇게라도 아름다움에 접근하고 싶었다.


나는 분명히 안다. 아름다움은 자아가 사라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마다 타고난 본성을 잘 살리면 그것이 곧 아름다움이다. 어원상 아름다움이란 타고난 내 안의 씨앗(알)을 잘 틔워(옴) 자신만의 색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장미꽃이 호박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활짝 핀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수줍은 호박꽃은 호박꽃대로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비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노자의 도덕경 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2600여 년 전에도 이미 노자는 세간의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지적질 하고 있다. 즉 아름다움의 본질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아를 벗어던지는 것이 그 하나이고,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드러내는 것이 그 둘이다. 이 둘이 아우러질 때만 신비스러운 절정 체험에 이르게 되고, 삶은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엮고 푸는 열쇠가 바로 민감성이다. 민감한 자는 순간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순간의 느낌은 연약하지만 생생하다. 마치 조화가 아닌 생화처럼 아름다운 것일수록 연약하고 생생한 것이다. 이사도라의 춤이 바로 그 훌륭한 예시이다. 그녀는 자아를 던졌고, 순간의 느낌으로 내면에 간직한 자신의 씨앗을 훌륭하게 키워 냈던 것이다.


반면 둔감한 자는 ’순간의 느낌‘ 대신 시간을 요하는 ’사고와 감정’을 우선시한다. 이는 결국 반응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반응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시간의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낡았고, 새롭지 않다. 순간적인 느낌을 방해하기에 시간은 아름다움의 적일 뿐이다.


기억을 거슬러보니 바닷가와 관련, 흑백의 삽화가 여러 장 보인다. 왜소하고 초라한 삽화지만 새롭게 그려서 방랑의 짐꾸러미에 넣어둬야겠다. 제주 모슬포항에서 열리는 방어 축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축제라고 거창할 것은 없다. 그저 방어에 소주를 걸치는 것이다. 축제의 한 마당에 초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차가운 비는 온몸을 적시는데 모슬포항에서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의 어둠, 그 어둠에서 쉼 없이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태고의 적막에 압도당한 것이다. 초라한 축제의 뒤편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압도당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기억이 난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술이 덜 깬 얼굴로 모슬포 거리를 걸었다.  한 여자가 다방 문을 연다. 그 여자의 얼굴도 나의 얼굴처럼 부스스했다. 조금은 늙어 보이는 그 여자의 얼굴에서 나는 삶의 고단함과 설렘을 단숨에 읽어내렸다. 그 여자에게서 아름다움을 엿본 이유를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굳이 얘기하자면 그날 아침 모슬포 거리에서 본 첫 번째 사람이었고, 전날 밤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는 것뿐이다. 누구의 말대로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않으려는 꾸미지 않는 태도 때문일까?


그리고 당시 나는 플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맨발의 이사도라‘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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